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문인이자 사상가였던 연암 박지원-
”.... 연암의 집안은 명문가였지만, 선조 대부터 대대대로 청렴하게 산 탓에,
참 가난했다. 경제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처가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젊은 시절 연암의 학문은, 처가로부터 나온 것이다.
장인 이보천에게 맹자를 배웠고, 장인의 아우인 이양천에게, [사기]를 배웠다...
연암은 50세까지 무직이었다. 이른바 백수였기에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있었지만, 연암의 아내는 무척 고생했을 것이다... “
연암은 천재의 필력과, 뛰어난 사상가의 자질을 갖고 태어났지만, 오랜 세월을 벼슬을 하지 못했다. 그러던 중, 낮은 관직이었지만, 50세에 벼슬에 오르자마자, 아내가 병으로 죽고 말았다. 연암과 가족을 위해 고생만 하던 아내가 애통하게 죽자, 연암은 남은 평생, 혼인도 첩을 두지도 않았다. 아내를 애도하는 시를, 20수 넘게 짓기도 했는데, 한 편지글에서는,
”..... 내 평생 언문이라고는 한 글자도 모르기에, 50년 동안 해로한 아내에게도, 끝내 편지 한 글자도 서로 주고받은 일 없었던 것이, 지금에 와서는 한이 될 따름이다... “ 라며 후회했다.
이처럼 아내에 대한 정이 깊었던 연암은, 경상남도 함양의 현감으로 지낼 적엔, 엄마 없이 지낼 자식들 걱정에 고추장을 직접 담가서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 고추장 작은 단지 하나를 보내니, 사랑방에 두고 밥 먹을 때마다 먹으면 좋을 게다. 내가 손수 담근 건데, 아직 완전히 익지는 않았다.... 보내는 물건 : 포(脯, 말린 고기) 세 첩, 감 떡 두 첩, 장볶이 한 상자, 고추장 한 단지"
이처럼 아내와 자식들에 대한 정이 깊었던 연암은, 열하로 떠났던 사신 일행 중에서, 제법 지위가 높은 위치에 있었음에도, 자신이 부리는 두 명의 하인, 말고삐를 잡는 견마 잡이 창대와, 말을 관리하는 마두 장복에게도, 애정 어린 시선을 자주 보냈다. [열하일기] 속에는 이들 두 명 하인의 어리숙하면서도 순진한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내고 있다. 양반에게 종은, 사람 이하로 취급되던 시기에, 연암은 이들을 따뜻한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열하일기] 속 연암 박지원 일행이 지나갔던 길. 연암은 1780년 5월 25일 한양에서 출발해서, 그 해 8월 1일 북경에 도착하고, 10월 27일 다시 조선 한양으로 돌아온다. 연암은 5개월 여의 일정을 통해서, 조선 사대부들이 우물 안 개구리로 살아왔음을 깨닫고, 열하일기 속에서, 때론 우회적으로 때론 적나라하게, 성리학에 갇힌 조선을 비판한다. [열하일기]에는 한 시대를 뛰어넘고자 했던, 연암의 위대한 사상이 함축되어 있다. >
연암은 압록강을 건너고 도착한 첫 번째 중국 땅인 [책문]에서, 조선의 사대부들이 ‘오랑캐 땅’이라며 무시하던, 청나라 국경의 가난한 마을인데도, 살림살이가 조선보다 나은 것에 질투심을 느끼기도 한다.
“.... 용마루가 높이 솟고, 대문은 가지런하다. 거리는 곧고 평평하여, 양편이 마치 먹줄을 친 것 같다. 담장은 모두 벽돌로 쌓았다. 벌여 놓은 살림살이들은, 모두 그림을 그린 도자기다. 시골티라고는 조금도 없다...
중국의 맨 동쪽 변두리에 불과한데도 이 만큼이니, 앞으로 구경할 것을 생각하니
문득 기가 꺾이고 곧장 발길을 돌리고 싶은 생각이....”
하지만 연암은 이내 반성을 한다.
“... 이것은 질투심이다. 내 본래 성품이 맑아 질투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는데, 벌써 잘못된 생각이 드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는 곧 본 것이 적기 때문이다. 만약 석가여래의 혜안으로 온 세계를 두루 본다면, 평등하지 않은 게 없겠지. 모든 것이 평등하다면 질투와 부러움을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나는 장복을 돌아보며 물었다. "
-네가 만약 중국에서 태어난다면 어떠했겠느냐?
-중국은 오랑캐 인뎁쇼. 소인은 싫습니다.
마침 한 소경이, 어깨에 비단 주머니를 메고 거문고를 뜯으며 지나간다.
나는 크게 깨달아 말했다.
"저이야말로, 평등한 눈을 가진 사람이 아니겠는가?...”
-도강록. 6월 27일
열하일기 속에는, 연암이 노복(奴僕) 장복, 그리고 창대와 나누는 얘기가 자주 나오는데, 연암은 하인들에게도 권위적이지 않고, 그들의 의견을 물으면서, 당시 조선 사람들의 의식을 알려주고, 자신이 깨달은 바를 적는다. 하인들의 대답이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 해도 나무라지 않고, 자신의 더 발전된 생각을 기록한다. 당시 조선에서는, 노비들도 청나라를 오랑캐라며 무시했지만, 청나라의 발전된 실상을 보고 깨달을 얻은 연암은, 오히려 열린 마음을 갖게 된다.
이 대목에서 연암이 평등안(平等眼 : 석가여래의 밝은 눈으로 세상을 두루 본다면 누구나 평등하지 않은 게 없다)을 말하며, 석가여래를 언급하는 것은 중요한데, 전통 유학의 관점에서 보면 불순한 발언이다.
연암은 왜 불교의 언어로 평등을 말하려고 했을까?
청은 조선의 사대부들이 숭상하던 명을 무너뜨린, ‘원수의 나라’이기 때문에, 유학의 세계관을 통해서는, 청나라에 대한 차별의 시선을, 극복할 방법이 없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세계를 문명과 야만으로 나누는, 화이론(華夷論) 론에 갇혀서는, 조선과 ‘오랑캐 청’을, 평등의 시선으로 바라볼 수 없고, 조선이 오랜 세월 무지했던, ‘청나라의 참모습’을 깨닫고 배울 수가 없기 때문이다. [열하일기]에 드러난, 연암의 이런 사상 때문에, 국왕 정조에게 까지 연암은 야단을 맞아야 했다.
또한 조선의 성리학자들은, 왜 ‘열하’라는 오랑캐 땅의 지명을 썼느냐부터, 청나라 연호를 책에 표기한 것까지, 엄청난 비판을 쏟아냈다. 압록강을 건너는 일기인 [도강록] 첫 첫머리부터 연암이, “후삼 경자, 우리 임금 4년(청나라 건륭 45년) 6월 24일 신미일”이라고 적은 데서부터, 비난을 받았는데, 당시 조선의 기준으로 보면, 상당히 도발적인 기록이었다.
왜냐하면 조선은, 이미 멸망한 나라 명에 대한 충성심에서, 청나라의 연호를 절대로 쓰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멸망한 나라 명의 마지막 황제인, 숭정의 연호를 계속 썼는데, 공식 기록 문서에는 모두 ‘숭정 몇 년’,
이런 식으로 표기했었다. 숭정 연호를 사용하는 것은, 청은 받아들일 수 없고, 이미 사라진 나라 명을 변함없이 받들겠다는 의지였다.
하지만 연암은, 후삼경자(명의 황제 ‘숭정’을 쓰지 않고 명나라 연호를 쓰는 연암의 독특한 방식)와, 조선의 연호, 청의 연호를 동시에 표기했다. 당시 조선 사대부들도 배려하고, 비록 오랑캐지만 청나라에서도, 배울 건 배우겠다는 연암의 의지가 보이는, 하지만 조선의 사대부들이 보기에는, 불충(不忠)하고 고약한’ 기록법이다.
<청나라 북경에 있는 상점들의 모습. 연암은 번화한 상가인 '유리창'의 모습을 보고, '세상 모든 진귀한 것들이 거래되는 곳'이라고 썼다. 유리창(琉璃廠)이라는 이름은, 자금성을 짓기 위해서 유약을 바른 기와, 즉 '유리(琉璃)'를 만들던 공장(廠)이 있던 곳이라는 뜻이다. 청나라 때 번성했던 이곳은, 아직도 베이징을 대표하는 문화 거리로, 우리나라의 인사동 거리와 비슷한 느낌을 풍긴다>
연암의 또 다른 혁신적인 사상인, ‘경계인(境界人)의 철학’이 잘 나타난 대목을 또 살펴보자.
나는 수석 역관인 홍명복에게 물었다.
- 자네 도(道)를 아는가? 홍 군은 두 손을 마주 잡고는 대답했다.
-아니, 무슨 말씀이신지요?
-도(道)란, 알기 어려운 게 아닐세, 바로 저기 강 언덕에 있네.
-이른바 [시경]에, ’ 먼저 저 언덕에 오른다 ‘라는 말을 이르는 것입니까?
-그것을 말하는 게 아닐세. 압록강은 바로 우리나라와 중국의 경계가 되는 곳이야. 그 경계란 언덕이 아니면 강물이네. 무릇 천하 인민의 떳떳한 윤리와 사물의 법칙은, 마치 강물이 언덕과 서로 만나는,
피차의 중간과 같은 걸세. 도(道)라고 하는 것은 다른 데가 아니라, 바로 강물과 언덕의 경계에 있네.
-무슨 말씀인지 감히 묻습니다.
-[서경]에 인심(人心)은 위태롭고, 도심(道心)은 은미 하다고 했네. 서양 사람들은 기하학에서, 하나의 획을 분별하여, 하나의 선으로 깨우치기는 했으나, 그 미약한 부분까지 논변하고 증명할 수 없어서, ’ 빛이 있고 없는 그 경계‘라고 말했고, 불교에서는 그 경계에 임하는 것을, ’ 붙지도 않고 떨어지지도 않았네 ‘. 불즉불이(不卽不離)라고 말했다네. 그러므로 그 경계에 잘 처신함은, 오직 도를 아는 사람만이 능히 할 수 있으니...”
-도강록 6월 24일-
이게 무슨 선문답일까? 연암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무엇일까? 궁금할 수 있다.
[열하일기 첫걸음]의 저자 박수밀 교수는, 위 대화에 나오는 각각의 문답에 대해서 자세한 해설을 하고 있다. 이번 서평에서 다루는 [열하일기 첫걸음]은, 이처럼 적은 문답 속에서도 드러나는, 연암의 깊은 사상과, 그 의미 대해서, 박교수가 25년 동안 공부해온 결과물을 알기 쉽게 풀어 설명해준다는데 큰 장점이 있다.
박교수의 상세한 설명이 없이 열하일기의 이 대목을 읽었다면, 그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하고 넘어갔을 것이다. 박교수의 설명은 쉽고 재미있지만, 내용이 방대해 이곳에 다 옮기지는 못한다. 관심 있는 구독자께서는, 책을 구입해서 연암의 깊은 사상에 대해서, 배울 수 있는 행운을 얻게 되시길 바란다.
(다만, 짧게 정리하자면, 한 사물과 다른 사물 사이의 경계(境界)는, 어느 곳에도 속하지 않기 때문에, 틀에 갇히지 않고 변혁이 일어나며, 이질적인 것들이 섞여 있기에, 창조적인 사유가 만들어진다. 경계(境界)의 도는, 조선과 중국과의 관계를 뛰어넘어, 민족과 민족, 인간과 인간, 강대국과 약소국 등 모든 대립되는 존재 사이에 있다. 압록강이라는 경계를 건너, 타국으로 들어가면서, 연암은 '경계의 철학'으로, 조선이 헤쳐나가야 할 길을 찾고자 했던 것이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곤란한 위치에 있는, 지금의 대한민국에도 시사하는 바가 깊다.)
<청나라 황제의 여름 별장이 있던, 열하의 모습 >
ps1. 연암과 수석 역관의 대화 속에서, 서학(西學)의 기하학을 말하면서, ’ 빛이 있고 없는 경계‘라는 구절은, 청나라에서 오랜 세월 살았던, 예수회 선교사 마테로 리치 (한국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천주실의]의 저자로 유명한)의, [기하 원본]에서 가져온 말이다. 수학의 기본 단위인 점, 선, 면을 설명하는 부분인데, 마테오 리치의 책을 읽은 연암이, 서양인들이 ’미약한 부분까지 증명할 수 없어서 ‘라고 말하고 있는 대목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마테오 리치가 [기하 원본]을 저술할 당시는, 아직 아이작 뉴튼과 라이프니츠의 미적분이 발표되기 전이었다. 이미 널리 알고 있듯이 미적분이란, ’끝없이(극한) 경계에 접근하는, 움직임을 측량하는 수학‘이다. 미적분에 대한 철학적 사유는, 동서양에 다 존재했으나, 수식으로 정리돼 못했던 시기인데, 연암은 마테로 리치의 선에 관한 짧은 언급 속에서, ’ 미적분의 철학‘을 연상시키는 언급을 하고 있다. 연암이 수학을 좀 더 공부했다면, 뉴튼보다 먼저 미적분을 발표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