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 종이달

나를 여기서 나가게 해줘요

by 말로
종이달
가쿠다 미쓰요 / 예담


미야자와 리에 그리고, Santa Fe…


학창 시절 당시 한 명의 일본 여배우 누드집이 세간에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어렴풋이 기억을 떠올려 보면 특정 문양으로 구멍 나 있는 문 뒤에 청초한 얼굴을 하고 절묘하게(?) 서있던

미야자와 리에가 떠오른다.


그랬던 그녀가 40대 중반의 얼굴을 하고 오랜만에 “종이달”이라는 영화로 스크린에 모습을 드러냈다.

물론 그동안도 나 모르게, 굳이 알려줄 필요가 없겠냐만은.. 나름 열심히 활동했겠지만, 내가 굳이 신경을 쓰지 않았기에 이 영화는 나에게 있어 Santa Fe 소녀의 소환이었다.


영화 포스터

미야자와 리에라는 반가운 이름과 뭔가 있어 보이는 듯한 제목이 주는 호기심에 영화를 봤는데,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아무런 사전 지식이 없이 봐서 그런지, 오래간만에 일본 영화가 주는 차분한 느낌이 새로웠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스토리, 메시지, 연기, 색감 등 모든 것이 만족스러웠다. 미야자와 리에가 어떻게 변했을까로 시작한 호기심은 우메자와 리카(극 중 주인공)의 도피의 끝이 어떻게 될 것인가로 궁금증이 전이되고 있었다.


영화를 본 이후에도 뇌리 속에 장면 장면이 떠나질 않고, 이 영화가 나를 놓아주지 않는구나 라는 생각마저 들게 했다. 그렇다면 영화의 원작은 어떻게 표현되어 있을까 하는 전혀 나 답지 않은 궁금증이 생겨 끝내 원작 소설까지 찾아보게 되었다.





원작 가쿠다 미쓰요. 일본 소설을 거의 보지 않는 나로서는 여느 작가와 마찬가지로 익숙하지 않지만, 책날개 작가 소개를 보니 일본 내에서는 문학상이란 상은 모두 휩쓴 듯했다.

그녀의 작품 중 “공중정원”이라는 작품 제목이 유달리 익숙하여, 읽어나 싶어 찾아보니 보아 노래 제목과 같더라. 역시 이 작가의 소설은 “종이달”이 처음인 것이다.


책 표지

소설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유복한 가정에서 자란 41세의 우메자와 리카라는 여성은 평범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가다가, 삶의 회의와 상실감 속에서 사소하면서도 우연한 사건과 연하남 히라바야시 고타와의 만남으로 근무하던 은행에서 고객들의 예금 1억 엔을 횡령하고 해외로 도피하는 평범하지 않은 삶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뛰어난 심리묘사와 주인공의 감정이입이 되는 문체로 물 흐르듯이 그려가고 있다.


어떻게 보면, 흔하디 흔한 통속적인 불륜과 현실 속에 뉴스에서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금융사기로 후려쳐서 정리할 수도 있겠으나, 이 단순한 스토리라인으로 작가는 몇 가지 감상의 레이어를 만들어 우리들에게 생각할 거리를 던지고 있다.





왜, 리카는 감당하지도 못할 액수의 공금을 횡령하여 낯선 치앙마이의 스콜 속을 헤매고 다니게 되었을까?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평범한 현실로 되돌아 올 수 없는 길로 들어서게 한 것일까?

공급 과잉 시대에 살고 있는 현대인에게 쇼핑과 물질이란, 그리고 이를 소유하기 위한 돈이란 어떤 의미인가?


주인공 리카의 횡령사건은 단순히 숫자가 적혀있는 종이 자체를 소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돈을 쓰면서 느끼는 묘한 해방감, 그리고 이를 통해 느껴지는 자존감과 타인과의 관계에서의 자의식 등 단순한 소유욕과 물욕이라고 몰아넣기에는 그 이상의 무엇이 존재한다.


또한, 고타(불륜의 연하남)와의 관계는 사랑과 욕정의 채움을 넘어서, 본인의 일탈을 정당하고 행위 자체에 몰입할 수 있게 하는 촉진제 역할을 하고 있다.


고타와 첫 관계 후에 그녀가 느낀 만능감이라는 감정이 이를 잘 표현해주고 있다.

역의 플랫폼에는 사람이 없었다. 리카는 긴 의자에 앉아 전철을 기다렸다. 파르스름한 하늘에 하얀 달이 남아 있었다. 갑자기 리카는 손가락 끝까지 가득 차오르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만족감이라기보다는 만능감萬能感에 가까웠다. 어디로든 가려고 생각한 곳으로 갈 수 있고, 어떻게든 하려고 생각한 것을 할 수 있다. 자유라는 것을 처음으로 손에 넣은 듯한 기분이었다. 리카는 죄책감도 불안감도 전혀 느끼지 않고, 인적 없는 플랫폼에서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그 만능감의 쾌락에 잠겼다.

만능감이라는 익숙치 않은 단어가 묘하게 귓가를 계속 맴돌고 있다.

마치 여름밤 모기 비행 소리에 잠을 깨듯…



과거 일본에서는 초승달 모양의 가짜 달을 만든 배경에서 가족이나 연인과의 추억을 사진으로 남기기도 했다고 한다. 즉, 종이달은 인생에 있어 가장 행복했던 한때, 하지만 허상의 삶을 은유하는 그 이상의 표현이 없을 멋진 제목이다.


영화와 소설이 동시에 존재하는 스토리가 보통은 한쪽으로 선호도가 기울게 마련이지만, “종이달”은 영화는 영화대로, 소설은 소설대로 각기 다른 매력을 발산하며 다른 감정선을 건드리고 있는 수작이라고… 감히 평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