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의 중앙아메리카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
디아스포라(Diaspora/διασπορά). 고전 그리스어로 파종을 의미하는 단어에서 유래한 표현으로 본국을 떠나 타국에서 살아가는 공동체 집단 혹은 그 이주를 의미한다. 이산(移散)이라고도 변역할 수 있는 이 단어는 BC 6세기의 바빌론 유수오 인한 중동 지역의 유대인의 집단 이주가 디아스포라의 시작이었으며, 1492년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 이후 1800년대 후반 전 유럽에서 미국으로의 수백만명의 이주도 이에 해당된다. 특히 아일랜드에서는 1847-1852년의 대기근으로 인해 대거 미국과 호주로 이주를 경험했다(아일랜드는 대기근 이후 현재까지 그 전의 인구 수를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의 한족들은 시대에 따라 북방 민족들, 몽골족의 원, 여진족의 청의 남하와 침략으로 동남아시아로 이주를 해왔으며 청말기 나라가 혼란스러워지자 중국을 떠나 서부개척으로 급속도의 팽창을 하고 있던 미국횡단철도 건설을 위해 캘리포니아로 대거 이주를 하기도 했다. 인도 또한 비슷한 시기에 식량부족으로 인한 집단 이주가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미국으로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으로 대략 2500만명 정도의 대규모였다.
한국의 디아스포라는 4개의 시기로 나눌 수 있는데, 1기는 1860-1910년까지 조선말기의 정치적 혼란, 기근, 빈곤 등을 피해 1860년 대부터 연해주와 만주, 그리고 하와이 멕시코로의 이주가 이에 해당된다. 미국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의 한인 이주는 1902-1903년부터 시작되었는데 하와이 일본 거주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1905년 일본이 한인의 이주를 금지하기까지 7,226명의 한인이 이주했고 그후 1,000여명의 한인 여성들이 결혼을 위해 추가로 이주했다. 1905년에는 멕시코 유카탄 반도의 에네켄 농장의 계약 노동자로 1,033명이 떠나기도 했다.
2기는 1910-1945년의 시기로 일제 통치 시기에 토지와 생산수단을 빼앗긴 농민과 노동자들이 만주와 일본으로 이주하였다. 1910년 한일합방 이후에는 단순히 경제적인 동기 뿐 아니라 일본으로부터의 정치적인 압박을 피해 해외로 이주하는 수가 늘었는데 1920년대는 연평균 대략 1만명이 국외 이주를 한것으로 추정된다. 대개 만주와 연해주로 집단 이주를 했는데 1차대전 때는 일본의 경제호황으로 한인들이 대부분의 노동시설을 담당하였으며 1937년 중일전쟁과 1943년 태평양전쟁의 소용돌이에서는 대규모의 한인들이 강제징집으로 전쟁터로, 광산, 군수물자 공장 등으로 끌려갔다. 이는 일본이 패망한 1945년 8월까지 약 250만명 규모의 강제 이주가 이루어졌었고 60여만명은 돌아오지 못했다.
특히 연해주로 이주했던 한인들은 중일전쟁의 발발로 일본의 극동 침투를 막고자 했던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으로 거의 모든 고려인을 생면부지의 땅으로 옮겨졌다. 1930-1937년 동안 20만명 가량이 중앙아시아의 척박한 지역으로 강제 이주 되었고 이 과정에서 2만5천여명이 숨졌다고 추정된다. 소련 붕괴 후 이들은 그곳에 자리잡아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해 그 주변 지역에 분포해 거주하게 되었고 '고려인(高麗人)'으로 불리게 되었다.
3기는 1945-1962년까지 한국전쟁을 전후해서 1962년 정부가 이민정책을 수립할 때까지의 시기로 5천여명의 입양아, 6천여명의 미군과의 결혼, 또 5천여명의 학생이 학업의 이유로 대부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하지만 적지않은 수의 학생들은 학위를 취득한 후 계획과는 달리 현지에 정착해 이후 이민문호가 개방되었을 때 4기 가족 이민의 토대를 만들게 되었다.
4기는 이민문호가 개방된 1962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다. 이때부터는 정착을 목적으로 한 이민이 시작되었다. 집단이민과 계약이민을 통해 남미, 서유럽, 북미, 중동으로 집단 이민이 시작되었다. 어디까지나 자발적인 동기에 의한 이민, 이주였기에 이전 시대의 극적인 슬픔과 우울함은 많이 지워졌다. 하지만 이민문호 개방의 무목적이 외화유입이었기에 1963년 103명의 브라질 농업이민이나 1963-1977년 2만여명의 광부와 간호사들로 이루어진 파독근로자은 현지에서 차별과 강도높은 노동을 받아들여야 했다.
멕시코 한인 이주 - 그 시작
그 중에 1905년 멕시코 유카탄 반도로 떠났던 계약 노동자 1033명의 이야기는 소재로만 보았을 때는 영화나 소설로 만들어질 만큼 드라마틱한 느낌을 준다. 20세기 초, 조국은 열강 사이에서 생존의 방향을 기로에 두고 바람 앞의 등불이었고, 각 지방의 다른 신분의 사람들이 꿈과 또 다른 희망을 찾아 떠나는 미지의 땅, 계약 노동......
지금은 휴양지 칸쿤이 위치한 유카탄 반도는 멕시코 남부 중앙 아메리카가 시작되는 지점에 위치한 반도이다. 원래 목축업이 흔하였던 유카탄 반도는 국제 에네켄 수요 때문에 점차 대규모 에네켄 농장이 들어섰다.
에네켄은 멕시코와 중앙 아메리카 북서부를 포함한 메소아메리카 지역이 원산지인 용설란(龍舌蘭, agave)과의 식물로 5∼6년 정도 자라면 섬유를 뽑을 수 있다. 마야인들은 에네켄을 자급자족용 필수품으로 생각하고서, 오래 전부터 에네켄에서 추출한 섬유로 노끈, 밧줄, 해먹, 가방, 기타 생활 용품 등을 만들어 사용하였다.
19세기 중반 미국의 곡물회사인 맥 코믹사(McCormick社)가 말 대신에 기계로 움직이는 수확기를 발명하면서 밀의 생산이 급격히 증가하였다. 이에 따라 생산된 밀을 포장하는 포대용 굵은 밧줄의 수요도덩달아 증가하였다. 자연히 노끈 제작에 필요한 에네켄은 멕시코 최대의 수출 상품이 되었고, 식민지 시기 이후 대토지 소유자와 그의 후손, 상업을 통해 부를 축적한 신흥부자들은 에네켄 농장을 소유하면서 에네켄 재배를 주도하였다. 에네켄 산업은 노동집약형 산업이기에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원주민 외에 적지 않은 외국인 노동자가 필요한 상황 속에서 에네켄 산업은 해외 노동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멕시코 이민모집은 1904년 8월, 네덜란드-독일계 영국인이면서 멕시코 국적을 소유한 유카탄 농장주협회 대리인 자격의 국제 이민 브로커 마이어스(John G.Myers)가 서울에 도착하면서부터 막이 올랐다. 그는 이미 중국(홍콩과 광둥)과 일본에서 노동자 모집에 실패한 뒤였고 마지막 카드로 한국행을 시도했던 것이다. 당시 서울에는 일본에 본부를 둔 이민회사 대륙식민(大陸植民合資會社)의 지부가 한인을 대상으로 한 하와이 이민을 알선하고 있었다.
마이어스는 전국에 지방사무소를 개설하고 대대적인 모집광고를 냈다. 신문지면을 통한 광고문은 《황성신문》에 1904년 12월 17일부터 개제되었다.
당시 인천주재 일본영사 가토 모토시가 일본 외무성장관 고무라 주타로에게 보낸 계약서의 내용을 보면 신문광고에 비해 좀 더 상세한 계약 조건이 담겨있다.
1. 고용주는 노동자와 그의 가족이 한국에서 멕시코의 만사니요(Manzanillo) 또는 살리나 크루스까지의 여행비를 부담하는 동시에 입항지에서 고용현장까지의 여행비 및 잡비도 일체 부담함.
2. 고용주는 연중 모든 계절을 통해 노동자와 그의 가족에게 적합한 일을 제공할 것임.
3. 고용주는 무료 의료제공 및 질병시 보호함.
4. 고용주는 매주 임금을 계산하고 임금의 10분의 2를 맡아 계약만료시 돌려줌. 그러나 노동자가 적합한 절차없이 다른 농장으로 옮길 경우에는 이 돈을 모두 몰수할 것임.
5. 계약기간은 농장에 도착한 날부터 4년간이며 노동자가 원할 경우 계약을 연장할 수 있음.
6. 고용주는 다음의 비율에 따라 임금을 지불함.
- 에네켄 잎에 대한 보수: 2천 잎에 72전(추가로 매 1천잎당 40전, 1천 잎보다 적으면 이 비율을 감소함
- 잎 단 쌓기 및 밭 청소: 1메테카(meteka, 1메테카는 404평방 미터)당 25전
- 에네켄 줄기 베기: 1백 그루터기당 35전. 단 벤 줄기를 길가나 트럭으로 운반하는 조건임.
- 장작 패기: 길이 2파라(para, 1파라는 836밀리미터), 넓이 1파라에 50전
- 잔가지 모으기: 1메타카에 50전
- 기타의 임금은 현지의 농장임금 관례에 따라 지불됨.
7. 노동자는 이상의 일을 하게 되며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한 매일 기타의 농장일을 시킴.
8. 고용주는 식수.가옥.장작.채소밭 등을 제공함
9. 고용주는 12세가 되는 아이들을 고용할 수 있으며 임금은 위의 수준으로 지불함.
멕시코 이민은 공개적이었지만 합법적인 것은 아니었다. 정부에서는 멕시코 노동 이민의 문제점에 대해 인지를 하고 금지하였지만 한국의 실질적인 외교 및 재정권이 일본의 수중으로 이전한 때였기에 일본의 해외이민 정책과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된 것이었기에 애초에 국가적인 관리를 받을 수 있었던 상황이 아니었다. 이들의 이민은 1902년 12월에 시작되어 1905년 총 64회 이루어진 하와이 공식 이민과는 달리 이민 중개인에 의해 단 한차례로 끝난 대규모의 불법 노동 이민이자 국가의 감독없이 이루어진 이민이었기에 명확한 근로조건의 준수와 최소한의 합법적인 노동감독은 애초에 기대를 할 수 없었다. 또 당시 대륙식민회사는 하와이 이민도 함께 모집했던 터라 하와이 이민을 가려고 찾아간 사람들 가운데 멕시코 이민으로 변경된 경우도 많았다. 개 중에는 하와이행 모집이 끝났다고 멕시코행을 권유받았거나 또는 하와이로 가는 줄 알고 이민선을 탄 사람들도 있었다.
여권문제와 수두 등의 문제로 석달 여간의 지연 끝에 한인들은 1905년 4월 5일, 인천 제물포를 출발하여 이역만리 낯선 멕시코로 향했다. 영국 상선 일포드호(S.S.Ilford)를 타고 멕시코의 남부 살리나 크루스 항구에 도착한 한인들은 새로운 삶에 대한 기대가 가득했다. 하지만 그들을 맞이한 것은 기대 속의 지상 낙원이 아닌 유카탄의 뜨거운 불볕더위와 난생 보지도 못한 ‘에네켄 아시엔다(Henequén Hacienda)라고 불리던 에네켄 농장이었다.
에네켄 농장에서의 삶 그리고 그 이후
유타칸 반도의 북서쪽 메리다에 도착한 한인들은 32개의 농장으로 뿔뿔히 흩어져 4년간의 강제 노동을 하여야만 했다. 한인들은 하루에 2,500개 정도의 에네켄(한인들은 어저귀라고 불렀다) 잎을 자르고 에네켄 밭의 풀을 제거하였는데, 유카탄 지역이 무덥기에 주로 새벽에 일어나 일하곤 하였다. 에네켄은 선인장과의 식물답게 다육질의 잎은 아주 두껍고 양옆으로 날카롭고 단단한 가시들이 무수히 솟아있는 섬유 식물이다. 2m가 넘는 에네켄 잎을 잘라서 으깨면 흰 실타래가 되는데, 이것으로 선박용 로프나 마대로 만들어 사용하였다. 에네켄 농장에서의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에 대해 인천 출신 최병덕 선생은 “손에는 하루도 피가 멈출 날이 없었고 가시에 찔려 항상 몸이 엉망진창이 되었으며 감독들은 채찍으로 때리기 일쑤였다.”고 회상하였다.
국내에서 멕시코로 떠난 동포들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된 것은 유카탄 메리다에 거주하는 중국인 허훼이의 편지가 서울에 도착하면서부터였다. 한인들이 인천을 떠난 지 4개월이 채 못돼《황성신문》(1905.7.29)에 두 꼭지의 현지 참상소식이 게재되었다. 2면(기서란)에는 상동교회 만엘루 청년회 서기 정순만의 기고 “국민이 진위노예 어날수능구호아”라는 글이 실렸고 3면에는 허훼이의 편지내용을 소개한 샌프란시스코(이하 상항)의 중국계 신문 《문흥일보》기사가 실렸다. 아래는 중국인 허훼이의 편지 내용이다.
멕시코 메리다에 사는 중국인 허훼이의 편지는 대개 이러하니, 서력으로 5월 15일에 윤선(증기선)으로 조선인 1,014명이 도착하였는데 남자는 20세에서 50세까지가 6백여 명이고 어린아이는 유아로부터 15세까지가 2백여 명, 그리고 부인은 18세에서 50세까지가 2백여 명, 여아는 2-3세에서 10여 세까지가 1백여 명이다. 역시 가족을 따라온 자가 많았더라. 원래 이곳 토인이 합성공사를 설립한 지 이미 2년에 중국에서 사람을 꾀어 사들이더니 중국 내지에서 그 좋지 못한 소식이 퍼짐을 알고 다시는 응모자가 없거늘 이에 조선으로 전향하여 노예매수의 수단을 부린 것이다. …… 이곳 돼지고기 값은 80전 하는데 한인 값은 30전 하니 돼지 값에 비교해도 그 가치가 너무 싸다. 모두 조각조각 떨어진 옷을 걸치고 다 떨어진 짚신을 신었으니 이곳 본토 토인 남녀가 보고 비웃는 소리는 가히 듣기 거북할 지경이다. 연일 큰 빗속에 한인이 여러 어저귀 농장으로 흩어져 일할 때 부인이 아이를 팔에 안고 혹은 등에 업고 길가를 배회하는 모양은 실로 우마와 가축과 같고 보는 이가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다. 이곳 토인이 지구상 5-6 등의 노예라 칭하는데 한인은 그 밑인 7등 노예가 되어 영원히 우마와 같다. 농장에서 일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무릎을 꿇리고 구타를 당하여 살가죽이 벗겨지고 피가 낭자하니 차마 못 볼 정형에 통탄통탄이라 하였더라
《황성신문》은 또 이틀 뒤인 7월 31일자 2면 논설란에 “멕시코 이민이 처해진 상황을 듣고 견딜 수 없음”이라는 제하의 사설을 실었다. 이에 고종황제는 바로 다음날 8월 1일 칙유(勅諭)를 내렸다. “이민회사가 당초 이민을 매수할 때부터 정부가 이를 금지시키지 못한 까닭이 무엇이냐. ……이들 천여 명의 적자들을속히 상환시킬 방책을 강구하라”고 정부관리들을 엄중하게 꾸짖었다. 한편 양기탁과 함께《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영국 언론인 베델(Emest Bethel) 런던 데일리 특파원이었던 그는 일본의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문제점과 한국에 대한 부당한 식민지배로 인한 약소국가의 비애와 일본의 간계를 비판했던 친한파 외국 언론인이었다. 그도 결국 1909년 일본의 탄압 끝에 병사했다)도 그 신문 사설을 통해 정부의 이민실책을 탄핵하고 현지조사를 위한 특별기구를 설치하라고 강경한 논조를 폈다. 그러나 양국간에는 외교공관도 없고 워낙 먼 지역이라 국내에 비등하는 책임추궁과 조속한 대책마련의요구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별다른 묘책을 찾지 못했다. 이하영은 8월 11일 멕시코 정부는 전문을 발송했다. “비록 양국간에 일찍이 수교조약을 맺은 바 없지만 일시동안의 정신으로 한국정부가 관원을 파견하여 우리 동포를 보호하게 될 때까지 보호해 달라”는 내용의 요청이었다. 동시에 이하영은 하야시에게 일본정부도 멕시코 정부에 한인보호 요청해 주도록 부탁했다.
하지만, 멕시코 정부의 회신은 "노예대우 받는 자가 있다는 것은 귀 정부 보도자의 와전인 것이 확실하다. 아시아 인부가 유카탄에 있는데 그 대우가 심히 우대한지라 이에 대한 글이 청국의《북경일보》에 실렸으니 열람이 가능하다. 단 주일공사관(멕시코)에서 이 사실을 통지할 것이다"라는 내용이 모두였다. 이렇게 멕시코정부는 한국 노동자들에 대한 학대 사실을 은폐했으며 일본은 형식뿐인 전문만 주고 받았을 뿐이다. 한편 외부협판 윤치호는 고종황제의 특사로 7월 15일 일본유람단에 끼어 하와이와 멕시코 동포들의 생활상을 조사하기 위해 일본으로 떠나 동경에 체류중이었다. 이후 하와이로 방문해 하와이 한인 이민 노동자들의 실태와 상황을 조사하던 과정에서 멕시코를 방문할 계획을 준비해 경비를 요청하였으나 한국정부으로부터 회신을 받지 못하였고 그 와중에 한국이 멕시코와 독자적인 외교관계를 갖는 것을 우려하던 일본의 방해로 다시 한국으로 돌아가 한국 정부가 멕시코 한인 노동자들의 실태를 조사하고 참상을 확인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되었다.
에네켄 농장의 한인들은 1909년 5월 12일, 4년간의 노동계약이 끝나고 해방될 수 있었지만 경제적으로는 자립할 능력이 없었다. 게다가 조국은 일제에 강제 병합되어 돌아갈 수 없었고, 멕시코 내란과 혁명의 와중에서 한인들의 생활은 향상되지 못하고 통일된 한인사회를 이루지 못한 채 각지로 흩어졌다. 초기에는 국민회 메리다지방회를 창립, 한인들은 민족적 단결을 통한 한인 복지 향상, 고국의 독립운동을 후원했지만 해방이 되어 멕시코와의 국교가 수립될 1962년까지의 긴 세월 동안 단 한 차례로 끝난 멕시코 이민은 시간이 지나면서 혼혈이 증가하고 한국어를 잊어 가면서 민족적 정체성도 점차 상실하여 갔다.
1912년의 에네켄 산업의 잠깐의 호황기를 거쳐 다시 사양되자 이들 중 288명은 1921년 다시 쿠바로 재 이민하게 돼 새로운 쿠바 이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쿠바에는 설탕붐이 일었고 사탕수수 농장에는 많은 노동력이 필요하였다. 유카탄 반도의 여러 농장에 흩어져있던 한인들 사이에 쿠바의 노동조건이 멕시코보다 훨씬 낫고 생활수준이 높아 자리잡기가 용이하다는 소문이 돌았다. 1921년 멕시코 한인 중 288명이 쿠바로 이주함으로써 쿠바 한인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한 경험이 없었던 탓에 많은 어려움을 겪었고 국제 설탕가격 하락으로 작업량과 노임이 줄어들어 다시 쿠바의 하층민들도 꺼리는 에네켄 농장에서 일을 해야만 했다.
쿠바 한인들은 이러한 혹독한 노동과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광복사업, 한글교육, 국사교육을 시작했고 1923년 3월 1일에는 독립선언 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멕시코에서 쿠바로 건너간 한인 1세대 중 살아생전 조국 땅을 밟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61년 쿠바의 사회주의 선언으로 국교가 단절된 이후 이들의 소식을 듣기는 더 어려워졌다.
검은 꽃 그리고 '국가와 나'
2004년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김영하의 2003년 소설,「검은꽃」은 이런 멕시코 한인 이민기를 다루고 있다. 3부로 구성된 이 소설은 몰락한 황족, 양반, 무당, 사제신부, 농민, 약사, 군인, 소매치기 등 다양한 인물들이 어떤 연유에 그리고 어떤 과정으로 멕시코 행 배에 오르고 에네켄 농장에 다다르는 여정, 그리고 에네켄 농장에서의 고된 삶과 그들의 역정에 관한 이야기의 1부, 주요 인물들의 4년 계약 후의 삶을 쫓는 2부, 그리고 김이정을 중심으로 과테말라 혁명과 밀림 속 고림된 새로운 국가건설과 몰락을 다룬 3부로 구성되어 있다. 그 안에는 가쓰라-테프트 밀약, 을사늑약, 경술국치의 한국과 관련된 역사적 사실과, 멕시코 메리다 지방회의설립, 멕시코혁명, 라틴 아메리카 혁명(과테말라 내전) 등 멕시코와 인접 국가에서 일어난 역사를 바탕으로 그 안에 11명의 가상 인물들의 행적을 좇아, 나라를 잃은 백성의 고난한 이민기를 이야기하고 있다. 이자경의 『멕시코 이민사』와 백종국의 『멕시코 혁명사』를 참조한 이국의 역사는 다른 나라의 역사 속에 잊혀진 한국인들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국가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찾으려고 노력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방해 속에 하와이 행을 끝으로 한국으로 돌아온 윤치호는 고종황제를 배알하였으나 그에게 얼마나 멀리 다녀왔는지, 현재 어디에 살고 있는 지를 물을 뿐, 하와이는 고사하고 멕시코로 팔려간 한국인들에조차 관심을 잃은 일국의 황제에게 느낄 수 있는 절망은, 에네켄 농장의 고역을 버텨내던 한국인들이 어떻게든 고국이 자신들을 구해주리라는 희망을 포기하게 되기까지의 과정이 곧 국가를 잃은 개인이 역사 속에서 어떤 의미로 자리하게 되는 지를 설명해 준다.
소설 속에서 씌여지는 역사 속의 개인의 의미는, 집단 속에서 개개인들에 의해 드러나는 인간의 면모를 통해 여러 역사와 소설을 통해 알게 되었던 그것과 다름아닌 일반적인 형식으로 그려지며 (사실이 그랬을 것이라고 믿는다), 주인공인 김이정과 이연수를 중심으로 한 이야기를 통해 개인이 어떻게 역사 속에서 비극으로 - 어떻게 살아남았던 그들은 조국에서 버림받은 존재로서 - 끝맺게 되는 지를 확인할 수 있다. 너무 방대한 역사를 한 권의 소설로 끝맺음 하느라 그리고 개개인의 등장인물들의 갈등이 역사 속에 얼마나 촘촘히 짜여있는지, 주인공의 입체감이 너무 평면적이지는 않았는지, 기존의 역사소설의 형식에 비해 작가의 주제와 형식의 독창성이 얼마나 잘 조화되어 있는 가에 대해서는 여기서 이야기하지 않겠다. 그보다는 작가가 전달하고자 했던 주제, '국가에 의해 역사 속에서 소외되었던 개인'을 통해 '국가'와 '나'에 대한 정의에 대해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소설 속에서 멕시코 혁명을 겪은 김이정은 국가와 나의 의미에 대해 이렇게 생각한다.
이정은 가끔 일기에다 이렇게 썼다. 국가가 영원히 사라질 수 있을까? 그렇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혁명이 시작되고부터 이미 멕시코엔 국가가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모두가 각자의 화폐를 찍고 다른 돈을 쓰는 자는 죽인다. 살육이 살육을 부른다. 힘을 가진 자들은 모두 멕시코시티로 진격한다. 그것이 곧 이 길고 긴 혁명의 시작과 끝이다. 벌써 수십만이 죽었다. 이것은 국가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아니면 국가가 없기 때문에 벌어진 일인가. 대한제국이 있었지만 우리는 행복하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의 멕시코도 마찬가지다.
그는 4년 동안의 계약 노동을 통해, 그 기간 동안 조국에 대해 느꼈던 실망감을 통해 조선이 대한제국으로 바뀌고 왕이 황제가 되고 또 다른 황제로 바뀌어도 그에게는 그리 큰 의미가 아님을, 그리고 멕시코의 혁명을 통해 다시 한 번 국가의 정의와 개인의 관계를 되집어본다. 그의 물음은 너무 극적인 역사의 소용돌이에 있음을 인정한다. 갈등이 없다면 우리가 그리 배타적인 국가주의를 고민할 필요는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일까, 그리고 국가는 나에게 어떤 의미이며 또 나는 국가에 어떤 의미인가, 라는 물음은 근래의 무역전쟁이나 여전히 잠재되어 있는 민족과 종교의 갈등을 통해 언제든 수면 위로 드러나 우리에게 그 질문을 되묻게 한다.
영화 '변호인'에서 변호인 송우석은 파시즘을 애국이라 믿는 공안경찰 차동영 경감을 법정의 증인석에 세워놓고 “국가는 무엇입니까?”라고 묻는다. 차 경감이 머뭇거리는 사이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헌법 제1조 2항을 들며 “국가는 국민입니다”라고 스스로 답한다. 국민국가주의라고 칭할 수 있는 다원론적 국가관에 기초한 민주주의. 자유의 삶, 인간이 누려야하고 누릴 수 있는 고귀한 정체성을 지켜주는, 그리고 그래야하는 것이 국가다, 라는 이 명제는 제국주의와 세계적인 전쟁의 시대를 거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국가를 위해서 개인을 희생했던 과정을 정당화한다. 그들에게 국가는 곧 자신이며 자신의 정체성을 뚜렷하게 정의해줄 수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김이정을 만난 요시다가 경술국치 후 한국인이 모두 일본국민이 되었다는 사실과 행정적인 절차는 일본대사관에서 처리된다는 사실을 반박하는 김이정에게 이렇게 말한다.
그건 몰랐군요. 그렇지만 나는 일본인이 되겠다고 한 적이 없습니다. 이정의 말에 요시다가 웃었다. 언제부터 개인이 나라를 선택했지? 미안하지만 국가가 우리를 선택하는 거야. 요시다는 이정의 어깨를 툭 치고는 대통령궁으로 걸어들어갔다.
제국주의 시대엔 그랬다. 하루 아침에 국가가 바뀌고 나는 다른 국가의 국민이 되기도 했으며 식민국가가 되버린 조국에 의해 2등 국민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국제 질서와 이성의 시대 그리고 개인주의의 시대로 접어든 지금은, 개인의 선택과 결정에 의해 국가를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하지만 어떤 결정을 하든 우리는 '국민국가'의 한 사람으로서 어느 나라에 시민으로 구성되어야 한다. 김이정의 말대로 '죽은 자는 무국적을 선택'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디엔가 우리가 국민으로 선택되어져야 한다면, 그리고 그것이 개인의 결정일 수 있다면 어떤 곳에서는 그런 자유가 민족주의와 국가주의의 대립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종교와 인종과 국가가 일치하지 않는 나라들에서는 개인의 국민국가의 정의가 쉽지 않음을 발견할 수 있다.
국가보다 민족을 중시했던 독일의 철학자 피히테는 국가교육을 통해 국가정신의 영원성을 추구하고자 했다. 지역적, 계급적, 사회적 차이를 뛰어 넘어 획일화된 민족정신을 함양해 성스럽고 순결하며 영원한 국가를 만들고 싶었다. 그런 국가관은 과연 국민을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까. 나약하고 힘없는 나라의 백성들이 신산스럽고 험란하며 고통스러운 삶을 영위한다는 것은 고금의 역사가 증명해왔다. 정복전쟁에서 패배해 노예로 팔려가며 나라를 잃거나 식민지가 되여 수탈을, 혹은 민족말살이나 끔찍한 인종청소를 당하기도 했다. 지금도 나라를 잃고 떠도는 쿠르드족이나 로힝야족의 경우도 있다. 멕시코로 떠난 한인들도 소설에 등장하는 것처럼 여러 이유들 때문에 조국을, 가족을 떠나야했다. 그리고 새로운 곳에서 버터내며 개인의 삶을 지키고 살아남아 정착을 했다. 멕시코에서 살다가 죽었지만, 그들은 한국인이었다. 그것은 민족적 배타성이 갖는 순기능이다. 배타성의 반작용으로 갖게 되는 동질성과 집단의 소속감에서 오는 공동체적 연대감은 다른 문화로 타지에서 사는 사람들의 정신적 지지가 되어주었다.
하지만 그런 배타성은 또 다른 비극을 낳는다. 내게 순결한 聖戰은 누군가에게는 그저 침략일 뿐이고, 나의 민족의 안위만을 위해 다른 민족을 말살하는 것은 비극적 인종주의와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국민을 외부로부터 지켜주는 '안보국가'에서 국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민주국가', 국민의 삶을 좀 더 고귀하게 영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복지국가'로의 체계적 변화는 사람들의 철학적 발전과 그 궤를 같이 하며 세계적인 역사체계의 성숙으로 이어졌다. 물론 '복지국가'는 '민주국가'이며 '안보국가'이어야 한다. 그 요소들이 조화를 이루는 국가가 내 조국이기를 모두가 바랄 것이다.
그런 국가는 내가 사는 국가이여야 하고 또 내가 태어난 국가이어야 한다. 내가 성장기를 보내고 언어를 문화를 익힌 나의 나라, 내 부모가 태어났고 나를 만들었으며 내 가족을 구성하게 했던 의미로서의 국가, 그리고 내가 현재의 삶을 영위하는 국가가 그래야 한다. 국가간의 갈등이 개인의 선택과 자유에 반해서 억압되고 선택을 강요되어서는 안된다. 하지만, 현재 난민 문제나 무역갈등, 새로운 국제질서를 무력과 경제로 재편하려는 움직임들 때문에 그 배타성이 극도의 이기주의가 되어가는 현실이 이상적인 세계관과는 멀어져가는 현실이 결국 110여년 전 멕시코로 갔던 한인들의 상황과 별반 다르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이 씁쓸할 뿐이다. 세계의 국가들이 합리적 배타성 안에서 상호보완적인 국가관을 지향하는 길만이, 이역만리에서 사라져간 사람들과 지금도 본인들의 방식으로 '김치'를 만들어 먹는 멕시코 한인 후세들의 쓸쓸한 뿌리에 대한 역사적 서정에, 위안을 나눌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다.
자료참고: 미한사 http://mehansa.com/p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