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세계는 왜 지금과 같아졌는가
19세기, 제국은 단순한 군사적 침략의 이름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인식의 질서'였습니다. 대영제국은 칼과 총보다 앞서, 펜과 지도와 통계를 동원했습니다. 그들은 세계를 정복하기에 앞서, 먼저 세계를 '그려야' 했습니다.
프랑스가 18세기에 『백과전서』를 통해 지식의 총합을 정리했다면, 19세기 영국은 그 유산을 실제 세계로 확장했습니다. 영국은 지도를 통해 미지의 땅을 ‘이해 가능한 공간’으로 만들고, 통계를 통해 인간과 사회를 ‘관리 가능한 대상’으로 분류했습니다. '지도는 공간을 점령하는 기술이었고, 통계는 인간을 분류하는 도구였다'는 말은 바로 이 지식-권력의 동맹을 말합니다.
1860년대, 영국 식민지 인도에서는 행정관들이 토착민의 두개골을 측정하고, 피부색과 코의 각도를 수치로 기록했습니다. 이는 단지 과학적 호기심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 자료를 바탕으로 ‘열등한 인종’을 분류했고, 그 분류가 곧 식민 지배의 정당화로 이어졌습니다.
런던에서는 식민지에서 채집한 식물로 식물원을 꾸미고, 아프리카와 아시아인의 일상을 묘사한 민속지를 출간했습니다. 이 모든 것은 제국이 ‘알고 있다’는 감각을 형성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비서구 세계를 연구한다는 명분 아래, 오히려 비서구를 고정된 타자로 박제한 셈이었습니다.
20세기 후반, 팔레스타인 출신의 지식인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이러한 구조를 비판했습니다. 그는 말합니다.
“서구는 동양을 설명했지만,
동양은 한 번도 자기 자신을 설명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단지 동양에 대한 흥미가 아니라, 서구가 만든 ‘동양 이미지’ 그 자체였습니다. 그것은 낯섦의 체계화이며, 타자의 고정화였습니다. 사이드는 이를 통해 식민주의의 본질이 ‘무력의 행사’가 아니라 ‘지식의 권력’ 임을 밝혔습니다.
19세기의 제국은 전쟁만큼이나 '수집'에 집착했습니다. 그들은 식민지의 동식물, 공예품, 민속자료, 심지어 인간 표본까지 유럽으로 가져왔습니다. 영국 박물관, 파리의 인류학 박물관, 네덜란드의 열대박물관 등은 그 수집의 결정체입니다.
이는 단지 전리품이 아니었습니다. 제국은 세계를 구조화하고, 타자를 박제함으로써 ‘문명의 중심’에 자기 자신을 위치시키려 했습니다. 지식의 식민화(appropriation)는 곧 위계였고, 그 위계 속에서 제국은 존재를 정당화했습니다.
런던의 한 식당에서 제공된 인도산 카레, 맨체스터의 여성들이 착용하던 인도산 면직물 드레스, 그리고 영국 해군 병사들의 티타임에서 빠지지 않던 중국산 홍차. 19세기 후반 영국의 일상은 제국 없이는 성립할 수 없었습니다.
1851년 런던의 만국박람회에서는 세계 각지에서 수집한 물품들이 유리궁전 속에 전시되었고, 영국 시민들은 박물관을 통해 자신들이 ‘세계 위에 있다’는 감각을 학습했습니다. 박물관과 식물원은 단순한 구경거리가 아니라, 제국이 만든 ‘지식-정체성의 공장’이었습니다.
제국은 단지 타자를 정복하지 않았습니다. 타자를 설명하고, 재현하고, 정의했습니다. 하지만 타자를 그렇게 설명하는 순간, 타자는 더 이상 자기 목소리를 가질 수 없었습니다. 제국은 타자를 무대 위에 올렸지만, 대본은 오직 제국이 썼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 대본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세계를 보고 있습니다. ‘지도를 그린 자가 세계를 말한다’는 명제가 여전히 유효한 것은 아닐까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학문, 국가, 문화의 체계는 그 제국의 유산에서 얼마나 벗어났을까요?
지금, 우리는 누구의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고 있습니까?
기계와 제국은 거대한 구조였지만, 역사는 결국 인간의 삶 위에서 움직였습니다.
다음 편에서는 기록되지 않은 하루하루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14시간을 일하며 맥주로 하루를 씻어내던 공장 노동자,
보푸라기와 싸우던 소년 소녀들,
빨래, 시간표, 굶주림, 그리고 희망의 조각들.
우리는 노동과 일상 속에서
19세기의 또 다른 진실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