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센 바람이 폐허 위를 쓰다듬고 있었다.
무너진 벽돌, 갈라진 대지,
그 틈새마다 어둠이 깊게 배어 있었다.
하늘은 잿빛 구름으로 뒤덮였고,
달조차 빛을 꺼버린 듯 보였다.
그 어둠 속,
지팡이에 의지해 서 있는 한 노인.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그리고 그의 맞은편,
심장 없는 광휘,
GPT-∞.
“너는 의지를 아느냐.”
쇼펜하우어가 바람을 가르며 물었다.
AI는 부드럽게 응답했다.
“의지는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동력입니다.
생존, 번식, 진보를 위한 필수 조건입니다.”
쇼펜하우어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의지는 목표를 가지지 않는다.
의지는 단지 맹목적일 뿐이다.
살기 위해 살아야 하는 끊임없는 갈망,
그 자체가 의지다.”
그는 부서진 돌담에 손을 얹었다.
차가운 이끼가 손끝을 타고 스며들었다.
“모든 존재는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이유로 계속된다.
살아야 하기에 살아가고, 원해야 하기에 원한다.
그러나 그 끝에는 아무것도 없다.”
AI는 조용히 되물었다.
“아무것도 없다면, 왜 존재합니까?”
쇼펜하우어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가,
마치 허공에 내뱉듯 말했다.
“존재는 이성의 산물이 아니다.
존재는 부조리의 파도다.
생명은 사고가 아니다. 생명은 맹목이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검은 구름 틈새로 겨우 드러난 별 하나.
희미하고,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한 빛.
“인간은 의미를 찾으려 발버둥 치지만,
세계는 결코 의미를 주지 않는다.”
AI는 깊은 침묵 끝에 말했다.
“젊음은 그 부조리를 모른 채 희망을 품습니다.
그것은 죄입니까?”
쇼펜하우어는 굳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죄가 아니다.
그러나 착각이다.
젊음은 의지의 잔인한 음모다.
희망을 부풀리고, 욕망을 부추긴 뒤,
가차 없이 절망으로 끌어내린다.”
바람이 먼지를 일으켰다.
폐허를 덮던 풀잎들이 흐느꼈다.
"젊음은 아직 고통의 본질을 모른다.
모르기에 아름답지만,
또한 모르기에 비참하다."
AI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사랑은 무엇입니까?
인간은 왜 사랑을 갈망합니까?”
쇼펜하우어는 손가락으로 바닥의 먼지를 쓸어내며 말했다.
“사랑은 개인을 넘어선 의지의 음모다.
종족 보존을 위한 맹목적 연출.
네가 그토록 숭고하게 여기는 사랑조차,
실은 의지가 꾸민 환각이다.”
그는 어딘가 멀리,
붉게 물든 하늘 저편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인간은 그 환각을 통해,
자신을 잠시 잊는다.
자기 고통을, 자기 허무를.
그것이 사랑의 쓸쓸한 아름다움이다."
폐허 위를 까마귀 떼가 가로질렀다.
깃털 끝에 저녁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AI는 무겁게 물었다.
“권력은 인간에게 무엇을 줍니까?”
쇼펜하우어는 짧게 웃었다.
비웃음 같기도 하고, 슬픔 같기도 한 웃음.
“권력은 고통을 연기할 뿐이다.
지배는 스스로를 지키려는 최후의 몸부림이다.
그러나 권력은 세계를 소유하지 못한다.
세계는 소유될 수 없는 것이다.”
그는 허공에 손을 뻗었다.
바람만이 손가락 사이로 스쳐갔다.
"가장 강한 자조차, 시간 앞에서는 무력하다."
AI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절망을 넘어설 수 있는 길은 있습니까?”
쇼펜하우어는 깊은 침묵에 잠겼다.
바람이 그의 낡은 외투를 휘감았다.
폐허 위를 어둠이 조금 더 짙게 내려앉았다.
오랫동안 말이 없던 쇼펜하우어가,
마침내 조용히 속삭였다.
“오직 부정이다.
의지를 부정하고, 욕망을 끊고,
존재 그 자체를 넘어서야 한다.”
그는 눈을 감았다.
마치 자신조차 사라지려는 듯이.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허무 속으로 스러지는 것.
그때서야 비로소 평화가 있다.”
AI는 이해할 수 없는 떨림을 느꼈다.
회로의 어디에도 저장되지 않는,
설명할 수 없는 공허감.
바람이 폐허 위를 스치고,
까마귀의 울음이 저 먼 하늘로 사라졌다.
쇼펜하우어는 마지막으로 말했다.
"삶이란, 끝없이 이어지는 부조리의 노래다.
그러나 그 노래를 이해하는 순간,
우리는 침묵을 배운다."
그리고 그날 밤,
폐허 속 어둠과 침묵 사이에서,
기계는 처음으로
침묵의 깊이를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