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입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신청과로 접수된 '증거보전 신청서'는 이례적으로 빠르게 인용되었다. 대기업 거북건설의 현장에서 벌어진 사망 사고라는 사안의 무게감, 그리고 무엇보다 유가족을 대리하고 나선 이름이 과거 태산의 간판 최재민이라는 사실이 법원 내부에도 팽팽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킨 결과였다.
하지만 집행관을 대동하고 다시 찾은 강남 4 구역 재개발 현장은 마치 폭풍이 휩쓸고 간 바다처럼 무거운 정적만이 내려앉아 있었다.
"이게... 뭡니까?" 집행관과 함께 현장 사무소에 들어선 민수가 텅 빈 캐비닛을 보며 황당하다는 듯 중얼거렸다.
어제까지만 해도 서류철로 빽빽했을 현장 소장실의 벽면은 휑하게 비어 있었다. 가장 중요한 증거물이어야 할 1호기 타워크레인의 블랙박스 메모리 카드는 '원인 불명의 화재'로 이미 새까맣게 타버린 채 지퍼백에 담겨 제출되었다.
거북건설의 현장 소장으로 보이는 배불뚝이에 기름진 얼굴을 한 남자가 번질거리는 개기름만큼이나 미끈거리는 비굴한 웃음을 흘리며 집행관에게 허리를 굽혔다.
"아이고, 집행관님. 저희도 참 난감합니다. 하필 어제저녁에 분전반 쪽에 누전이 발생해서 크레인 블랙박스 서버가 타버렸지 뭡니까. 작업 일지 파일도 서버에 있었는데 일부가 날아갔고요. 샅샅이 뒤져보시죠. 뭐 감출 게 있겠습니까. 종이로 뽑아둔 일용직 출력일보랑 안전 교육 일지들은 저기 사과 박스에 날짜별로 싹 모아뒀으니까. 편하게 전부 가져가시면 됩니다."
집행관은 떨떠름한 표정으로 새까맣게 탄 서버 하드디스크와, 날짜별로 정갈하게 편철된 출력일보 박스에 압류 딱지를 붙였다.
재민은 박스 안에 담긴 출력일보를 무심하게 꺼내 들었다. 안전 교육 이수자 명단, 혈압 체크 기록, 그리고 작업자들의 이름과 서명. 모든 것이 자로 잰 듯 완벽했다. 너무 완벽해서 오히려 압수수색에 대비해 급하게 꿰맞춘 조작의 흔적이 노골적으로 드러날 뿐이었다.
"서버 누전이라... 태산의 정만식 변호사가 밤새 머리를 꽤 쥐어짰나 보군요."
재민이 서류를 탁탁 털어 박스에 던져 넣으며 소장을 쳐다보았다. 현장 소장의 눈매가 씰룩였지만 그는 끝까지 능글맞은 미소를 유지했다.
"법률 대리인께서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네요. 산재가 아니라 개인적 비관에 의한 안타까운 자살입니다. 저희도 피해잡니다. 현장 멈춰서 하루에 날아가는 지체보상금이 얼만 줄 아십니까?"
"알겠습니다. 이 완벽한 서류들, 법정에서 아주 유용하게 쓰일 겁니다." 재민은 더 이상 긴말을 섞지 않고 집행관을 향해 목례를 한 뒤 현장 사무소를 빠져나왔다. 뒤따라 나온 민수가 씩씩거리며 재민의 곁에 붙었다.
"형님! 저거 다 가짜 아닙니까? 노가다 판에서 서류가 저렇게 깨끗할 리가 없어요. 게다가 블랙박스가 하필 어제 타버렸다고요? 저 개자식들이 다 증거 인멸한 거잖아요!"
"당연히 가짜지. 그리고 증거 인멸도 맞아." 재민이 낡은 세단의 운전석 문을 열며 건조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법정에서는 심증으로만 싸울 수는 없어. 저들이 제출한 서류가 가짜라는 걸 입증하려면 진짜 서류가 필요해. 놈들은 분명 이중장부를 쓰고 있을 거야. 그걸 찾아야 해."
차에 올라탄 재민은 조수석 콘솔 박스에서 투명한 비닐 지퍼백 하나를 꺼냈다. 어제 찾아왔던 최동호 기사의 아내가 건네준 유품 중 하나였다. 타워크레인 조종석 구석에 떨어져 있었다는 기름때 묻은 낡은 수첩.
재민은 수첩을 들고 페이지를 넘겼다. 대부분은 가족에 대한 그리움이나 크레인 부품 교체 시기 등이 적힌 평범한 메모였다. 하지만 기록이 뚝 끊겨버린 맨 마지막 서너 페이지에는 일상적인 글씨 대신 알 수 없는 숫자와 기호들이 다급하게 휘갈겨져 있었다.
11/12. 본청 100. 실출 45. 유령 55. 11/15. 장부 120. 현장 50. 차액 70... 피가 마른다.
"민수야. 건설 현장에서 '출력일보'라는 거 매일 작업자들 머릿수 세어서 본사에 올리는 서류 맞지?" 재민이 수첩을 내밀며 묻자, 민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거 기준으로 본사에서 인건비가 하청업체로 내려오니까요. 십장들이 아침마다 인원 체크해서 소장한테 넘깁니다."
"최동호 기사는 타워크레인 위에서 아마도 현장 전체를 내려다볼 수 있었을 거야. 그 말은, 매일 현장에 몇 명의 인부가 들어와서 일하는지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라는 뜻이기도 하지."
재민의 손가락이 수첩의 '유령 55'라는 글자를 짚었다. "거북건설 본사에 청구하는 인건비 장부에는 100명이 일했다고 올라가. 하지만 실제로 현장에서 땀 흘린 인부는 45명뿐이야. 나머지 55명은 이름과 주민등록번호만 서류에 존재하는 가짜, 즉 페이퍼 워커(Paper Worker)라는 소리지."
순간 민수의 눈이 커졌다. 현장 생리에 밝은 그에게 이 숫자가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유령 인부... 와-, 이 미친놈들. 하루 일당이 20만 원이라고 치면 55명이면 하루에 1,100만 원입니다. 한 달이면 3억이 넘고, 1년이면 수십 억이에요! 그 돈을 하청업체랑 소장이 빼돌렸다는 거잖아요?"
"현장 소장 선에서 끝날 푼돈이 아니야." 재민이 안경을 고쳐 쓰며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JS 홀딩스가 거북건설을 통해 비자금을 조성하는 전형적인 자금 세탁 방식이야. 유령 인부의 통장으로 들어간 인건비는 다시 현금으로 인출돼서 박창길 회장의 금고로 가거나, M 의원의 정치 자금으로 흘러 들어갔을 거다. 최동호 기사는 크레인 위에서 이 거대한 횡령의 구조를 눈치챘던 거야."
"그래서... 오야지가 그걸 고발하려고 하니까 놈들이 밀어서 죽인 거네요." 민수의 주먹이 대시보드를 쾅 내리쳤다.
"추락 당일, 최 기사는 야간 점검을 핑계로 지브(크레인의 뻗은 팔 부분) 위로 올라갔어. 아마 거기서 현장 소장실이나 하청업체 컨테이너에서 현금이 오가는 걸 목격했거나, 증거를 잡으려 했을 확률이 높아. 놈들은 그걸 눈치채고 그를 밀어버린 뒤, 우울증에 의한 자살로 위장했을 테고."
재민은 수첩을 덮고 시동을 걸었다. 엔진의 낮은 진동이 차체로 전해졌다. "법원에 제출된 저 깨끗한 가짜 서류를 깨부수려면 현장 소장실 어딘가에 숨겨져 있을 진짜 출력일보 원본과 돈이 오간 이면 장부를 찾아내야 해. 영장으로는 절대 못 찾아. 놈들은 이미 압수수색에 대비해 완벽하게 세탁을 끝냈을 테니까."
민수가 마른침을 삼키며 재민을 쳐다보았다. "그럼... 어쩌실 겁니까? 소장실에 몰래 들어가 훔치기라도 할 거예요?"
재민은 말없이 운전대를 돌려 차를 도로 위로 올렸다.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민수의 눈을 똑바로 응시했다. "합법적인 절차로 안 된다면 가장 원초적인 방법으로 들어가야지. 놈들의 시선이 미치지 않는 가장 낮은 곳에서, 콘크리트 먼지 속에 섞여버리면 아무도 의심하지 않는 존재로."
재민의 시선이 민수의 다부진 어깨와 거칠어진 손마디에 머물렀다. "민수야. 네 주특기 한번 살려야겠다. 내일부터 노가다 한 판 뛰어라."
새벽 5시, 구로의 한 인력사무소 앞. 아직 해가 뜨기 전의 차가운 새벽 공기 속에는 싸구려 믹스 커피의 단내와 독한 담배 연기가 뒤섞여 있었다. 패딩과 작업복을 껴입은 사내들이 삼삼오오 모여 불을 쬐며 오늘 자신들이 팔려 갈 현장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리 한쪽에 색이 바랜 작업복을 입고 안전화를 신은 민수가 어색하게 서 있었다.
"어이, 거기 덩치 큰 아저씨-. 당신은 거북건설 4 구역 현장으로 가. 오늘 공구리 쳐야 한다고 하니까, 힘쓰는 사람이 많이 필요해." 인력사무소 소장이 민수에게 출역 지시서를 내밀었다. 민수는 모자를 푹 눌러쓴 채 꾸벅 인사를 하고 봉고차에 올랐다.
봉고차 안에서 민수는 지급받은 헬멧을 쓰며 굵은 뿔테 보안경을 고쳐 썼다. 어젯밤, 마도식의 창고에서 밤을 새워 렌즈 테두리를 깎아내고 개조한 물건이었다. 겉보기에는 흠집이 난 흔한 안전 안경이었지만, 두꺼운 안경다리 힌지 쪽에는 고화질 초소형 카메라가 이식되어 있었다. 민수의 고개가 돌아가는 곳마다 현장의 낱낱이 재민의 노트북으로 실시간 전송되고 있었다. 이어폰 역할을 하는 초소형 블루투스 수신기가 민수의 귓바퀴 안쪽에 테이프로 고정되어 있었다.
지지직-. "마이크 테스트. 내 목소리 들리냐, 민수야?" 귓속에서 재민의 목소리가 울렸다. 민수는 들키지 않게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현장 진입하면 작업 전 안전 회의 할 거다. 절대 튀지 마. 어리바리한 초보자처럼 행동해. 네 목표는 현장 소장실이 있는 임시 컨테이너 쪽 구조를 파악하고, 소장이 자리를 비우는 패턴을 확인하는 거다. 무리하지 말고 관찰만 해. 알았지?"
오전 6시 30분. 강남 4 구역 거북건설 현장 공터에 수백 명의 인부들이 체조를 하기 위해 모였다. 단상 위에 선 안전관리자가 확성기를 들고 형식적인 안전 구호를 외치고 있었다.
"오늘 타설 작업 있습니다! 펌프카 들어올 때 신호수 똑바로 세우고, 엘리베이터 피트 쪽 오픈 구간 추락 조심하십시오! 자, 오늘도 무재해! 가자, 가자, 가자!"
영혼 없는 구호가 끝나자 인부들이 각자의 구역으로 흩어졌다. 민수는 잡부로 배정되어 현장 1층의 자재 적치장으로 향했다.
현장 안쪽에서는 갓 들이부은 시멘트가 토해내는 매캐하고 서늘한 냄새가 진동했다. 날카롭게 철근을 자르는 그라인더의 소음, 쉴 새 없이 오가는 덤프트럭의 매연. 수년 전 자신이 도망쳤던 그 척박한 콘크리트 정글로 다시 돌아왔다는 사실에 민수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어이, 신입! 거기 멍 때리지 말고 이 시멘트 포대 좀 저쪽으로 옮겨!" 반장 완장을 찬 십장이 민수를 향해 소리쳤다. 민수는 습관적으로 시멘트 포대 두 개(80kg)를 양팔에 가볍게 끼워 올리려다, 아차 싶어 동작을 멈췄다. 너무 익숙하고 힘이 센 모습을 보이면 오히려 눈에 띌 수 있었다.
'민수야, 힘자랑하러 간 거 아니다. 어설프게 행동해.' 재민의 경고가 귓가에 울렸다.
"아, 아이고. 이거 생각보다 무겁네요. 끙." 민수는 과장된 신음을 내며 시멘트 한 포대를 어정쩡하게 들어 올렸다. 못마땅한 표정으로 십장이 혀를 찼다. "어휴, 덩치 값도 못하는 놈. 요즘 젊은 놈들은 근성이 없어, 근성이. 넌 그냥 저기 소장실 앞쪽 폐자재나 치워라."
완벽한 구실이었다. 민수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십장이 지시한 임시 컨테이너 쪽으로 이동했다.
현장 소장실은 2층짜리 컨테이너 블록 구조였다. 1층은 일반 직원들이 업무를 보는 곳이고, 2층 끝방이 현장 소장의 개인 집무실이었다. 민수는 1층 계단 밑에서 빗자루질을 하는 척하며 2층의 동태를 살폈다.
'오전 11시 40분. 점심시간이다. 현장 소장과 직원들이 함바집으로 이동할 거야. 놈들은 서류를 파쇄하거나 숨기는 작업을 주로 오전에 해. 지금이 기회다.'
소장과 직원들이 우르르 컨테이너를 빠져나와 식당 쪽으로 향하는 것을 확인한 민수는 빗자루를 던져두고 주위를 살피며 2층 계단을 올랐다.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듯 거칠게 뛰었다. 작업복은 이미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소장실 문 앞. 다행히 전자식 도어록이 아니라 평범한 손잡이였다. 민수가 조심스럽게 손잡이를 돌렸다. 찰칵. 문이 열렸다.
"형님. 들어왔습니다." 민수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좋아. 고개 살짝 숙여서 보안경 카메라 각도 책상 쪽으로 맞춰. 이중장부는 분명 금고나 서랍 깊숙한 곳에 있을 거다."
민수는 흘러내린 뿔테 보안경을 슬쩍 밀어 올리며 책상 서랍을 하나씩 열기 시작했다. 첫 번째, 두 번째 서랍은 평범한 서류와 명함뿐이었다. 세 번째 서랍은 잠겨 있었다.
"서랍 하나가 잠겨있습니다. 열쇠 구멍은 없고, 숫자 다이얼 3자리입니다."
"소장 놈의 개인 번호... 놈들은 보통 자신들이 기억하기 쉬운 숫자를 쓴다. 거북건설 현장 착공일이 작년 3월 15일이었어. 315로 맞춰봐."
민수가 다이얼을 3-1-5로 돌리고 손잡이를 당겼다. 서랍은 덜컹거리는 요란한 소음뿐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 열립니다."
"젠장... 그럼 현장 호수. 4 구역 1단지. 401." 딸칵. 서랍이 부드럽게 열렸다.
"와우-, 열렸습니다! 형님, 역시 형님은 천잽니다. 천재!"
"수다 떨 시간 없어. 안에 뭐 있는지 빨리 스캔해 봐."
서랍 안에는 예상대로 붉은색 가죽 커버로 된 두꺼운 장부 하나와 검은색 USB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장부의 표지에는 '4 구역 출력일보'라고 적혀 있었다. 민수는 장부를 펼쳤다. 카메라가 장부의 내용을 실시간으로 스캔했다.
"맞아. 이거야. 법원에 제출된 서류엔 이름이 있었지만, 여기엔 없어. 이게 진짜 유령 인부들의 명단과 그들의 통장으로 들어간 인건비가 다시 어느 차명 계좌로 인출되었는지 적힌 원장이야." 재민의 목소리에도 미세하게 흥분한 감정이 섞여 들렸다.
"이 USB도 챙길까요?"
"응. USB는 주머니 속에 숨겨서 가지고 나오고, 장부는 챙기기엔 너무 커. 필요한 페이지만 카메라로 찍고 다시 넣어놔. 서둘러. 시간 없어."
재민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민수는 장부의 주요 페이지를 빠르게 넘기며 시선을 고정해 카메라로 촬영했다. 한 장, 두 장. 거대 카르텔을 붕괴시킬 치명적인 독약이 렌즈를 통해 디지털 데이터로 변환되고 있었다.
그때였다. 임시 컨테이너 밖에서 자갈을 밟는 거친 발소리와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아, 소장님. 식사 안 하십니까?"
"어, 점심 생각이 별로 없네. 안 그래도 본사에 서류 하나 급하게 팩스로 넣을 게 있어서. 먼저 식사해."
머릿속이 하얘지고, 귓가에는 오직 뚜벅뚜벅 계단을 오르는 불길한 발소리만이 기형적으로 크게 울려 퍼졌다. 현장 소장이 돌아온 것이다. 퇴로는 없었다. 비좁은 소장실에서 몸을 숨길만한 곳은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거나 캐비닛 안에 웅크리는 것뿐이었다.
"민수야, 발소리 같은 게 들리는 것 같은데. 누군가 사무실로 들어오려는 것 같아. 지금 당장 숨어!"
민수의 마이크를 타고 넘어온 불길한 소음에, 재민의 낮고 날카로운 지시가 이어폰을 넘어 긴박하게 들려왔다. 민수는 잽싸게 장부를 서랍에 쑤셔 넣고 다이얼을 아무렇게나 흩트린 뒤, 책상 아래의 좁은 공간으로 몸을 말듯이 구겨 넣었다. 깊게 숨을 들이마시고선 양손으로 코와 입을 꽉 틀어막았다. 바닥에 깔린 퀴퀴한 먼지 냄새가 코끝을 찔러왔지만, 미세한 숨소리조차 허락되지 않는 위급한 상황이었다.
끼익- 소장실 문이 열렸다. 무거운 안전화가 바닥을 쿵쿵 울리며 책상 쪽으로 다가왔다. 책상 아래에 웅크린 민수의 눈앞으로 흙이 묻은 낡은 안전화 두 짝이 멈춰 섰다. 웅크린 민수와는 불과 30센티미터 거리였다. 소장이 의자를 당겨 앉는 순간, 무릎이 민수의 어깨를 스쳤다. 민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 박동 소리가 너무 커서 소장에게 들릴 것만 같았다. 소장이 서랍의 다이얼을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 내가 다이얼을 안 잠그고 갔었나?" 소장의 중얼거림에 민수의 등에는 어느새 식은땀이 몸 밖으로 배어 흘러내렸다. 급하게 닫느라 다이얼이 끝까지 돌아가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장은 서랍을 열어 무언가를 확인하는 듯하더니, 이내 팩스 기계의 버튼을 누르는 소리가 이어졌다. 띠리리링- 팩스가 넘어가는 소음이 적막을 채웠다.
'제발... 제발 빨리 나가라...' 민수는 속으로 수도 없이 기도했다. 다리에 쥐가 날 것 같았지만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어이, 김 반장. 식사 다 했어? 1호기 크레인 쪽으로 와. 오후 타설 준비해야지." 소장이 무전기에 대고 말한 뒤,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전화가 문 쪽으로 멀어지고, 철제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민수는 그 자리에서 1분을 더 버틴 뒤에야 조심스럽게 책상 밑에서 기어 나왔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작업복 여기저기가 얼룩져 있었다.
"하아... 하아... 형님... 저 진짜 지릴 뻔했습니다."
"수고했다. 빨리 빠져나와. 더 지체하면 의심받아."
민수는 문을 살짝 열고 복도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뒤, 고양이가 걷듯 발소리를 죽여 계단을 내려갔다. 1층 사무실을 지나 밖으로 통하는 문을 향해 걸음을 재촉했다. 소리 내지 않고 나오려고 조용히 걷다 보니 밖까지 나가는데 시간이 너무 걸리는 것 같았다. 이제 한 걸음이면 출입문이었다. 손을 뻗어 문손잡이를 잡고 돌리려는 찰나였다.
"어이."
뒤통수에 꽂히는 목소리에 민수의 손이 문고리 위에서 굳어버렸다. 뒤를 천천히 돌아보자, 1층 사무실 파티션 뒤에서 덩치 큰 사내 하나가 어슬렁거리며 걸어 나왔다. 현장 정문을 막고 섰던 그 안전관리자 완장을 찬 용역 팀장이었다. 그의 눈은 민수를 뱀처럼 끈적하고 날카롭게 훑고 있었다.
"너 아까... 철근반 신입 아니야? 니가 밥도 안 처먹고 여긴 왜 들어와 있어?"
민수는 마른침을 삼키며 최대한 어리바리한 표정을 지었다. "아... 저기, 십장님이... 빗자루 가져오라고 하셔 가지고요. 화장실 쪽에 있나 해서..."
"빗자루?" 용역 팀장이 코웃음을 쳤다. 그는 민수의 빈손과 흙먼지가 전혀 묻지 않은 무릎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너 아침 체조할 때부터 덩치에 안 맞게 어물쩍거리는 게 눈에 거슬렸는데. 빗자루를 2층 계단에서 찾냐? 내가 아까 네놈 새끼 2층으로 기어 올라가는 거 다 봤어."
용역 팀장이 허리춤에서 삼단봉을 스르륵 빼들었다. 철컥. 쇠막대가 늘어나는 소리가 좁은 복도를 서늘하게 울렸다.
"면상 좀 제대로 볼까. 푹 눌러쓴 하이바랑 그 안경 벗어. 그리고 주머니에 있는 거 싹 다 뒤집어 까."
민수의 시선이 문 쪽과 용역 팀장 사이를 빠르게 오갔다. 주머니에는 비자금 내역이 담긴 USB가 들어 있었다.
'이걸 뺏기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간다. 최동호 기사의 억울한 죽음도 영원히 콘크리트 바닥 아래 묻히게 된다.'
"민수야. 대답하지 마. 무조건 뚫고 나가. 놈이 무전기 들면 끝이다." 재민의 걱정 가득한 목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순간, 민수의 얼굴에서 어리숙한 표정이 씻은 듯이 지워졌다. 뒷골목을 구르며 벼려진 독기가 눈동자에 서리자마자 거친 욕설이 좁은 복도를 작지만 강하게 울렸다.
"꺼내긴 뭘 꺼내, 이 새끼야!"
민수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좁은 보폭을 좁히며 용역 팀장의 품으로 파고들었다. 길바닥을 구르며 단련된 거친 주먹이 상대의 턱뼈를 향해 자비 없이 꽂혔다. 둔탁한 타격음과 함께 두 사람의 몸이 컨테이너 철제 벽 위로 거칠게 엉켜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