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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알책수다

저작권 공소시효는 7년입니다.

by 말로

오래된 외장하드, 낯선 파일들


혹시 알고 계셨나요? 저작권 공소시효는 7년이라고 합니다.


며칠 전, 오랜만에 책장을 정리하다가 서랍 깊숙한 곳에서 외장하드 하나를 발견했어요. 검은색 플라스틱 케이스에 ‘2012’라고 적힌 스티커가 붙어 있었죠. 노트북에 연결해 보니, '미드', '일드', '영화모음' 같은 이름의 폴더들이 보이더라고요. 하나씩 열어보다가 추억에 젖는 감상적 기분도 잠시. 순간 멈칫하고 말았습니다.

10년도 더 전에 어둠의 경로로 다운로드하였던 영상 파일들이었거든요.


지금은 이 영상들이 법적으로 어떤 의미를 갖는지 대략 알고 있지만, 그 당시엔 저작권에 대한 인식이 지금처럼 분명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다들 그렇게 보던 시절이었고, 파일을 공유하는 게 나쁘다기보다 오히려 수집가의 취미처럼 여겨졌던 때였죠. 하지만 지금 다시 보면, 분명히 부끄럽고 누구에게도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없는 기억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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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소시효는 7년이니까, 이 정도면 괜찮겠지?"


속으로 던진 이런 안이한 농담은 이내 부끄러움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부끄러움의 정체를 알기 위해 데이비드 벨로스의 『이 문장은 누구의 것인가』와 정지우·정유경의 『이제는 알아야 할 저작권법』두 권의 책을 펼쳐 들었습니다.


한 권은 저작권의 역사와 제도적 맥락을 조명하고, 다른 한 권은 우리의 일상에서 저작권이 얼마나 가깝고 구체적인 문제인지를 친절하게 설명해 주는 책이었어요. 마치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이 두 권을 사이에 두고 마주 앉아 대화하는 기분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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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작권은 왜 필요한가,라는 질문부터


『이 문장은 누구의 것인가』는 저작권의 개념이 어떻게 생겨났고, 어떤 논의 속에서 지금의 제도로 자리 잡게 되었는지를 다루는 책입니다. 고대에는 저작자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고, 인쇄술의 발명 이후에야 저작물의 복제와 소유를 둘러싼 갈등이 시작됐다고 하죠. 18세기 영국에서 '앤 여왕법'이 제정되며 처음으로 저작자에게 법적 권리가 부여하게 됩니다.


이 책은 단순히 제도의 변천사를 설명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저작권이 창작자에게 어떤 심리적, 사회적 의미를 갖는지 진지하게 짚어줍니다.


무엇보다 저작권이 ‘창작자의 이름을 지켜주는 장치’라는 설명이 인상 깊었어요.

창작은 어딘가에서 파생된 것일 수 있지만, 그 안에 담긴 노력과 감정은 분명히 누군가의 것입니다.

그걸 지켜주는 최소한의 장치가 바로 저작권이라는 점을 책은 조용히, 그러나 분명하게 이야기합니다.


책은 저작권이 자본 논리에 따라 남용될 수 있다는 현실적 문제도 함께 다루지만, 오히려 그 비판은 제도의 원래 취지를 더욱 선명하게 드러내는 역할을 해줍니다. 창작자에게 권리를 돌려주기 위한 고민, 그 고민이 바로 이 책의 중심에 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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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생활에서 마주치는 저작권, 생각보다 가까운


『이제는 알아야 할 저작권법』은 법에 문외한인 사람도 쉽게 읽을 수 있는 구성입니다. 질문과 사례를 중심으로, 저작권이 어떤 원리로 작동하는지 하나하나 짚어줍니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들이 있어요:

독서모임이나 유튜브에서 책을 읽어주면 저작권 침해일까?

유튜브에 내가 직접 연주한 음악을 올려도 될까?

저작권료를 지불하고 만든 야구 응원가는 괜찮을까?

선생님이 출제한 시험문제를 판매해도 될까?


이런 많은 사례들은 ‘좋은 의도’나 ‘비영리 목적’이라는 익숙한 변명들이 법 앞에서는 얼마나 위태로운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유튜브 배경음악, 블로그에 올리는 인용문처럼 일상적인 행위 하나하나에 우리가 지켜야 할 경계가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특히 생성 AI나 NFT 같은 새로운 기술에 대한 논의는, 이 경계가 지금도 계속해서 변화하고 있음을 실감하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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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야기, '불꽃야구'


최근 ‘불꽃야구’라는 유튜브 콘텐츠가 저작권 문제로 영상 차단을 반복하고 있다는 뉴스를 접했습니다.

이 사건은 JTBC와 독립 제작사 간의 저작권 분쟁인데요, 핵심은 프로그램의 ‘포맷’도 저작물로 인정받을 수 있는가, 그리고 창작자가 누구인가에 대한 문제였습니다.


뉴스 속 그 갈등은 단순히 대기업과 제작사 사이의 다툼이 아니라, 이 시대의 콘텐츠 생산 구조와 창작자 권리에 대한 민낯을 보여주는 장면 같았어요.


"무엇이 누구의 것인가?"라는 질문은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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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장하드를 포맷하며 남긴 생각


저는 그 외장하드를 포맷했습니다.

그 안엔 제가 만들지도 않았고, 누군가의 허락도 받지 않았던 수많은 영상들이 들어 있었으니까요.

그건 단지 파일 몇 개를 지운 일이 아니라, 과거의 저의 무지를 비워내는 일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저는 무언가를 쓸 때, 이 문장이 과연 누구의 것인지 먼저 생각하려 합니다. 창작이란 세상의 수많은 조각들을 엮어 만드는 고된 일이며, 저작권은 그 관계를 존중하는 최소한의 약속임을 기억하면서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 생각을 떠올립니다.


저작권 공소시효는 7년일 수 있어도, 창작자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에는 시효가 없습니다. 저작권은 법의 문제가 아니라, 문명을 지켜나가는 우리의 태도이자 선택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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