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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쿨수 May 27. 2022

#19 2022.05.17

붉은 달과 함께 깨달은 독자적인 서사의 유일성

어느 순간부터 굳게 닫았던 마음을 누군가에게 열려고 하면 대상이 금방 다른 인연을 찾는 상황이 반복됐다. 그 비극을 보고 가까운 친구는 나의 축복이라고 농담했다. 함께 웃어넘겼지만 내심 일종의 저주같이 느껴져 서글펐다. 한번 더 묘한 법칙을 확인했던 하루, 어디에도 속할 수 없을 것 같은 외로움과 남들에게 평범한 행복이 욕심일 것 같은 확신이 큰맘 먹은 다짐을 초라하게 했다. 슬펐지만 생각보다 덤덤했다. 못난 아우의 마음을 알았는지 산책을 주로 반려하는 늙은 반려견이 웬일로 호수로 나서는 나를 따라 나왔다. 기쁜 마음으로 동네 한 바퀴를 돌고 댁으로 모셨다.


다시 호수로 나서며 삶을 찬찬히 들여다봤다. 모두에게 나름의 쓸쓸함은 있겠지만 어쩌면 내 인생이 운명적인 고독을 택하고 수용하길 기다렸나 싶었다. 그러다 문득 예전에 책 <무기력이 무기력해지도록>을 읽다가 알게 된 ‘Solitudine Solatium(Solace in solitude)’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라틴어로 ‘고독함의 위로’라는 의미인데 저자 한창수 교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내가 의도적으로 홀로 있음을 선택한 삶의 방식인 ‘고독 solitude’은 타인과의 연결이 끊어진 결핍 상태를 말하는 ‘외로움 loneliness’과는 다르다. 자의든 타의든 외로움을 통해 고독의 위안을 어느 정도 체득하고 누려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다 고독을 벗어나야 하는 때라고 느껴 나름의 용기를 냈고 결과적으로 더 큰 외로움으로 되돌아왔다. 사실 오늘뿐 아니라 한동안 내가 있어야 할 곳은 고립무원의 광야가 아닌가 생각하며 스스로 옭아맸던 것 같다. 


호숫가를 반쯤 돌다 어제 본 보름달을 생각하며 돌아봤는데 불그스름한 달이 휘영청 밝게 떠 있었다. 알고 보니 달이 지구 그림자에 가려지며 생기는 붉은 달은 일명 레드문이라는 현상이라고 한다. 산과 달이 거의 맞닿은 풍경과 호수 위 반짝거리는 윤슬에 감탄하며 잠시 서서 사진을 찍었다. 그런 나를 보고 발걸음을 재촉하던 몇몇 분이 함께 사진을 찍으셨다. 나와 별개일 수도 있지만 왠지 뭔가 뿌듯했다. 달은 참 많은 이들과 연대감을 허락한다. 

멈춰 뒤돌아 보니 어느새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일련의 일들과 고민이 너무 작게 느껴졌다. 모르는 사이 또 그만큼 품이 자랐나 보다. 막연하게 두려워했던 일들은 막상 겪으니 견딜 만했다. 얼마 전 자전거를 타다 생긴 상처는 새살이 돋으며 쓰라림과 간지러움을 동시에 준다. 모든 것엔 양면이 있고 단순성과 복잡성이 함께 깃든다. 자양분이 된 지난 일들을 뒤로하고 그냥 나에게 주어진 길을 꾸준히, 열심히 나아가야겠다는 각오를 다시 다졌다. 얼마 전 요즘 아끼는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12화에는 이런 명대사가 나와 진심을 담아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드라마란 주인공이 뭔가를 이루려고 무지 애쓰는데 안 되는 거래.


이따금 삶이 초라하게 느껴질 때면 독자적인 서사의 유일성을 깨닫는 게 힘을 준다. 때로 버겁지만 분명 언젠가 마음이 글로 범람하던 순간들을 한없이 그리워하겠지. 훗날 오랜 소망이 이뤄질지 모르지만 그건 그때의 일이다. 모든 시절은 나름의 아름다움을 내포한다. 지나고 보면 지금이 봄날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오늘, 여기에서 사랑하는 존재들과 삶 그 자체를 정성을 다해 추앙해야지! 나는 이미 좋은 드라마의 주인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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