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 vs 부처
등장인물
소크라테스: 끈질긴 질문을 던지는 철학자
부처님: 자비로운 깨달음의 스승
소크라테스: 부처님, 당신께서는 ‘중도’가 깨달음의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해가 잘 되지 않습니다. 중도란 단순히 쾌락과 금욕 사이의 ‘중간 지점’입니까?
부처님: 그대의 물음은 깊고 바르다. 그러나 중도는 단순한 타협이 아니니라. 그것은 양극단의 환상을 꿰뚫고 나아가는 길이니, 쾌락도 고행도 진리의 길이 아니라는 자각에서 비롯된 존재에 대한 통찰의 실천이니라.
소크라테스: 극단을 벗어난다는 말은 매혹적입니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그것이 어떤 삶의 모습인지
저는 궁금합니다. 인간은 늘 편향된 성향 속에 살아갑니다. 그 편향을 어떻게 벗어난다는 것입니까?
부처님: 그대는 바람의 성질을 아는가? 바람은 결코 한 방향으로만 불지 않느니라.
어느 한쪽으로만 마음이 기울면, 그것은 곧 고통의 바람을 일으킨다.
중도란 그 바람을 느끼되, 날리지 않는 마음을 기르는 것이다.
소크라테스: 음, 그러니까 중도란 마음의 평형을 찾는 것인가요? 마치 활줄 위를 걷는 자처럼?
부처님: 그 비유는 적절하다. 그러나 나는 하나 더 제안하노라. 중도란 활줄 위를 걷는 것이 아니라,
활줄 자체를 내려놓는 일이다. 걷고 있다는 생각, 어느 쪽에 떨어질까 하는 두려움,
그것을 모두 놓을 때 비로소 진정한 자유가 피어난다.
소크라테스: 그 말씀은 나의 '무지의 자각'과도 통하는군요. 아는 척하지 않음으로써
비로소 앎이 시작된다는 것. 그렇다면 중도도 무지에서 벗어나기 위한 사유의 방식입니까?
부처님: 중도는 앎으로 가는 길이 아니라 집착에서 벗어나는 길이다.
앎은 자주 오만을 낳고, 무지는 자주 두려움을 낳는다.
중도는 그 어느 쪽에도 빠지지 않고, 지혜와 자비가 균형을 이루는 상태이다.
소크라테스: 인간의 본성은 자주 경계 너머를 탐합니다.
더 가지려 하고, 더 버리려 하지요. 중도는 그러한 ‘의지’마저도 내려놓는 길입니까?
부처님: 중도는 의지를 부정하지 않되, 그 의지에 매이지 않는다.
예컨대, 촛불을 붙이고자 바람을 완전히 막으면 산소가 부족해지고, 그대로 두면 꺼지지 않느냐.
중도란 바람을 알되, 불씨를 꺼뜨리지 않게 다루는 지혜이다.
소크라테스: 실천적으로 그 불씨를 지키는 방법이 있다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부처님: 나는 여덟 갈래 길을 설하였다.
팔정도라 불리는 이 길은 지혜의 뿌리(바른 견해와 바른 생각),
윤리의 줄기(말, 행위, 생계), 수행의 꽃(노력, 마음 챙김, 집중)으로 이루어지니,
그대가 물은 실천이 여기에 있느니라.
소크라테스: 결국 중도는 ‘선택의 기술’이 아닌 ‘존재의 방식’이군요.
그 길 위에 있는 자는 한순간도 깨어있음을 멈출 수 없겠군요.
부처님: 그렇다. 중도는 도망도, 정지도 아닌 깨어 있는 발걸음이다.
그것은 때론 고요하고, 때론 강하지만, 무엇에도 휘둘리지 않느니라.
소크라테스: 부처님, 저는 오늘 이 대화를 통해 하나의 경계에서 다른 경계로 옮겨가지 않고,
경계 자체를 바라보는 힘을 느꼈습니다. 그 힘이 곧 ‘중도’인가요?
부처님: 그대는 길 위에 있도다. 중도는 ‘이것이 옳고 저것이 그르다’는 판별을 넘어,
모든 것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그 자리에 머무는 지혜이다.
소크라테스: 그 지혜는 아테네의 회랑보다 더 깊은 침묵 속에서 피어나는 것 같소.
나의 철학이 이제 부끄럽게 느껴지기도 하오.
부처님: 그대의 질문이 길을 만들었고, 그 겸손이 길을 비추었느니라.
중도는 누구의 것이 아닌, 모든 존재 안에 잠든 평형의 불꽃이니라.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부처님, 그 불꽃을 키우는 삶, 그것이 곧 해탈이겠지요?
부처님: 해탈이란 끝에 도달하는 곳이 아니라,
매 순간 그 불꽃을 지키는 마음 그 자체이다.
그대와 나, 이 대화 안에 이미 그 길이 있느니라.
소크라테스: 부처님, 마지막으로 하나 더 묻고 싶습니다.
우리가 흔히 휘둘리는 감정들, 이를테면 분노나 두려움, 탐욕 같은 것들은 중도와 어떤 관계가 있습니까?
부처님: 좋은 질문이로다.
분노는 마음을 타오르게 하고,
두려움은 마음을 얼어붙게 하며, 탐욕은 끊임없이 끌어당기는 덫이 된다.
이 셋은 모두 마음을 한 방향으로 강하게 기울게 하니,
중도에서 벗어난 상태를 만든다.
소크라테스: 그렇다면 감정 자체가 나쁜 것입니까? 아니면 그것에 휘둘리는 것이 문제입니까?
부처님: 감정은 파도와 같아 멈출 수 없지만, 파도에 휩쓸리는 배는 침몰할 수밖에 없다.
중도란 파도를 거부하지 않되, 그 위에 중심을 잡고 떠 있는 배와 같다.
분노가 올라와도 그것에 머물지 않고, 두려움이 밀려와도 그 자리에 갇히지 않으며,
탐욕이 생겨도 그것을 따르지 않는 훈련이니라.
소크라테스: 그 말씀은 감정이 중도를 가로막는 적이 아니라,
중도를 연습하게 하는 스승이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부처님: 정확히 보았도다. 감정은 경계의 신호이며,
그대가 어느 쪽으로 치우쳤는지를 알려주는 거울이니라.
그것을 자각하면, 오히려 중도의 길은 더 또렷이 보인다.
소크라테스: 그러니 감정을 없애려 하기보다,
그 감정을 비추어보는 거울을 길러야겠군요.
부처님: 그 거울이 바로 깨어 있는 마음이요, 중도의 눈이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