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워크레인의 유령(3)

실체

by 추억바라기

퍽-!

둔탁한 파열음과 함께 좁은 컨테이너 복도가 흔들렸다. 턱뼈에 정확히 꽂힌 민수의 묵직한 주먹에 거구의 용역 팀장이 비틀거리며 철제 벽면으로 처박혔다. 입술이 터지며 붉은 피가 바닥 위로 흩뿌려졌다. 하지만 현장을 굴러먹은 용역 팀장의 맷집은 만만치 않았다. 상대는 넘어지지 않고 벽을 짚은 채, 터진 입술 사이로 핏물 섞인 욕설을 뱉어내며 반사적으로 삼단봉을 휘둘렀다.

"이 쥐새끼가!"

쇳덩이가 섬뜩한 소리를 내며 허공을 갈랐지만, 비좁은 복도에서는 도무지 몸을 피할 틈이 전혀 없었다. 빠악-! 민수의 왼쪽 어깨에 불이 붙은 듯한 끔찍한 통증이 번졌다. 뼈가 울리는 고통에 숨이 턱 막혔지만, 민수는 입술을 깨물며 신음을 삼켰다. 길바닥에서 빚쟁이들에게 쫓기며 터득한 원칙은 단 하나뿐이었다. 한 번 기가 꺾여 물러서는 순간 영영 짓밟히고 만다.

민수는 어깨를 강타당한 반동을 그대로 이용해 앞으로 튕겨 나갔다. 그리고 무방비 상태로 열린 용역 팀장의 명치를 향해 자신의 머리를 무자비하게 들이받았다.

"크윽...!"

내장이 꼬이는 충격에 용역 팀장의 눈이 까집어지며 거구가 뒤로 고꾸라졌다. 민수는 바닥에 나뒹구는 놈을 타 넘고 복도 끝 비상문을 발로 걷어차며 밖으로 튀어 나갔다.

"저 새끼 잡아! 소장실을 턴 도둑놈이야!"

숨을 헐떡이며 몸을 일으킨 용역 팀장의 고함이 무전기를 타고 공사 현장 전체로 찢어질 듯 퍼져나갔다. 1층 공터로 뛰어내린 민수의 눈앞에 흙먼지가 자욱한 삭막한 공사장이 펼쳐졌다. 철근을 나르던 인부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길을 터주었지만, 곳곳에서 노란 완장을 찬 십여 명의 용역들이 흉흉한 기세로 사방에서 몰려들고 있었다.

“민수야, 정문 쪽은 이미 막혔어. 우측 3번 게이트 쪽 폐자재 더미로 뛰어! 거긴 펜스가 얇아!”

이어폰 너머로 들려오는 재민의 목소리는 극도로 차분했다. 당황하지 않고 현장 도면을 머릿속에 그리며 도주로를 계산해 내는, 건조하지만 정확한 음성이었다.

민수는 숨을 크게 들이마시며 3번 게이트 쪽으로 전력 질주했다. 등 뒤로는 여러 명의 용역들이 내지르는 고함과 투박한 발소리가 맹렬하게 따라붙고 있었다. 뛰는 내내 공사판의 흙먼지가 날려 입안이 까끌거렸지만, 침을 뱉어낼 여유조차 없었다.

"잡아! 다리몽둥이를 부러뜨려서라도 끌고 와!"

굳게 닫힌 3번 게이트의 낡은 철제 펜스 앞에 가로막히자, 끈질기게 뒤따라온 용역들이 거친 숨을 토해내며 서서히 포위망을 좁혀왔다.

"독 안에 든 쥐새끼 신세네. 너, 이 새끼! 이리 와봐. 아주 시멘트에 공구리를 쳐줄 라니까."

어느새 쫓아온 용역 팀장이 입가의 피를 닦아내며 쇠파이프를 집어 들었다. 퇴로는 완벽하게 차단당했다. 민수가 놈들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주머니 속 USB 위로 두 손을 겹쳐 누르며 이를 악문 순간이었다.

콰아앙-!

타이어가 아스팔트를 긁는 날카로운 마찰음과 함께, 등 뒤의 3번 게이트 철제 펜스가 통째로 뜯겨나가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흙먼지를 뒤집어쓴 낡은 사설 구급차 한 대가 펜스 잔해를 무자비하게 깔아뭉개며 용역들 한가운데로 거칠게 밀고 들어왔다.

벌건 흙먼지를 뚫고 튀어나온 것은 다름 아닌 낡은 사설 구급차였다. 범퍼에 찌그러진 철제 펜스를 단 채, 구급차는 용역들 앞을 가로막으며 급정거했다. 타이어가 비명을 지르며 흙바닥 위로 깊은 스키드 마크를 새겼다. 운전석의 마도식이 몸을 뻗어 조수석 문을 거칠게 열어젖혔다. 그의 손에는 거대한 몽키 스패너가 들려 있었다.

"타, 이 미친놈아! 죽고 싶어서 환장했어?!"

민수는 두 번 생각할 겨를도 없이 열린 조수석 안으로 몸을 던졌다. 민수의 발이 차 안으로 채 들어오기도 전에 마도식은 기어를 1단으로 구겨 넣고 액셀을 끝까지 밟았다. 구급차가 괴성을 지르며 후진하더니, 순식간에 차체를 돌려 부서진 펜스 밖 도로로 튕겨 나갔다.

"저... 저 미친 구급차 뭐야! 번호판! 번호판 찍어!"

용역들이 뒤늦게 쇳덩이를 집어던지며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지만, 마도식은 이미 흙먼지 차단용으로 번호판에 진흙을 잔뜩 발라놓은 상태였다. 구급차는 큰길에 접어들자마자 신경질적인 사이렌을 끄고, 빽빽하게 늘어선 도심의 차량 행렬 속으로 교묘하게 섞여 들었다.


두 시간 후 구급차가 은밀하게 멈춰 선 곳은 영등포의 낡은 철공소 건물로 위장한 마도식의 은신처였다.

"하아... 하아..."

민수는 낡은 가죽 소파에 널브러진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작업복은 시멘트 가루와 진흙으로 엉망이었고, 삼단봉에 맞은 어깨는 시퍼렇게 멍이 들어 부풀어 올라 있었다. 마도식이 말없이 다가와 민수의 어깨에 얼음주머니를 툭 던져주었다.

재민은 민수의 상태를 살필 겨를조차 없었다. 민수가 목숨을 걸고 빼 온 USB를 노트북에 꽂고 곧바로 내부 폴더를 열었다. 화면 위로 빽빽한 엑셀 파일 수십 개가 쏟아져 나왔다. 쏟아져 나온 방대한 양의 엑셀 파일들을 하나씩 클릭하며 훑어 내려가는 재민의 시선은 모니터 화면에 고정한 채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마우스를 움직였다.

'강남 4 구역 출력일보', '차명 계좌 이체 내역', '컨설팅 용역비 송금 대장'.

방대한 숫자들을 빠르게 훑어 내려가던 재민의 마우스 스크롤이 어느 순간 딱 멈춰 섰다.

"역시... 내 예상이 맞았어."

재민은 마우스 커서를 클릭해 두 개의 창을 나란히 띄웠다. 왼쪽은 민수가 방금 빼온 거북건설의 '유령 인부 이중장부'였고, 오른쪽은 김소연이 제공했던 JS 홀딩스의 'VIP 리스트'였다.

"민수야, 이리 와서 이거 좀 봐."

재민의 조금 격앙된 목소리에 민수가 얼음주머니를 댄 채 끙끙거리며 다가왔다.

"이게 놈들이 공사판에서 피를 빨아 자금 세탁하는 완벽한 구조의 실체야." 재민의 손가락이 모니터를 가리켰다. "1단계. 매일 50명의 페이퍼 워커에, 현장에 들어오지도 않은 굴삭기와 펌프카 대여료까지 가짜로 꾸며내어 거북건설 본사에 청구한다. 2단계. 하청업체를 통해 이 돈을 수십 개의 차명 계좌로 쪼개어 입금받고 전액 현금화한다. 3단계. 이 세탁된 현금이 매월 말일, JS 홀딩스의 자회사인 JS 건설 컨설팅으로 흘러 들어간다. 명목은 현장 안전 관리 자문료로."

재민이 마우스를 움직여 김소연의 VIP 리스트 탭으로 화면을 이동했다.

"그리고 4단계. JS 홀딩스로 들어간 그 더러운 돈이 최종적으로 어디로 꽂히는지 봐."

민수의 눈이 모니터 하단에 고정되었다. 자금의 최종 종착지인 그곳에는 개인의 계좌 번호가 아니라, 특정 재단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사단법인 희망복지포럼 - 기부금 명목 매월 5억 송금

"희망복지포럼...? 이게 뭡니까?"

민수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등 뒤에서 팔짱을 끼고 있던 마도식이 낮게 코웃음을 쳤다.

"저거, 뉴스 틀면 허구한 날 나오는 그 양반이 만든 재단 아니야. 서민의 친구니, 노동자의 대변인이니 떠들고 다니는 그 잘난 양반."

재민이 무겁게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위원장이자, 유력한 차기 대권 주자인 문상호 의원."

모두의 낯빛은 무거워진 표정들로 어둡게 바뀌었다.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문상호. 방송 카메라 앞에서 밑창 떨어진 구두를 들이밀며 서민을 부르짖던 4선 중진 의원이었다. 소외계층을 돕는다며 요란하게 포장해 놓은 그 자선 단체의 실체는, 결국 밑바닥 인부들의 핏값을 빨아먹고 몸집을 불리는 대선 자금의 돈줄이었다.

"와... 진짜 미친 새끼들이네." 민수가 허탈한 헛웃음을 흘렸다. "크레인 기사님들 피 빨아먹고, 뼈 빠지게 일하는 노가다 인부들 일당 삥땅 쳐서 만든 돈으로 서민 코스프레를 하면서 대선 자금을 모으고 있었다고요? 오야지는... 동호 형님은 이걸 터트리려다가, 그 거대한 권력자들 손에 허무하게 죽음을 맞은 거네요."

재민은 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툭 던져놓았다. 모니터를 향해 고정된 그의 두 눈에는 짙은 피로와 함께 억눌린 분노가 깔려 있었다.

"이건 단순한 건설 현장 횡령 사건이 아니야. 대권 주자와 거대 기업, 그리고 대한민국 최고 로펌이 끈끈하게 결탁한 완벽한 카르텔이다. 박수현 상무 구속은 거대한 댐에서 작은 돌멩이 하나 빼낸 것에 불과했어. 태산의 오영석 대표가 왜 그토록 이 장부의 반쪽을 감추려 했는지, 왜 살인까지 묵인하며 꼬리를 잘랐는지 이제야 명확해졌어."

"그럼 형님, 이제 어쩔 겁니까? 이 완벽한 증거, 당장 검찰에 넘깁니까?"

"아니."

재민이 단호하게 잘랐다.

"검찰 수뇌부 중 일부도 이미 저 VIP 리스트 안에 포함되어 있어. 특수부에 넘겨봤자 수사 기밀만 저들 귀에 들어갈 뿐이야. 덮어버릴 여지가 생기는 거지. 최대한 시끄럽게 만들어야 해. 그러려면 여론의 법정에 세워야 해. 지난번처럼 기자회견으로 터트리되, 이번엔 도마뱀의 꼬리가 아니라 심장을 직접 찔러야지."

재민은 턱을 괸 채 화면 속 '문상호'라는 세 글자를 묵묵히 응시했다. 저 거대한 카르텔의 심장을 단번에 도려내려면 자신의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는 것쯤은 이미 뼛속 깊이 각오한 터였다.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않고 노트북 키보드를 두드리기 시작했다. 화면에 띄워진 장부 파일들이 철저하게 암호화되어 백업되고, 여론의 법정에 불을 지필 치명적인 뇌관이 그의 차가운 손끝에서 서서히 형태를 갖춰가고 있었다.


같은 시각. 여의도의 한 최고급 한정식집 독립 공간. 바깥의 소음이 완벽하게 차단된 프라이빗 룸 안에는 값비싼 침향 냄새가 은은하게 감돌고 있었다. 넓은 상석에는 잿빛 개량 한복을 입은 중년 남자가 앉아 젓가락으로 나물을 깨작거리고 있었다. 문상호였다.

그의 맞은편에는 로펌 태산의 오영석 대표가 불편한 자세로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백전백승을 자랑하는 거물 오영석조차 맞은 편의 한 남자 앞에서는 고양이 앞에 쥐로 보일만큼 잔뜩 얼어 있었다. 두려울 것 없을 것 같은 그도 권력의 정점 앞에서는 한낱 범인에 불과했다.

"오 대표."

문상호가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나직이 입을 열었다. 말투는 시골 촌부처럼 구수했지만, 눈빛만큼은 먹잇감을 노리는 독사처럼 예리하고, 차가웠다.

"거머리가 피를 빨면 조용히 소금 뿌려서 떼어내야지, 왜 자꾸 긁어 부스럼을 만드나. 박창길 회장 아들내미 단속 하나 못해서 내 이름이 오르내리게 만들어? 내년이 대선이야."

"의원님, 송구합니다." 오영석이 고개를 깊이 숙였다. "최재민이라는 놈이 예상외로 독하게 물고 늘어지고 있습니다. 놈이 거북건설 이중장부의 존재를 눈치챘습니다. 오늘 낮에 현장에 위장 잠입해 기어이 자료를 빼냈더군요."

탕-! 문상호가 마시던 최고급 백자 찻잔을 테이블에 거칠게 내려놓았다.

"그래서? 그깟 변호사 나부랭이 하나 통제 못 해서, 내 대선 캠프 자금줄이 끊어지게 생겼다? 오 대표, 자네 서초동에 걸어둔 태산 간판 떼고 싶어?"

오영석의 미간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는 마른침을 삼키며 품에서 서류 봉투 하나를 꺼내 테이블 위로 밀어 올렸다.

"염려 마십시오. 입을 막으려면 혓바닥을 잘라 버리고, 날아드는 주먹을 막으려면 손목을 자르면 됩니다." 오영석의 얇은 무테안경 너머로 눈빛이 잔인하게 번뜩였다. "최재민은 철저히 법을 무기로 싸우는 놈입니다. 그렇다면 휘두르는 무기를 뺐어버리면 그만입니다. 놈이 갖고 있는 변호사라는 타이틀을 영구 제명하고, 싸우는 링 밖으로 추방시킬 겁니다."

문상호가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서류를 흘끗 내려다보았다.

"대한변호사협회 징계위원회 회부 요청서? 이걸로 그 미친개를 묶을 수 있겠나?"

"단순 징계가 아닙니다. 최재민은 오늘 거북건설 현장에 측근을 위장 잠입시켜 서류를 빼냈습니다. 명백한 '절도 교사'이자 '주거침입 교사'입니다. 또한 과거 태산에 있을 때 취득한 고객(JS 홀딩스)의 비밀을 이용해 협박을 일삼았다는 명목으로 '품위유지 의무 위반'을 더했습니다."

오영석은 서늘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의원님의 힘이라면 통상 수개월 걸리는 변협 징계위 소집을 내일 아침으로 당길 수 있습니다. 최재민이 입을 열기 전에 긴급 직무 정지 처분부터 때려버리는 겁니다. 불법 증거 수집으로 징계받은 범죄 혐의자의 폭로입니다. 증거 능력도 훼손될뿐더러, 언론 역시 흠집 난 자의 입에서 나온 자료는 함부로 기사화하지 못할 겁니다."

문상호는 잠시 말없이 오영석을 쳐다보더니, 이내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다시 젓가락을 들었다.

"오 대표. 난 이런 복잡한 법 얘기는 영 체질에 안 맞아. 서민들 살기 좋은 세상 만들려면 길거리에 나뒹구는 쓰레기는 치워야지. 알아서 깔끔하게 소각해. 탈 안 나게."

"명심하겠습니다."

오영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바닥을 향한 그의 입가에 희미하고 비열한 웃음이 걸렸다. 덫은 완벽했다. 내일 아침이면 최재민은 자신이 빼 든 칼에 제 목이 찔린 채, 시스템이라는 거대한 벽 앞에서 비참하게 짓밟힐 터였다.


다음 날 오전 9시, 날이 밝았음에도 비가 내릴 듯 잔뜩 흐려진 잿빛 하늘이 서울지방검찰청을 어둡게 덮고 있었다. 재민은 한 손에 묵직한 서류 가방을 들고 검찰청 정문을 향해 묵묵히 걸어가고 있었다. 가방 안에는 민수가 빼 온 출력일보 원본 파일과 JS 홀딩스의 자금 흐름을 완벽하게 교차 검증한 고발장, 그리고 기자들에게 뿌릴 보도자료가 들어 있었다. 이 서류가 특수부 접수창구를 통과하는 순간, 문 의원을 향한 수사는 피할 수 없는 현실이 된다.

"최재민 변호사님."

검찰청 회전문 앞. 검은 양복을 입은 사내 두 명이 재민의 앞을 막아섰다. 가슴팍에 태산의 로고가 박힌 금배지를 단 오영석의 수족들이었다.

"비키시죠. 명색이 국내 최고 로펌 똘마니들인데, 고작 남의 앞길 막는 '업무방해' 따위나 하고 있으면 쓰나." 재민이 차갑게 내뱉으며 걸음을 옮기려 했지만, 그들 뒤에서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온 태산의 정만식 변호사가 서류 한 장을 재민의 가슴팍에 툭 들이밀었다.

"선배. 발걸음이 좀 늦으셨네요. 오늘 오전 8시 30 분부로 긴급 송달된 공문입니다."

재민이 서류를 받아 들었다. 발신인은 '대한변호사협회 징계위원회'. 서류의 제목을 읽어 내려가는 재민의 동공이 미세하게 굳어졌다.

결정문: 최재민 변호사에 대한 긴급 직무 정지 명령

사유: 주거침입 교사 및 절도 교사(형법 제31조, 제319조, 제329조), 과거 수임 사건의 기밀을 악용한 변호사법 제24조(품위유지 의무) 및 제26조(비밀유지 의무)의 중대한 위반.

정만식이 노골적으로 조롱 섞인 웃음을 흘렸다.

"선배가 어제 거북건설 현장에 심어놓은 끄나풀, 저희가 모를 줄 아셨습니까? CCTV에 싹 다 찍혔습니다. 절도에, 폭행에, 주거침입까지. 변호사가 범죄를 교사하다니, 이건 법조계의 수치 아닙니까?"

정만식은 재민의 묵직한 서류 가방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변호사 자격이 정지된 자는 법률 대리인으로서 고발장을 접수할 권한이 없습니다. 선배가 들고 있는 그 서류, 법적으로는 그저 불법 범죄 수익물에 불과하다는 소리입니다. 당장 내놓으시죠. 태산에서 증거물 반환 청구 소송 걸기 전에 조용히 넘기시는 게 남은 여생에 좋을 겁니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재민이 들고 있던 유일한 창이자 방패, 변호사라는 합법적인 타이틀이 오영석의 정치적 입김 한 번에 종잇장처럼 찢겨나간 것이다. 철저하게 법으로 싸워온 그에게 내려진 완벽한 사형 선고였다.

정만식은 절망에 빠진 재민의 표정을 기대하며 비릿하게 웃었다.

"흐흐흐... 크크큭... 하하하하!"

조용히 침묵하던 재민의 입에서 돌연 낮은 웃음들이 터져 나왔다. 어이가 없다는 듯한 실소가 이내 서늘하고 건조한 비웃음으로 번졌다. 정만식의 비릿한 미소는 사라졌고, 당황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미치기라도 하셨습니까? 자격이 박탈됐다니까요."

재민은 손에 든 징계위 결정문을 반으로 찢었다. 그리고 다시 반으로 찢은 결정문마저 갈기갈기 찢어 허공에 던져버렸다. 하얀 종잇조각들이 검찰청 건물 사이 빌딩풍을 타고 정만식의 굳어진 얼굴 위로 흩날렸다.

"정만식, 너나 오영석이나 참 착각을 크게 하고 있어."

재민이 한 걸음 다가가 정만식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이 알량한 변호사 배지가 내 유일한 무기인 줄 알아? 아니. 그건 내가 선을 넘지 않도록 채워둔 안전장치였어. 인간답게, 법의 테두리 안에서 점잖게 싸워주겠다는 최소한의 예의 말야."

재민의 표정에서 여유로운 엘리트의 오만함이 완전히 씻겨 나갔다. 태산의 펜트하우스에서 법전을 무기 삼아 판을 짜던 변호사는 더 이상 그곳에 없었다. 합법의 테두리가 박살 난 지금, 남은 것은 기꺼이 놈들과 함께 진흙탕을 구르겠다는 날 것 그대로의 독기뿐이었다.

"안전장치를 풀어줘서 고맙다고 전해. 룰이 없어졌으니까, 이제부터는 법정이 아니라 길바닥에서 진짜로 물어뜯어 줄 테니까."

재민은 당황해서 얼어붙은 정만식의 어깨를 거칠게 밀치고 뒤돌아섰다. 법이라는 우아한 룰은 끝났다. 변호사 자격을 박탈당했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그가 지켜야 할 최소한의 선마저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놈들이 짠 진흙탕 판이라면 기꺼이 그 방식대로 놀아줄 차례였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