그래서 오늘도 난 글을 씁니다
여름 불볕더위가 한 창인 7월의 어느 날 브런치를 통해 원고 작성 제안이 왔다. 출간 요청도 아닌데 오랜만에 브런치를 통해 들어온 제안이라 반가움과 기쁨은 작지 않았다. 생각해 보니 최근에는 신간 서평 요청이 고작이었는데. 글을 써 달라고 온 제안은 따져보니 일 년도 더 지난 시간만큼 오래전 일이었다. 매주 글을 쓰고, 쓴 글을 오마이뉴스와 브런치에 종종 발행은 하지만 반대로 누가 글을 써달라고 요청이 온 일은 흔하지 않은 경험이다.
반가움과 기쁨이 교차하는 한편, 묘한 책임감이 어깨를 눌렀다. 편집장이 이 지면에 어울리는 필자를 찾기 위해 들였을 수고와 책정된 원고료의 무게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감까지 한 달이라는 넉넉한 시간, 그리고 무엇보다 주제가 자유라는 점이 나를 안도하게 했다. 잘 모르는 분야를 억지로 꾸며낼 필요 없이 내가 가장 편안하게, 그리고 진솔하게 풀어낼 수 있는 이야기를 쓰면 됐다. 머릿속에 내가 좋아하는 단어들이 떠올랐다. 여행, 쉼, 그리고 언제나 그리운 섬, 제주도.
제안을 받은 지 일주일이 채 안 된 일요일 오전, 여느 때처럼 찾은 카페에서 불현듯 영감이 스쳤다.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들이 하나의 줄기로 꿰어지는 순간이었다. 나는 단 두 시간 만에 몰입하여 2,100자의 원고를 완성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몇 번의 퇴고를 거친 후 떨리는 마음으로 메일을 보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 간결하지만 더없이 반가운 회신이 도착했다.
'보내주신 원고 잘 받았습니다. 내용 및 분량 모두 좋습니다. 특이사항 없습니다.'
계절이 두 번이나 바뀌어 어느덧 겨울의 문턱에 들어선 11월 말, 오매불망 기다리던 『월간에세이 12월호』가 배송되었다. 빳빳한 새 책의 질감을 느끼며 떨리는 손으로 목차를 펼쳤다. 내 이름 석 자와 글 제목이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모니터 화면 속에서만 존재하던 활자들이 종이라는 물성을 입고 세상에 나온 것을 확인하는 순간 쓸 때와는 또 다른 묵직하고도 깊은 즐거움이 밀려왔다. 나는 조용히 찾아온 이 서프라이즈 선물을 거실 책장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세워뒀다. 오며 가며 눈길을 줄 때마다 새어 나오는 웃음을 한동안 만끽하기 위해서다.
돌이켜보면, 어느덧 6년째 꾸준히 글을 쓰고 있다. 처음 글을 쓸 때만 해도 노트북 앞에 앉기만 하면 열 손가락이 마치 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춤을 췄고, 사연 많은 인생처럼 글감은 마르지 않는 샘물같이 솟아났다. 쓰는 족족 포털 메인 화면을 장식했고, 하루 만에 만 단위의 조회수를 기록하는 일도 잦았다. 쉴 새 없이 울려대는 브런치 알림음이 곧 내 글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2년 여가 지나자 일상과 글쓰기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소재는 점차 말라갔다. 연차는 쌓여가는데 글은 제자리걸음인 것만 같아 초조했다. 막연히 기대했던 정식 출간 제의는 4년 차가 넘도록 요원했다.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익숙해졌지만, 그것이 곧 수익으로 직결되지는 않았다. 오마이뉴스에 정성 들여 송고한 글이 번번이 가장 낮은 등급인 '잉걸(고료 2천 원)'에 채택될 때면, 내 글의 가치가 고작 그것밖에 안 되나 싶어 자존심이 상하고 깊은 자괴감마저 들었다. 과거 '오름'이나 '으뜸' 기사로 선정되던 기억이 오히려 독이 되어 나를 괴롭혔다. '다음 주부터는 글을 쓰나 봐라.'하고 수없이 다짐했지만, 그 객기는 채 일주일을 넘기지 못했다.
손에 잡히는 뚜렷한 결과물 없이 열정이 서서히 식어가던 시기, 매주 글을 발행하는 일은 마치 하기 싫은 숙제를 억지로 해치우는 것처럼 고역이었다. 한 주라도 건너뛸까 싶은 유혹이 수시로 찾아왔지만, 지금 여기서 멈추면 영영 다시는 글을 쓰지 못할 것 같은 막연한 두려움이 나를 붙잡았다. 무엇에 홀린 사람처럼, 의무감과 관성으로 근근이 글쓰기를 이어갔다.
그렇게 지난 시간을 버텨온 끝에 마주한 이번 원고 청탁은 그래서 더 각별하고 의미가 깊었다. 그동안의 내 꾸준함이 헛되지 않았음을, 누군가는 나의 묵묵한 걸음을 지켜보고 있었음을 확인받은 것 같아 가슴이 벅차올랐다. 때로는 지치고, 때로는 포기하고 싶었던 순간들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에게 글쓰기는 여전히 가장 매력적인 일이다. 온전히 나 자신과 마주하며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그 시간만큼은 내게 가장 안전하고 재미난 놀이터이자, 아직 긁지 않은 복권을 손에 쥐고 있는 듯한 설렘과 희망의 순간이다.
"여보, 나 카페 다녀올게."
일요일 아침, 나는 습관처럼 아내에게 인사를 건네고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선다. 익숙한 카페의 늘 앉던 자리에 자리를 잡고,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모금을 마신다. 그리고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노트북을 열어 하얗게 깜빡이는 커서를 마주한다. 아직 무엇을 쓸지 정하지 못했지만, 괜찮다. 내 손끝에서 또 어떤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지 나 자신도 궁금해하며, 나는 오늘도 빈 화면을 텍스트로 채우기 시작한다. 이 글쓰기의 여정이 어디로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그저 묵묵히 걷다 보면 언젠가 또 다른 기분 좋은 우연과 마주하게 될 것이라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