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시대의 사랑 3부 (1)
부끄러움
그대 익숙한 슬픔의 외투를 걸치고
한낮의 햇빛 속을 걸어 갈 때에
그대를 가로막는 부끄러움은
떨리는 그대의 잠 속에서
갈증난 꽃잎으로 타들어가고
그대와 내가 온밤내 뒹굴어도
그대 뼈 속에 비가 내리는데
그대 부끄러움의 머리칼
어둠의 발바닥을 돌아 마주치는 것은 무엇인가
73년 대학교 3학년인 시인의 시. 70년대 청춘은 부끄러울 때가 많았다. 시대와 나라에 갈증을 느껴 타들어갔고, 친구들이 잡혀갈 때면 슬픔과 부끄러움을 느꼈다. 아마도 시인은 개인적인 사랑의 슬픔보다는 젊은이로서의 슬픔, 시대의 어둠을 노래하고 싶었을 것이다. 시인의 익숙한 어둠의 시어인 [슬픔, 부끄러움, 뼈, 비, 어둠]들이 보인다.
그러나, 최승자의 부끄러움과 슬픔들의 원천은 근본적으로 외부로부터 오는 것은 아니다. 자기 안에 있는 것들을 끊임없이 끄집어내고 내던져 확인하는 것이다.
내력
닿을 길 없이 무수히 떠나는 그림자를 좇아
한 마리 미친 말을 타고 달리는 그대
그대 의식의 문 뒤에서 숨어 우는 자유와
달빛에도 부끄러운 생채기마저 이야기하라.
긴긴 뼈앓이하는 밤바다에서
피묻은 부리로 상징을 물고 돌아오는 백조
감성의 늪에서 부끄러운 울음우는
짐승에 대해 다시금 이야기하라.
나는 짐승이다.
스무 살, 시대의 짐승이다.
간혹 자유를 맛보긴 해도 내 <감성의 늪에서 부끄러운 울음> 울 때가 많은 <뼈앓이 하는> 짐승이다.
허무와 절망은 젊은이의 이유없는 특권이기도 하다. 돌아서면 부끄러운.
2010년의 최보식과의 인터뷰에서 최승자는 말한다.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0/11/21/2010112101107.html
“허무와 절망은 내 운명이었어요. 문학은 슬픔의 축적이지, 즐거움의 축적은 아니거든요. 젊은 날 나는 무의식적으로, 충동적으로, 비명(悲鳴)처럼 시를 써왔어요. 세상이 따뜻하고 정상적으로 보이면 시를 못 쓰게 되지요. 그건 보통 사람의 세상으로 들어가는 것이니까요.”
정상 비정상의 그 경계가 지독하게 아름다웠지만, 결국 그녀는 정신병에 걸린다. 그 궤적을 지금 나는 찾아가고 있다.
봄밤
적막히 녹아드는 햇빛 소리만
굴러다니는 비인 바람 소리만
실은 겨우내 말라붙은 꿈을 적시며
오늘밤 어질머리 푸는 비의 관능을
떠도는 발들의 아픔을
어둠 속 잇몸들의 덧없는 입맞춤 사이
밤새 홀로 사무치는 머리칼 사이
실은 고적한 곳으로 흘러가는 마음을
조금씩 서걱이며 부서지며
아직도 남아 있는 부끄러운 뼈를
* 어질머리 -> 어질병: 머리가 어지럽고 혼미하여지는 병
* 뼈 : 자아
<그대>가 첫 시에서 세 번째 시까지 나타나고 있다.
아직은 부끄럽고, 고적한 모습 속에서 드러나는 그대는 앞으로 어떤 모습으로 나타날까.
봄밤, 내리는 비에는 부끄러움, 외로움과 슬픔 같은 감정의 범람을 달래주는 무엇이 있다.
시인은 그대에게 <오늘밤 어질머리 푸는 비의 관능을 / 떠도는 발들의 아픔을> <실은 고적한 곳으로 흘러가는 마음을> <아직도 남아있는 부끄러운 뼈를> 적셔달라고 한다.
이 구절들에 시선이 오래 머문다.
오늘 밤 이런 위로의 비가 다시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