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워크레인의 유령(1)

악연

by 추억바라기

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크고 작은 금속들을 절단하고, 깎아내는 철공소들이 밀집한 좁은 이면도로. 거친 쇳가루가 날리는 선반 기계의 마찰음이 쉴 새 없이 골목의 적막을 깨웠고, 바닥에 들러붙은 검은 기름때와 매캐한 절삭유 냄새는 한낮에도 빛이 들지 않는 골목 구석구석을 눅눅하게 집어삼키고 있었다.

칠이 벗겨진 낡은 2층 상가 건물 내부. 방음조차 제대로 되지 않는 얇은 유리문 너머로 최재민 법률사무소라는 조악한 시트지가 위태롭게 붙어 있었다. 불과 일주일 전, 강남 한복판에서 대한민국 굴지의 투자회사 JS 홀딩스 상무를 구속시키고, 최고 로펌 태산의 오영석 대표에게 완벽한 굴욕을 선사했던 '거리의 변호사' 베이스캠프 치고는 초라한 몰골이었다.

"아씨, 진짜! 이 고철 덩어리가 또 동전을 먹었네!"

사무실 한쪽 구석에서는 제조 연도를 알 수 없는 낡은 미니 자판기 앞에서 장민수가 신경질적으로 버튼을 두드리고 있었다.

"형님! 율무차 버튼을 눌렀는데 왜 누런 맹물만 뱉어내는 겁니까! 아예 가루를 안 줄 거면 동전이라도 뱉어내든가!"

재민은 삐걱거리는 회전의자에 몸을 깊숙이 파묻은 채 서류철에서 눈을 떼지 않고 담담하게 대꾸했다.

"민수야. 기계를 때린다고 맹물이 율무차로 변하진 않아. 그리고 그 자판기, 저번 주에 네가 발로 차서 동전 반환기 부품 깨졌잖아. 뜨거운 물이라도 나오는 걸 다행으로 여겨."

"아니, 형님! 솔직히 좀 억울하지 않습니까? 우리가 며칠 전에 그 어마어마한 펜트하우스 놈들을 아주 작살을 냈잖아요! 박수현은 쇠고랑 차고, 강동철이도 구속 수감됐고! 명색이 거대 카르텔을 무너뜨린 영웅들인데, 우리 손에 남은 전리품은 눈을 씻고 봐도 없고. 폼나는 커피머신은 고사하고, 아직까지 이 고장 난 자판기랑 아웅다웅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 태산 놈들한테 합의금 명목으로 수임료라도 좀 두둑하게 뜯어내시지!"

"내가 말했잖아. 소연 씨 아버님 빚 전액 탕감하고, 소연 씨 새 출발 할 위자료 최대로 챙겨주는 게 내 조건이었다고. 내 몫까지 챙기려 들었으면 태산도 그렇게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을 거야. 약점 잡고 협박하는 건 그놈들 전공이니까."

재민이 피곤한 듯 안경을 벗어 미간을 주무르며 서류 더미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그리고 영웅은 무슨. 당장 내일모레 월세 내야 할 판인데. 영등포 김 씨 할아버지 사건, 관할 노동청에 넣을 임금체불 진정 서류 다 정리했어? 일단 조사받고, 체불 확인서부터 받아내야 공단에 대지급금을 청구하든 할 테니까 빠짐없이 챙겨. 그리고 악덕 공장장 놈이 밀린 월급 내놓으라니까 오히려 도둑놈 취급했다며. 임금 체불 건이랑 별개로 명예훼손 내용증명 하나 더 띄워야 하니까 사실관계 마저 챙겨 놔."

민수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참 나... 스케일 차이 보소. 어제는 수천억 굴리는 재벌 3세, 오늘은 밀린 월급 300만 원 떼먹는 악덕 공장장. 형님은 롤러코스터 타는 게 취미십니까? 사무장 타이틀 달아놓고 매일 하는 게 영수증 풀칠이네요."

투덜거리면서도 민수는 김 씨 할아버지의 서류를 파일철에 꽂기 시작했다. 빚쟁이들에게 쫓겨 신도림역 선로 위로 몸을 던지려 했던 과거의 나약한 도망자의 모습은 이제 그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넓어진 어깨는 든든했고, 눈빛에는 삶에 대한 생기가 돌았다.

그때였다. 끼기긱- 경첩에 녹이 슨 낡은 철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저기... 여기가... 최재민 변호사님 사무실이 맞나요?"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 목소리는 가늘고 메말라 있었다. 검은색 상복을 입은 중년 여성이었다. 며칠을 장례식장에서 꼬박 새운 듯, 머리카락은 푸석하게 엉켜 있었고 외투에서는 향 냄새와 병원 소독약 냄새가 희미하게 배어 나왔다. 깊게 파인 눈두덩이와 초점 없는 시선은 그녀가 짊어진 피로와 슬픔의 무게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아, 네! 맞습니다. 들어오십쇼, 어머님!" 민수가 반사적으로 튀어 나가며 깍듯이 인사했다. 재민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재킷을 걸치며 여성을 맞이했다.

민수의 안내로 사무실 중앙까지 조심스럽게 걸어 들어온 여성은 낡은 소파 끝에 위태롭게 걸터앉았다. 민수가 맹물 섞인 율무차를 종이컵에 담아 건넸지만, 그녀는 컵을 쥘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그녀는 절대 두 손을 놓지 않겠다는 듯 품에 안은 누런 서류 봉투를 꽉 움켜쥐고 있었다.

"어떤 일로 오셨습니까?" 재민이 서두르지 않고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희 남편이... 죽었습니다." 여성의 메마른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는 참아왔던 숨을 토해내듯 띄엄띄엄 말을 이었다. "타워크레인 기사였어요. 삼십 년을... 그 좁은 조종석에서 도시락 까먹어가며 기계를 움직였던 사람입니다. 그런데 사흘 전, 현장에서 추락했어요. 60미터 허공에 떠 있는 크레인 지브(Jib)에서... 맨바닥으로요."

"산재 처리는 어떻게 진행되고 있습니까? 경찰의 현장 감식 결과나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의 재해 조사 소견은 들으셨고요?" 변호사로서의 본능적인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나 여성은 고개를 저었다.

"산재가... 아니랍니다. 경찰도, 회사 측도."

여성이 고개를 들었다. 깊은 슬픔 너머로 지독한 억울함과 분노가 서려 있는 눈빛이었다. 2년 전 법정에서 패소한 뒤 선로 위로 몸을 던졌던 그 남자의 눈빛과 너무도 닮아 있었다. 재민은 심장이 미세하게 조여옴을 느꼈다.

"우울증으로 인한 단순 투신... 그렇게 자살이라고 결론을 내렸어요. 현장에 유서 한 장 없었는데. 회사 놈들이 남편이 평소에 빚이 많아서 비관해 왔다고 진술을 했대요. 경찰은 누가 죽인 흔적이 없다면서, 제대로 조사도 안 해보고 그냥 수사를 덮어버렸어요. 우리 그이... 다음 달에 하나뿐인 딸내미 시집보낸다고, 매일 밤 크레인 위에서 딸내미 웨딩드레스 사진 보며 웃던 사람이에요. 빚? 대출받아서 전셋집 마련해 준 게 전부입니다. 절대... 절대 스스로 목숨을 끊을 사람이 아닙니다!"

여성이 떨리는 손으로 서류 봉투에서 사진 한 장과 꼬깃꼬깃해진 사체검안서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 회사 안전반장이라는 놈이 찾아와서는 합의서에 도장 찍으면 회사가 도의적 차원에서 위로금 5천만 원을 주겠다고 하더군요. 우리 남편 목숨값이, 스스로 뛰어내렸다는 그 오명을 뒤집어쓰는 대가가 고작 5천만 원이랍니다."

"남편 분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그리고 사고가 난 현장이 어디죠?" 재민이 사체검안서를 집어 들며 눈을 가늘게 떴다.

"이름은 최동호입니다. 그리고 사고가 난 곳은... 거북건설의 강남 4 구역 재개발 현장입니다."

'거북건설.'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재민의 머릿속에 흩어져 있던 의혹의 조각들이 조금씩 맞물려 들어갔다. 그곳은 김소연이 넘겨주었던 VIP 리스트의 마지막 암호이자, JS 홀딩스의 거대한 비자금을 책임지는 실질적인 배후였다.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되는 M 의원과 끈끈하게 결탁해 있는 그 건설사야말로 태산의 오영석이 제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진짜 몸통의 이름이었다.

"잠깐...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최동호라고 하셨어요?" 옆에서 서류를 정리하던 민수의 손이 굳었다. 들고 있던 파일이 바닥으로 툭 떨어졌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테이블 위로 몸을 들이밀었다.

민수는 재민의 손에 들린 사진을 거의 빼앗다시피 낚아챘다. 흙먼지 묻은 작업복을 입고 거대한 타워크레인 아래서 환하게 웃고 있는 중년 남성. 땀에 절어 이마에 깊게 파인 주름과 사람 좋은 미소가 인상적인 모습이었다.

"오야지..." 민수의 입술 사이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야지 맞잖아... 동호 아저씨..."

"민수야, 아는 분이야?" 재민이 묻자, 민수는 사진을 쥔 채 어깨를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그의 턱관절이 도드라질 정도로 꽉 맞물려 있었다.

"제가 스무 살에 빚쟁이들 피해서 처음 노가다판 굴러들어 갔을 때... 시멘트 포대 하나 제대로 못 매서 쩔쩔맬 때, 저 거둬서 밥 먹이고 현장 생리 가르쳐준 아저씨입니다. 사채업자 놈들이 현장까지 쳐들어와서 도망칠 때도 자기 주머니 털어서 도피 자금 쥐여주면서 죽지 말고 무조건 살아서 다시 보자고 했던 분이라고요."

민수의 굵은 목에 핏대가 섰다. 슬픔을 넘어선, 이성을 잃기 직전의 격렬한 분노가 그의 전신을 지배하고 있었다. "그런 동호 아저씨가 자살을 해요? 안전제일을 가장 큰 신념으로 일하며 20년 동안 현장에서 사소한 사고 한 번 안 났던 양반이, 안전대(하네스)도 안 걸고 허공에서 뛰어내렸다고? 개소리하지 말라고 해요!"

민수가 씩씩거리며 사무실 구석에 세워둔 야구방망이를 집어 들었다. "형님. 저 당장 거북건설 현장으로 가야겠습니다. 가서 그 소장 놈 멱살을 잡고 경찰서에 끌고 가든, 현장 사무실을 때려 부수든 해야겠습니다."

"진정해, 장민수." 재민이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민수를 막아섰다. "거북건설이야. JS 홀딩스의 자금줄. 그리고 놈들의 법률 대리인은 태산이 맡고 있어. 현장 소장 하나 팬다고, 윽박지른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네가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주먹을 쥐는 순간, 놈들은 완벽한 피해자 행세를 하며 합법적인 테두리 안에서 널 완전히 짓밟아버릴 거다."

재민은 씩씩거리는 민수를 지나쳐 넋을 잃고 앉아 있는 최동호의 아내를 향해 깍듯이 고개를 숙였다.

"사모님. 사건 수임하겠습니다. 이건 단순 산재 은폐 사건이 아닙니다. 이 추락사 뒤에는 놈들이 필사적으로 감추고 싶어 하는 거대한 횡령과 부패의 흔적이 있을 겁니다."

재민은 의자에 걸려 있던 코트를 집어 입고 민수를 돌아보았다. "야구방망이는 내려놓고 운전석에 타라. 현장으로 간다. 놈들이 어떤 썩은 논리로 사망 현장을 덮어놨는지 내 눈으로 직접 봐야겠어."


강남 4 구역 재개발 거북건설의 공사 현장. 도심 한복판 수만 평 규모로 깊게 파헤쳐진 삭막한 흙바닥 위로 수십 대의 T형 타워크레인이 거대한 철골을 드러낸 채 위압적으로 솟아 있었다. 쉴 새 없이 돌아가는 레미콘 트럭과 항타기가 땅을 뚫는 굉음이 고막을 찢을 듯 울려 퍼졌다.

현장 메인 게이트 앞. 입구를 막아선 사내들은 하나같이 '안전관리'라는 완장을 차고 있었다. 하지만 안전모 아래로 번뜩이는 눈빛과 험악한 덩치는 현장의 인부라기보다 차라리 잘 훈련된 사병이나 용역 깡패에 가까웠다. 재민의 낡은 세단이 덜컹거리며 정문 바리케이드 앞에 멈춰 섰다. 민수가 차 문을 박차고 내리며 용역들을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비켜. 최동호 기사 유가족 법률 대리인 자격으로 현장 조사하러 왔다." 민수가 억눌린 분노를 삼키며 말했다. 그러나 용역들은 코웃음을 치며 두꺼운 팔뚝으로 출입구를 막아섰다.

"어이, 형씨. 여긴 외부인 출입 금지구역이야. 산업안전보건법상 사전 승인받지 않은 인원은 현장 내 진입 불가라는 거 몰라. 산재? 경찰에서 타살 혐의점 없음으로 종결 난 지가 언젠데 이제 와서 뒷북이야? 당장 차 빼."

교묘하게 법의 테두리를 방패 삼아 진입을 막는 놈들의 수법이야 뻔해 보였다. 민수가 참지 못하고 용역의 멱살을 잡으려 달려드는 순간, 현장 안쪽에서 은색 벤츠 S클래스 한 대가 흙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와 정문 앞에 섰다.

운전석 문이 열리고, 한 치의 구김도 없는 네이비색 맞춤 정장에 무테안경을 쓴 남자가 내렸다. 법무법인 태산의 파트너 변호사, 정만식이었다. 과거 재민이 태산에 있을 때, 오영석 대표의 충견 노릇을 하며 재민을 깎아내리기 바빴던 전형적인 속물 법률 전문가였다.

"어허-, 현장이 참 시끄럽네요. 조용히 일 처리하라고 했더니." 정 변호사가 가식적인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는 낡은 세단 앞에 서 있는 재민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비릿하게 웃었다.

"이게 누군가 했더니, 최재민 선배 아니십니까. 뉴스 아주 잘 봤습니다. 박수현 상무 건으로 아주 언론의 영웅이 나셨던데. 근데 이런 먼지 날리는 노가다 판에는 어쩐 일이십니까? 여기엔 선배가 좋아하는 마약 스캔들도, 재벌가 치정도 없는데 말입니다."

재민은 차분하게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정 변호사를 마주 보았다. "거북건설 타워크레인 사망 사고. 유가족 대리인 자격으로 왔다. 경찰 조사가 너무 성급하고 편파적으로 끝났더군. 부검 기록도, 현장 감식 결과도 앞뒤가 안 맞아. 태산이 덮은 거겠지?"

정 변호사가 과장되게 혀를 쯧쯧 찼다. "선배. 너무 억지 부리지 마십시오. 평소 우울증과 빚에 시달리던 일용직 노동자의 안타까운 자살일 뿐입니다. 회사 측에서는 근로기준법상 의무가 없는데도 도의적 차원에서 장례비와 위로금까지 지급하려 했습니다. 유가족이 돈을 더 뜯어내려고 억지를 부리는 거잖습니까. 계란으로 바위 좀 쳐봤다고 세상 모든 바위가 깨질 줄 아십니까? 이건 산재 보상 문제입니다. 근로복지공단에 가서 따지시죠. 남의 사유재산 앞에서 행패 부리지 마시고."

"자살?" 재민이 정 변호사를 향해 한 걸음 다가갔다. 그의 차갑게 가라앉은 음성은 작은 분노조차 담고 있지 않아, 듣는 이의 귓가를 더욱 날카롭게 파고들었다.

"수십 년을 크레인 탔던 베테랑 기사가 하네스(안전대)도 이중으로 체결하지 않고 밤 10시에 크레인 지브를 점검하러 올라갔다? 그것도 CCTV가 하필 기계적 결함으로 먹통이 된 바로 그 시간에? 태산의 꼬리 자르기 시나리오치고는 현장 고증이 너무 떨어지잖아."

재민은 펜스 너머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서 있는 1호기 타워크레인을 올려다보았다.

"기초가 썩어 문드러진 마천루라면, 무너뜨려야지. 너희가 이 콘크리트 정글 속에 숨기고 있는 그 유령들, 내가 하나하나 끄집어내서 빛을 보게 해 줄 테니까."

재민은 품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정 변호사의 가슴팍에 툭 밀어붙였다.

"소장한테 전해. 오늘 아침 9시부로 법원에 민사상 손해배상을 위한 '증거보전 신청서' 접수했다고. 잘 알겠지만 사망 사고 현장이라 긴급성이 인정돼서 아마 오늘 오후면 판사 인용 결정 떨어질 거다. 내일 오전 중에 법원 집행관들 들이닥칠 테니까, 그전에 크레인 해체하거나 핏자국 물청소하면... 현장 소장, 증거 인멸에 산업안전보건법 위반까지 얹어서 즉각 형사 고발 들어갈 거라고."

정 변호사의 얼굴에서 여유로운 미소가 순식간에 증발했다. 법 기술자에게는 구구절절한 감정 호소보다 이런 정확하고 뾰족한 법적 절차의 기습이 가장 효과적이고, 뼈아픈 법이었다.

"선배. 이쯤 하시죠. 거북건설은 JS 홀딩스랑 결이 다릅니다. 여긴 서류 쪼가리 오가는 펜트하우스가 아니라, 사람 하나쯤 묻혀도 모를 현장이라고요. 선배 혼자 감당할 사이즈가 아닙니다."

"걱정 마. 사이즈 재가며 싸울 생각 없으니까." 재민이 등 돌린 채 건조하게 대꾸했다. "어차피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싹 다 허물어버릴 참이거든."

재민은 더 대꾸하지 않고 차에 올랐다. 타이어가 거친 파쇄석을 짓이기며 현장을 빠져나갔다. 뒤에 남겨진 정 변호사는 흙먼지를 노려보며 신경질적으로 안경을 추어올렸고, 이내 굳은 얼굴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도심을 짓누르는 거대한 타워크레인의 검은 그림자가 서서히 짙어지는 어둠 속으로 눅눅하게 스며들고 있었다. 합법의 족쇄를 풀어 던진, 진짜 진흙탕 싸움의 막이 오르고 있었다.

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