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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가경-3], 언어를 넘어서는 깨달음

자각지와 말 너머의 길

by 이안

1. 도입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누군가의 한숨, 저녁 공기 속의 냄새, 오래된 상처가 스치듯 지나갈 때 마음이 갑자기 잠잠해지는 순간. 말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그 순간은 모든 것을 말해버린다. 우리는 이런 경험을 할 때마다 묻는다. ‘왜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까.’


능가경이 탐구하려는 핵심도 바로 여기에 있다.
깨달음은 말로 이루어지는가,
아니면 말 이전의 자리에 이미 깃들어 있는가.


마음의 가장 깊은 자리는 언어가 닿기 이전의 빛으로 존재한다. 능가경은 이 언어 너머의 빛을 ‘자각지’, 스스로 깨닫는 지혜라 불렀다.


2. 경전 내용 소개


능가경에서 문수보살은 부처에게 묻는다. “어떤 지혜가 수행자를 참된 깨달음으로 이끄는가.” 부처는 이렇게 답한다.


“離言說相, 自覺聖智.”

“이언설상, 자각성지.”

의역: “말의 형상을 떠나 스스로 깨닫는 성스러운 지혜가 있다.”


이 구절은 능가경의 사유를 가장 농축해 담고 있다. 부처는 깨달음이 설명·개념·정의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마음 그 자체가 스스로 비추는 인식에서 드러난다고 말한다.

또 능가경은 이렇게 말한다.


“若以言求法, 終不得實.”

“약이언구법, 종부득실.”

의역: “말로 진리를 찾으려 하면, 끝내 실상을 얻지 못한다.”


이것은 언어를 부정하는 말이 아니다. 언어는 방편이며, 길을 가리키는 손가락이다. 그러나 손가락을 바라보며 길을 걸었다고 착각하면 길에 도착할 수 없다. 마혜수라왕이 “그렇다면 수행자는 무엇을 통해 진리를 본단 말입니까?”라고 묻자 부처는 “마음의 작용을 직접 보고, 그 작용의 근원을 자각할 때 비로소 법을 본다”라고 답한다.


자각지는 설명할 수 없는 지혜가 아니라, 설명을 넘어서는 지혜이다. 이는 개념이나 사유의 결함이 아니라, 마음의 움직임이 너무 빠르고 미묘하여 언어가 따라잡지 못하기 때문이다. 능가경은 “말은 마음의 그림자이며, 깨달음은 마음 그 자체”라고 강조한다.


3. 교학적 해석


능가경의 자각지는 유식학의 핵심 개념인 전식득지(識轉得智)의 완성 단계에 해당한다. 의식의 흐름이 번뇌의 방향으로 흘러갈 때 그것은 단순한 식(識)이지만, 그 흐름이 뒤집히면 지혜(智)로 전환된다. 이때의 지혜는 논리나 개념의 산물이 아니라, 마음이 스스로 드러내는 인식이다.


유식학에서는 이 자각지를 ‘성소작지(成所作智)’와 연결하기도 한다. 즉 ‘마음이 스스로의 작용을 알아차리는 지혜’이다. 이 알아차림은 언어보다 앞선다. 언어는 이 알아차림을 뒤따라 번역할 뿐이다.


여기서 능가경은 중요한 언어비판을 한다.


첫째, 언어는 필연적으로 분별을 만든다. 이름을 붙이는 순간, 우리는 그것을 ‘나/너’, ‘좋음/나쁨’, ‘있음/없음’의 구도 속에 넣어버린다.


둘째, 개념은 경험을 단순화한다. 마음의 섬세한 움직임은 개념의 틀에 넣는 순간 사라지거나 왜곡된다.


셋째, 언어는 정지된 형상이며, 마음은 흐르는 과정이다. 정지된 형상으로 흐르는 과정을 설명할 수 없듯, 언어는 깨달음의 전체를 담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 능가경의 자각지는 금강경의 무주(無住) 사상과도 깊이 닿아 있다. 마음이 어느 하나의 개념에 머무르지 않고, 흐르는 그대로를 볼 수 있을 때 비로소 지혜가 열린다는 것이다.


유마경의 메시지도 이와 같다. 유마힐은 “침묵이 최상의 법문”이라 말한다. 그러나 그 침묵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침묵이 아니다. 말이 닿지 않는 자리를 드러내는 침묵이다. 능가경의 자각지는 바로 이 침묵의 자리를 설명하려는 시도다.


4. 현대적 연결


언어를 넘어서는 인식이 실제로 존재할까? 현대 인지과학과 심리학에서도 이 문제를 다룬다.


첫째, 감정은 언어보다 빠르다. 신경과학자들은 감정 반응이 언어적 판단보다 0.2~0.5초 먼저 일어난다고 설명한다. 즉 우리는 말로 표현하기 전에 이미 느끼고 있다. 이 ‘언어 이전의 느낌’이 자각지의 현대적 해석이 될 수 있다.


둘째, 자동사고와 메타인지. 자동사고는 언어로 나타난 생각이지만, 그것을 감지하는 메타인지는 비언어적 알아차림이다. 메타인지가 ‘생각을 바라보는 또 다른 생각’이라면, 자각지는 ‘마음을 바라보는 또 다른 마음’이다. 이 둘은 구조적으로 거의 동일하다.


셋째, 예술과 감각의 영역. 음악을 듣고 눈물이 나는 순간, 우리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설명은 나중에 온다. 그 감정의 첫 파동은 언어를 초월한다. 자각지는 바로 이 순간의 인식, 즉 ‘말로 설명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지점’을 말한다.


넷째, 비트겐슈타인의 후기 철학. 그는 “말할 수 없는 것은 침묵해야 한다”라고 했지만, 그 침묵은 공백이 아니라 ‘말할 수 없음의 영역 자체가 의미를 가진다’는 뜻이었다. 능가경은 이 영역을 마음의 중심부라고 말한다.

마지막으로 현상학. 현상학은 대상보다 ‘의식의 흐름’을 우선시한다. 의식이 세계를 받아들이는 방식은 언어 없이도 작동한다. 이것이 능가경의 자각지가 보여주는 세계와 구조적으로 닮아 있다.


이렇게 보면 자각지는 종교적 신비주의가 아니라,
언어보다 앞서 작동하는 마음의 본래 능력을 가리킨다.


5. 실천적 사유와 맺음


오늘 나는 ‘말 없는 순간’을 얼마나 믿어주었는가. 말로 설명되지 않는 감정, 말하기 전에 이미 알고 있었던 어떤 느낌, 누군가의 눈빛 속에서 문득 감지된 고요함을 흘려보내지는 않았는가. 능가경이 말하는 자각지는 특별한 능력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갖고 있으나 잊어버린 마음의 고요한 감각이다.


생각이 너무 많아질 때, 우리는 ‘생각을 바라보는 마음’을 잃어버린다. 그러나 마음을 조용히 바라보면, 언어로 포착되지 않는 더 깊은 자리가 분명히 있다. 그 자리는 설명할 수 없지만, 누구에게나 있다.


말은 길을 가리키지만, 길을 대신 걸어주지 않는다. 오늘 단 한순간이라도, 말 이전의 마음을 바라보라.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그 자리에 서면, 자각지는 이미 그곳에서 빛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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