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여든을 바라보신다.
“하루 세 번 예불하다 보면 시간 금방 간다.”
일 없으면 전화도 않고, 적적하다 하소연 한번 없으시다. 이미 세상에 대한 집착이나 욕심을 놓아버린 것 같다.
딸은 가끔 엄마의 그런 해탈한 듯한 모습이 서운하다. 엄마란 세상살이 버거울 때 안부전화인 체 목소리라도 듣고 싶은 사람이기에, 이제 모든 것 탈탈 털어버린 노년의 자세에 깊은 안도감을 느끼면서도 아쉬운 이기심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말과 마음이 따뜻한 어르신을 만나면 어리광 비슷하게 기대고 싶을 때도 있다.
2013년 8월의 나.
여름의 유난한 더위를 이기는 내 나름의 비법은 콩국수이다. 신기할 정도로 콩국수만 당겨, 집에서나 출근 후 점심 사 먹을 때 줄기차게 콩국수만 고집했다. 내가 즐기는 가게는 희주네칼국수이다.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는 말도 많지 않고, 썩 친절한 편도 아니지만 쓸데없이 말 많은 사람보다 이쪽이 편하다. 나는 아주머니가 고개를 갸웃거리지 않을까 싶을 정도로 올여름 이 집을 드나들었다. 더위에 지치면 이 집 콩국수만 먹을 수 있을 만큼의 식욕밖에 남지 않았다.
아주머니의 콩국수는 아무 잡맛이 없다. 콩을 갈고, 칼국수면이 꼬들꼬들하게 살도록 삶아 오이채만 고명으로 얹어 얼음 두세 개 띄워줄 뿐이다. 나는 소금 작은 스푼 하나쯤 넣고, 휘휘 저어 열무김치와 김치를 곁들여 면과 국물까지 싹싹 그릇 바닥이 보이도록 비웠다.
콩국수철이 지나도 나는 희주네를 드나들었다. 가을에는 청국장을, 겨울에는 된장찌개를 먹었고, 바쁠 때는 김밥이나 주먹밥을 사다 먹기도 했다. 집밥 같은 음식이 맛이 있어 드나들기 시작했고, 한 번 단골을 정해두면 밥집이나 은행이나 상점이나 핸드폰 회사까지 모두 특별회원이 될 정도로 그것만 꼬박 사용한다.
두세 계절이 지나도록 아주머니도 나도 별말이 없었다. 대신 음식으로 그분은 내게 정을 더했다. 정식을 시켜도 원래 메뉴에는 없는 듯한 계란프라이라도 하나 더 해주고, 내가 좋아하는 나물 반찬도 가지가지 듬뿍 담아내어 주었다.
전화로 주문해 놓고 바삐 가서 먹을 때면,
“천천히 밥 먹을 시간도 없어서 어쩌나?”
하기도 했고,
일 마친 후 밤 9시경 가서 저녁을 주문하면,
“이 시간까지 밥도 못 먹고.”
하며 뒷정리하고 문 닫으려던 손길을 멈추고 뜨끈뜨끈한 찌개를 끓여 주었다.
자주 찾다 보니 좁고 허름한 가게임에도 동네의 개업의나 부동산 가게 점잖은 아저씨들, 주위에서 가게를 하는 부부들도 더러 마주치기도 했다. 희주네는 늘 손님이 가득했다.
가만 보니, 이 집을 찾는 사람들이 아주머니를 부르는 호칭이 아줌마가 아니다.
“형님 나 가요.”
“아이고, 한 그릇 잘 먹고 놀다 가요.”
친구 집이나 이웃에 놀러 온 듯한 분위기다.
모두 아는 사이인 손님들은 밥 먹으며 하소연도 하고, 누군가의 재미난 뒷담화를 하며 웃기도 하는 동네 사랑방이었다. 귀동냥으로 듣는 이야기들에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미소 지을 때도 있다.
마침내 나는 지난겨울 어느 날 늦은 밤 식사를 마치고 나오며,
“친정어머니가 멀리 계신데, 이 집밥이 꼭 엄마 밥 같아요.”
하며 아주머니에게 감사한다.
나는 친정엄마 밥을 먹어본 지 아주 오래되었다.
며칠 전 한창 사춘기라 엄마 속 꽤나 썩이는 녀석들과 수업 중 우연히 개인적인 대화를 할 시간이 있었다.
“엄마를 슬프게 하는 사람치고 잘 되는 것 못 보았다.”
짐짓 한 녀석 들으라고 한 말이 녀석을 찔리게 만든 모양이다.
“왜냐? 사람의 기본이 안 되어 있으니까.”
녀석의 얼굴 표정이 달라지는 걸 보며, 되려 내가 뜨끔한다.
그러는 난?
엄마의 밥을 그리워하면서도 이제 내 밥이 더 입에 맞고, 엄마 밥 먹으러 김해까지 가기는 너무 바빠 대신 돈만 보낸다.
엄마는 나 때문에 슬프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