詩와 나무
우산을 건네는 사람이 있다
그게 나는 아니다
모자를 쓴 사람이 있다
그건 나였을 수도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전할 수 없는 것을 전하려 할 때
뿌리가 깊어서
꺽이지 않는 나무구나
비는 오늘만 오는 것이 아니고
내일은 오지 않는 것도 아니어서
불투명한 얼굴
내일 또 공원에 갈 것이다
벤치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잠깐씩 어제를 생각할 것이다
어제는 구름같고, 쟁반같고, 빙하같고, 비탈 같고, 녹고 있는 소금같다. 햇빛에 투명해지는 초록같고, 안부를 묻는 부케같고, 부은 손 같다. 상한 빵 같고, 어랜 개의 솜털 같고, 바닥에 떨어진 동전 같다.
어제가 좋았는지 나빴는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어
공원 앞 찻집에 앉으면
또 생각하게 된다
어제는 많은 일이 있었다
어제는 어제를 버릴 수가 없었다
가방에 담긴 것이 무언인지 알 수 없게
묶어 둔 사람은 잊지 못하고
언제까지 착한 나무가 되어야 할까
얼마나 더 큰 나무가 되어야 할까
오늘은 기필코 가방을 열어보기로 한다
가방을 열어 보려고 손잡이를 잡는다
또 손잡이를
영원히 손잡이를 잡는다
영원히
이젠 다른 이야기가 하고 싶다
어제가 다 닳아서
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나누지 않고 돌보지 않고
아무도 돌아보지 않을 그런 이야기
누군가가
제멋대로 들어도 좋을 이야가
웃기지도 않을 이야기
그렇게 생각하면서
여행을 가서는 여행만 하고
돌아올 때는 돌아오기만 하고
집에서는 집에만 있었다
어제는
「폭우와 어제」
안미옥『지정석』(2019 64회 현대문학상 수상시집)
오늘도 창밖에는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
혼자 앉은 깊은 밤의 책상은 빗소리만 휘몰고 고즈넉하다.
무엇이 되려고도 무엇을 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다만
길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을 했을 뿐
몰운대의 꽃은 몰운대에 돌려주고
그렇게 어제의 길은 어제에 남겨두고
나를 그 길에 자꾸만 놓아두는 시간과 같이 내일을 걱정하며
한편으로 가슴한 켠 서늘해지는 그런 사람을 떠올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