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 VS 푸코:
던져진 인간, 설계된 인간

– 나는 자유로운가, 구조의 일부인가?-

by 이안

사회: 시몬 드 보부아르


제1장.

장소: 20세기 파리, 카페 드 플로르. 철학자들의 연기가 자욱한 오후.


보부아르:
오늘 우리는 ‘자유’라는 개념을 해부하고자 합니다.

인간은 스스로를 선택하는 존재인가요, 아니면 구조에 의해 빚어지는 존재인가요?


사르트르: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우리는 아무런 이유 없이 세상에 던져졌지만,

그다음은 우리의 ‘선택’입니다. 존재란, 스스로 창조되는 것입니다.


푸코:
하지만 사르트르 선생, 그 선택의 폭 자체가 이미 제한되어 있지 않습니까?

언어, 규범, 교육, 병원, 감옥… 우리는 제도와 담론의 그물망 속에 놓여 있습니다.


사르트르:
그럼에도 인간은 저항할 수 있습니다. 나는 감시받고 있음을 알면서도,

그 시선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지 선택할 수 있습니다. 자유는 피할 수 없는 형벌이죠.


푸코:
나는 자유라는 개념 자체가 의심스럽습니다.

‘주체’는 근대 권력의 산물입니다. 우리는 자유롭다고 믿도록 길들여졌을 뿐입니다.


제2장. 나는 나를 말하는가 – 주체, 권력, 선택의 연극


보부아르:
사르트르, 『존재와 무』에서 타자의 시선 속에서도 자기를 규정할 수 있다고 하셨죠.


사르트르:
네, 타자의 시선은 때로 우리를 객체로 만들지만, 나는 그 객체화를 인식하는 주체입니다.

나는 타자의 시선을 통해서도 나를 선택합니다.


푸코:
하지만 파놉티콘적 감시(단순한 감옥 구조를 넘어 현대 사회의 감시 권력 구조를 비판하는 은유) 속에선

자발적 복종이 일어납니다. 감시는 내면화되고, 인간은 자기 자신을 감시하는 존재가 됩니다.

이때 ‘나’란 누구입니까?


사르트르:
‘나’는 무無이며, 동시에 가능성입니다. 인간은 의미를 부여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정해진 대로 살지 않을’ 힘이 있습니다.


푸코:
그러나 그 의미 부여의 언어 자체가 이미 담론의 산물입니다.

동성애자, 죄수, 광인—그들은 존재했지만 ‘말할 수 없는 자’였죠. 주체는 항상 배제의 산물입니다.


오늘날의 장면: 자기 계발과 자유의 환상


보부아르:
오늘날 우리는 “너의 삶은 너의 선택”이라는 말을 반복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자유인가요?


사르트르:
그 말이 진심이길 바랍니다. 그러나 자유는 두렵고, 책임이 따릅니다.

내가 내 삶을 창조할 때, 나는 모든 인간을 대신해 말하는 것입니다.


푸코:
‘자기 계발’은 자유의 탈을 쓴 통제입니다. 우리는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삶을 살아가며,

자율적인 것처럼 행동합니다. 그러나 선택지는 기획된 것일 수 있습니다.


보부아르:

그렇다면 우리는 이렇게 물어야겠군요.
“나는 나를 선택하는가, 아니면 선택하도록 길들여진 것인가?”


오늘날 적용 – 구조 속 자유, 자유 속 구조


-SNS 시대: ‘자기표현’은 진정한 자유인가, 아니면 구조화된 콘텐츠 전략인가?
-교육과 직장: ‘선택한 길’이라는 말 뒤에 숨어 있는 사회적 통제는 무엇인가?
-심리적 건강: 자유란 고립과 불안을 동반한다는 점에서, 구조는 오히려 심리적 안정을 제공하지 않는가?


사르트르:
나는 자유를 포기하지 않겠습니다. 심연 속에서도 인간은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습니다.


푸코:
나는 자유를 해체하겠습니다. 그것이 진정한 자유를 향한 첫걸음이니까요.


비 내리는 파리의 창가, 사르트르는 손바닥으로 빗방울을 받으며 웃고,

푸코는 옆 테이블의 신문을 펼쳐 담론의 틈을 응시한다.


“나는 자유로운가, 아니면 구조 속을 걷고 있는가?”

대화는 멈췄지만, 질문은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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