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ologue. 지하로 내려온 상처 입은 영혼

by 추억바라기

서울의 초겨울 아침은 늘 그렇듯 잿빛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차가운 공기는 도시 전체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듯했고, 재민은 그 압박감 속에서 어제의 술기운이 머릿속을 두드리는 것을 느끼며 집을 나섰다. 잘 다려진 맞춤 정장, 흠잡을 데 없이 닦인 구두, 그리고 대형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라는 타이틀. 모든 것이 그를 보호하는 갑옷처럼 완벽하게 갖춰져 있었다. 그는 숙취쯤은 아무렇지 않게 숨기고 웃으며 의뢰인과 동료들을 대하는 법을 수년 전부터 익혀왔다. 그것이 이 도시에서 성공한 남자로 그가 살아남는 방법 중 하나였다.

하지만 오늘 아침은 달랐다. 머리 깊숙한 곳에서부터 시작된 둔탁한 통증은 단순한 숙취가 아니었다. 그것은 가슴 한구석에 똬리를 틀고 있던, 알 수 없는 불안감과 뒤섞여 있었다. 1년 전 맡았던 민사소송 사건이 불현듯 떠올랐다. 승소했지만, 승소의 달콤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승소의 순간부터 시작된 찝찝함이 있었다. 마지막 변론 당시 상대편 원고의 눈빛이 뇌리에 박혀 있었기 때문이다. 억울함과 절망이 뒤섞인, 모든 것을 잃은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 그 눈빛 속에서 재민은 변호사로서가 아니라 한 인간으로서 무언가를 잘못하고 있다는 자각을 했었다. 하지만 로펌의 논리는 냉정하고 명쾌했다.

'우리는 의뢰인의 권익을 지키는 사람이지, 정의를 지키는 사람이 아니다.'

그 말은 언제나 옳았고, 재민도 그 말 뒤에 스스로를 숨기며 살아왔다. 그것이 그가 배운 법이었고, 그가 믿는 세계였다.

지하철역으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발을 올렸을 때, 숙취에 지끈거리는 머리와 함께 이상하게도 심장이 빨라졌다. 오늘따라 지하철역 특유의 먼지 냄새, 탁한 공기가 숙취로 힘들어하는 그를 더욱 괴롭혔다. 그는 불쾌한 감각을 떨쳐내기 위해 일부러 잰걸음으로 계단을 내려갔다. 플랫폼에 들어섰을 때, 형광등 불빛 아래 서 있는 한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낡은 점퍼에 구겨진 바지, 헝클어진 머리칼. 몇 날 며칠 술에 절어 있는 것 같은 초점 없는 동공. 얼굴은 이미 삶에 패배한 사람의 얼굴이었다. 1년 전 법정에서 패소하고, 원망 섞인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바로 그 남자였다. 재민은 숨을 멈췄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그가 알아봤다는 기색을 내비칠 필요는 없었다. 아니, 그래서는 안 됐다. 재민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려 모른 척했다. 변호사로서의 지난 선택을 잊고 싶었다. 그날의 찝찝함은 마음 한구석에만 가두어 두면 된다고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것이 그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그렇게 그 사람의 시선을 피해 지나쳐가는 순간, 지하철이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플랫폼으로 진입하는 열차의 굉음, 차가운 바람, 그리고 그 소음 사이에서 들려온 작은 신음 같은 울음소리. 그 순간 재민이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그 남자는 이미 몸을 앞으로 던지고 있었다.

모든 것은 한순간이었다. 브레이크를 밟는 금속성 굉음과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뒤섞였다. 재민의 눈앞에 스쳐 간 건 남자의 낡은 점퍼 자락과, 법정에서 본 그의 억울함과 절망이 뒤섞인 눈빛의 마지막 잔향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 주변의 소음이 사라지고 오직 그 남자의 마지막 모습만이 재민의 사고에 각인되었다.

그날 이후, 재민의 세계는 무너졌다. 장례식장에는 가지 않았다. 상대측 원고인이기도 했고, 재판이 끝난 사건의 당사자였다. 또한 변호사라면 사건 당사자와 불필요한 연결고리를 만들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고 스스로를 두둔했다. 그러나 그의 귓가에는 계속 그 남자의 목소리가 맴돌았다.

"억울합니다. 변호사님, 저는 정말 억울합니다."

법정에서 울먹이며 했던 그 한 마디. 그리고 재민은 그 억울함을 모른 체했고, 철저히 짓밟았다. 의뢰인의 승소를 위해 준비된 논리와 법조문, 상대의 작은 허점까지 도려내듯 철저히 들춰냈다. 그것이 그의 일이었고, 그는 일을 완벽하게 해냈다. 하지만 그 완벽함이 한 사람을 끝까지 몰아세웠고, 결국 지하철 선로 위로 밀어 넣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시간은 재민을 괴롭혔다. 로펌의 회의실에 앉아 있을 때도, 법정에 서 있을 때도, 심지어 혼자 고급 와인을 마시는 순간에도 그 남자의 낡은 점퍼와 흐려진 눈빛이 떠올랐다. 처음에는 술로 잊으려 했다. 다음에는 일로 덮으려 했다. 그러나 결국 어느 쪽도 소용이 없었다. 죄책감은 그림자처럼 그를 따라다녔고, 그의 삶을 잠식해 들어갔다.

결정적인 날은 자살 사건 1주기였다. 재민은 우연히 같은 시간에, 같은 역을 지나게 되었다. 그리고 플랫폼에 서자 다시 그날의 굉음이 되살아났다. 자신은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 장면을 바라보기만 했다는 사실이 그의 마음을 더욱 무겁게 짓눌렀다. 그때 그는 깨달았다. 변호사로서의 그날의 승소는 인간으로서는 패배였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지만 법이라는 칼날을 휘둘러 한 사람의 삶을 난도질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재민은 결국 로펌을 떠났다. 책상 위에 늘어놓였던 판례집과 계약서는 그대로 두고, 이름이 새겨진 명패만 들고 거리로 나왔다. 동료들은 이해하지 못했다. “파트너 자리까지 오른 사람이 갑자기 왜?” “이제 막 잘 나가려고 하는데.” 그러나 그에게 변호사로서의 화려한 자리는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그 모든 것이 그 남자의 죽음 위에 세워진 허상처럼 느껴졌다.

그는 길 위에 섰다. 지하철역에서 시작된 죄책감은 역으로 돌아가야만 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매일 지하철을 떠돌며, 삶의 바닥까지 밀려난 사람들을 바라봤다. 노숙자, 빚에 쫓기는 이들, 가정폭력에 시달리다 가출한 청소년들, 직장도, 가정도 모두 잃고 술에 매달린 중년들. 그 얼굴마다 1년 전 남자의 그림자가 겹쳐졌다. 그들은 모두 법의 사각지대에서, 혹은 법이라는 이름으로 짓밟힌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재민은 마음속으로 결심했다. 이번에는 외면하지 않겠다고. 법이 닿지 않는 곳이라면, 주먹이라도 써서 지켜내겠다고. 법이라는 거대한 시스템 속에서 희생된 그 남자에 대한 속죄의 마음이었다.

그날 이후 많은 시간이 흐르는 동안에도 그는 이 세계에 오래 있지 않을 사람으로 그들에게 여겨졌다. 하지만 그가 지하철 사람들을 대하는 태도와 친절함은 그런 생각들을 바꿨고, 오래지 않아 그에게 이름 대신 닉네임이 붙었다. 지하철 해결사. 이제 그는 더 이상 로펌의 파트너 변호사가 아니었다. 지하철이라는 도시의 어두운 그늘에서, 법과 인간 사이의 틈을 메우려는 한 사람의 방랑자가 되었다. 재민은 주머니 속에서 만년필을 꺼냈다. 로펌 로고가 금박으로 박힌 매끈한 몸체. 그는 잠시 그것을 내려다보다가, 망설임 없이 쓰레기통 깊숙이 던져 넣었다. 텅 빈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자, 차가운 금속 대신 거친 천의 감촉만이 손끝에 닿았다. 그는 비로소 편안해진 표정으로 지하철 계단을 내려갔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