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혁주의 관점에서 바라 본 성화, 지식, 그리고 열심.
오늘날 교회 안에는 여러 유형의 교인들이 존재한다. 사람은 저마다 모습과 성격이 다르고, 주님이 허락하신 은사 또한 다르기에, 교인마다 저마다의 특색이 있는 것은 당연할 것이다.
하지만 교인, 즉 교회를 다니는 사람들 중에는 '성도'도 있지만 '성도가 아닌 자'도 있다(마 13:24–30; 마 13:47-48 등).
이번 칼럼에서는 참된 성도와, 성도의 모습을 보이나 아직 '거듭나지 않은 교인'을 대표하는 가상의 두 유형에 빗대어서 참된 영적 성장(성화)의 표지가 무엇인지 되짚어보고자 한다.
교회에는 뚜렷이 대조되는 두 가지 유형의 교인들이 존재한다. 첫 번째 유형(Type A)은 하나님의 말씀과 진리를 깊이 알고자 갈망하며, 그 지식 속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고, 삶의 변화를 경험하는 그리스도인이다. 이들은 "지혜와 계시의 정신"으로 하나님을 더 알기를 갈구하고(엡 1:17), "은혜와 우리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라"(벧후 3:18)는 명령에 순종하며 성장한다. 하나님의 뜻과 나라와 그 의에 대한 열정이 있으며, 이 열정은 진리에 대한 깊은 이해에서 흘러나온다.
반면 두 번째 유형(Type B)은 그러한 진리 추구 없이도 찬양 집회나 은혜로운 체험에만 열심을 내는 모습을 보인다. 말씀 지식은 얕지만 감정적인 열정으로 "은혜 받았다"는 말을 반복하며, 여기저기 집회를 쫓아다닌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려는 모습이 거의 보이지 않으며, 성경 공부나 교리 학습에는 관심이 적고 오직 체험적 경험만을 추구한다.
이러한 대조는 단순한 '지성 대 감성'의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아는 진리의 깊이에서 오는 열매와 진리 없이 종교적 열심만 있는 상태를 비교하는 것이다. 개혁주의/칼빈주의 구원론의 관점에서 볼 때, 이 두 유형은 '건강한 성화'와 '영적 불균형(또는 미성숙)'의 대조를 보여준다. 본 칼럼은 개혁주의 조직신학의 토대 위에서 이 문제를 깊이 탐구하고자 한다.
성경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바르게 아는 지식의 중요성을 반복해서 강조한다. 구약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에게 명확하게 선언하신다:
[호 6:6]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치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이 구절은 단순히 제의적 행위보다 관계적 지식을 우선시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겉모습의 열심보다 하나님을 참으로 사랑하고 아는 것을 원하신다는 하나님의 마음을 드러낸다.[1]
이스라엘은 제사는 열심히 드렸다. 그들은 종교 의식에 참여하는 것에 있어서 게으르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의 이러한 열심을 책망하셨다. 왜냐하면 그들이 하나님을 참으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1-1]
호세아 4장 6절은 이 문제의 심각성을 더욱 분명히 한다:
[호 4:6]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 네가 지식을 버렸으니 나도 너를 버려 내 제사장이 되지 못하게 할 것이요 네가 네 하나님의 율법을 잊었으니 나도 네 자녀들을 잊어버리리라
여기서 '지식'은 단순한 정보나 사실의 축적이 아니라, 언약적 관계 안에서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것을 의미한다.[1-2]
예레미야 선지자도 이 주제를 계속해서 다룬다:
[렘9:23-24] 23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24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모든 자랑거리보다 우선하며, 이것이 신자의 궁극적 목표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약에서도 이 원리는 더욱 명확하게 나타난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동족 유대인들에 대해 안타까워하며 이렇게 말했다:
[롬 10:2]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바울은 유대인들의 열심 자체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는 그들의 열심이 올바른 지식에 근거하지 않았기 때문에 결국 잘못된 방향으로 흐르고 있음을 지적한다. 지식 없는 열심은 아무리 뜨겁고 진실해 보여도 결국 하나님께 합당한 예배와 순종으로 이어지지 못한다.
예수님 자신도 이 원리를 명확히 가르치셨다. 요한복음 17장 17절 대제사장의 기도에서, 그분은 제자들을 위해 이렇게 기도하셨다:
[요 17:17] 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
이 기도는 거룩하게 되는 것이 진리와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준다. 즉 진리가 없이는 성화도 없다. 말씀이 진리이며, 그 진리를 통해 우리는 거룩하게 된다. 단순한 감정적 체험이나 종교적 열심으로는 참된 성화가 일어날 수 없다.
예수님은 또한 요한복음 4장 23-24절에서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영과 진리로'라는 표현은 예배가 두 가지 축을 모두 필요로 함을 시사한다. '성령의 역사'와 '진리의 지식'이 함께 가야만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참된 예배가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두 축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온전히 세워진다.
구약의 쉐마(Shema)는 이스라엘 신앙의 핵심을 담고 있다:
[신 6:5] 너는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라
예수님은 이 계명을 인용하시면서 한 가지를 더 추가하셨다:
[마 22:37]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여기서 '뜻을 다하여'라는 표현은 헬라어로 '디아노이아'(διάνοια)인데, 이는 '지성', '이해력', '사고 능력'을 의미한다.
이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단순히 감정적인 것만이 아니라 지적인 차원을 포함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마음으로, 감정으로, 의지로, 그리고 지성으로 하나님을 사랑해야 한다. 전인적 사랑은 전인적 헌신을 요구하며, 여기에는 반드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추구가 포함된다.
존 칼빈의 『기독교 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는 개혁주의 신학의 가장 중요한 텍스트 중 하나이다. 흥미롭게도, 1536년 초판의 부제는 "경건의 총화를 담고 있다"(Containing the whole sum of piety)였다.
여기서 '경건'(pietas)이라는 단어는 칼빈에게 있어서 단순히 종교적 감정이나 영적 체험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칼빈은 경건을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식이 불러일으키는, 사랑과 결합된 하나님에 대한 경외"로 정의했다.[2]
이 정의에서 우리는 칼빈이 지식과 경건을 어떻게 연결시켰는지 볼 수 있다. 경건은 지식에서 시작된다. 하나님의 은덕(그분의 선하심, 자비, 은혜)을 아는 지식이 우리 안에 사랑과 경외를 불러일으킨다.
지식 없는 경건은 헛된 경건주의이며, 경건 없는 지식은 죽은 정통주의에 불과하다.
『기독교 강요』는 이렇게 시작한다:
"우리의 지혜는, 그것이 참되고 견고한 지혜로 여겨지는 한, 거의 전적으로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과 우리 자신에 대한 지식."[3]
칼빈에게 있어서 참된 지혜는 하나님을 아는 것에서 시작하며, 이 지식을 통해 우리는 우리 자신을 바르게 이해하게 된다. 그는 신학이 단순히 교리의 체계가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그 지식에서 흘러나오는 경건한 삶의 통합임을 강조했다.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제13장은 성화에 관하여 명확하게 가르친다:
"하나님께 효과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성도들은 여전히 죄의 남은 부패함을 지니고 있지만, 그들은 그 안에 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공로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참으로 거룩하게 되며 개인적으로 온전하게 된다."
이 고백에서 주목해야 할 핵심은 "그의 말씀과 성령으로 말미암아"(by His Word and Spirit)라는 구절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성령의 역사와 말씀의 역사를 분리하지 않는다. 성령은 말씀을 통하여 역사하시며, 말씀 없는 성령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4] 이것은 개혁주의 신학의 일치된 견해이다.
R.C. 스프로울(R.C. Sproul)은 자신의 경험을 나누면서 이렇게 고백했다:
"성령께서는 결코 말씀을 거스르지 않고 언제나 말씀과 함께, 말씀을 통해 일하신다. 그러므로 나는 말씀에 따라 살아야 한다."[5]
참된 성령 충만은 말씀에 대한 충만과 대립되지 않고, 도리어 ’말씀을 풍성히 거하게 함‘으로 나타난다. 골로새서 3장 16절("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과 에베소서 5장 18-19절("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며")을 비교해 보라. 두 구절은 동일한 결과(찬양과 감사)를 제시하지만, 하나는 ‘그리스도의 말씀이 풍성히 거함'으로, 다른 하나는 '성령 충만'으로 표현한다. 이것은 참된 성령 충만이 말씀 충만과 분리될 수 없음을 시사한다. 성령충만은 '말씀충만'이자 '예수충만'이다.
개혁주의 신학은 믿음을 정의할 때 세 가지 요소를 포함시킨다: 지식(notitia), 동의(assensus), 신뢰(fiducia).[6] 이 세 요소는 모두 필수적이며, 어느 하나라도 결여되면 참된 믿음이라 할 수 없다.
첫째, 지식(notitia) 은 복음의 내용에 대한 인지적 이해를 의미한다. 우리는 우리가 믿는 대상에 대해 무언가를 알아야 한다. 완전히 모르는 사람을 신뢰할 수는 없다. 예수님은 요한복음 8장 24절에서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라고 경고하셨다. 예수님이 누구신지(그가 '그'이심, 즉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이심)에 대한 바른 지식과 믿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7] (물론 이 지식조차 성령님께서 깨닫게 해주신다)
둘째, 동의(assensus) 는 그 복음의 내용이 참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지식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마귀들도 하나님이 한 분이신 줄을 알고 떤다(약 2:19). 그러나 그들은 그 진리에 동의하지 않으며, 그것을 받아들이기를 거부한다.
셋째, 신뢰(fiducia)는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전적으로 의지하고 그분께 자신을 맡기는 것이다. 이것이 믿음의 핵심이다. 그러나 이 신뢰는 지식과 동의 없이는 맹목적 도약이 되고 만다.
이 세 요소를 통해 우리는 개혁주의가 왜 지식을 강조하는지 이해할 수 있다. 올바른 복음의 내용을 아는 지식이 없이는 참된 믿음도 있을 수 없다.[7-1] 이는 ‘구원 얻는 회심’부터가 어느 정도의 교리적 진리 이해를 수반해야 함을 보여준다. 바울은 디모데후서 2장 25절에서 회개를 "진리를 아는 데 이르게 하심"과 연결시킨다. 구원의 시작은 진리의 깨달음과 분리되어 있지 않으며, 구원의 진행인 성화도 "진리를 순종함으로 영혼을 깨끗하게" 하는 과정이다(벧전 1:22).
앤서니 후크마(Anthony Hoekema)는 그의 저서 『개혁주의 구원론』(Saved by Grace)[8]에서 성화의 수단을 다루면서 말씀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후크마는 성화가 성령의 사역이지만, 성령은 도구 없이 역사하시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통해 역사하신다는 점을 분명히 한다.
후크마는 요한복음 17장 17절("그들을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 아버지의 말씀은 진리니이다")을 인용하며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통해 거룩함에 있어 성장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말씀(지식)을 통해 하나님이 누구신지,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깨달아 가는 과정이 없다면, 아무리 찬양을 많이 부르고 집회에 참석해도 거룩해질 수 없다. 진리가 없으면 성화의 '재료'가 없는 셈이기 때문이다.
후크마는 또한 골로새서 3장 10절을 주목한다:
[골 3:10]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이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니라
거듭난 '새 사람'은 단순히 감정만 뜨거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영역까지 갱신된 존재이다. "새롭게 하심을 입은"(being renewed)이라는 표현이 현재 시제임에 주목하라. 이것은 지속적인 과정이다. 즉,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려는 지속적인 과정이 없다면, 그가 진정으로 '새 사람'을 입고 성화되고 있는지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로마서 12장 2절은 성화의 메커니즘을 명확하게 제시한다: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이 구절에서 주목해야 할 두 가지가 있다. 첫째, 변화는 '마음(nous, 지성)을 새롭게 함'으로 일어난다. 여기서 '마음'은 헬라어 '누스'(νοῦς)로,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사고방식, 세계관, 지적 판단 능력을 포함한다.[9] 성화는 우리의 생각이 변화되는 것에서 시작한다.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우리가 어떻게 사느냐를 결정한다.
둘째, 이 마음의 새로움의 목적은 하나님의 뜻을 '분별하는' 것이다. 분별(dokimazō)은 시험하고 검증하며 판단하는 지적 활동을 의미한다.[9-1] 말씀을 통해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 '분별(지식적 작용)'하지 않고서는 참된 변화(성화)가 일어날 수 없다. 단순히 집회 분위기에 젖어 있는 것은 '마음을 새롭게 하는 것'과는 다르다.
후크마는 이 구절을 통해 성화가 "삶에 대한 총체적인 태도의 갱신을 통해 내적으로 계속해서 변화를 받는 것"이라고 설명한다.[8-1] 이것은 일회적 체험이 아니라 지속적 과정이며, 그 과정의 핵심에는 말씀을 통한 사고방식의 변화가 있다.
신클레어 퍼거슨(Sinclair Ferguson)은 그의 논문 "The Reformed View of Sanctification"에서 이렇게 말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거듭남에서 일어나는 최초의 깨끗케 하심(요 15:3)과 전 기독교인의 삶을 통해 계속되는 성화(요 17:17) 둘 다의 도구이다. 하나님은 성경을 사용하신다. 그것은 '성령의 검'(엡 6:17)이다. 그것으로 우리의 삶이 변화된다. 성경은 바로 이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며,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딤후 3:16) 우리를 온전케 한다. 그것은 마음을 가르치고, 명확한 사고를 소개하며, 양심에 알리고, 우리를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9-2]
이 인용문은 성령의 사역과 말씀의 역할 사이의 관계를 명확히 한다. 성령은 말씀이라는 '검'을 사용하신다. 말씀은 단순히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가르치고, 사고방식을 바꾸며, 양심을 깨우고, 삶을 하나님의 뜻에 일치시키는 능력을 가진 살아있는 도구이다.
베드로도 같은 원리를 가르친다:
[벧전 1:22-23] 22 너희가 진리를 순종함으로 너희 영혼을 깨끗하게 하여 거짓이 없이 형제를 사랑하기에 이르렀으니 마음으로 뜨겁게 서로 사랑하라 23 너희가 거듭난 것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영혼의 깨끗함, 즉 성화는 '진리를 순종함'으로 일어난다. 진리를 알지 못하면 순종할 수도 없고, 순종하지 않으면 깨끗해질 수도 없다.
개혁주의 성화론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성화를 점진적(progressive)이고 전인적(holistic)인 과정으로 본다는 것이다.[10]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13장 1절은 성화가 "점차적으로 성장한다"고 명시한다. 성화는 순간적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전 생애에 걸쳐 지속되는 과정이다.
또한 성화는 인격의 모든 부분에 영향을 미친다. 에베소서 4장 22-24절은 이렇게 가르친다:
[엡 4:22-24] 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따르는 옛 사람을 벗어 버리고 오직 너희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여기서 '심령'(헬라어 pneuma)은 단순히 감정이나 의지만을 의미하지 않고, 인간 존재의 깊은 곳, 즉 우리의 사고방식, 가치관, 세계관을 포함하는 내면의 중심을 의미한다.[8-2] 성화는 이 심령이 새롭게 되는 것이며, 이것은 지식과 의지와 감정이 모두 변화되는 총체적 과정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혼란을 바로잡으며 영과 지성의 균형을 가르친다:
[고전 14:15] 그러면 어떻게 할까 내가 영으로 기도하고 또 마음으로 기도하며 내가 영으로 찬송하고 또 마음으로 찬송하리라
여기서 '마음'(nous)은 지성, 이해력을 의미한다.[11] 바울은 예배에서 영적 열정(영으로 기도함)과 인지적 명철함(마음으로 기도함)이 함께 가야 함을 강조한다. 한쪽 요소 없이 다른 쪽만 있는 예배는 불충분하다. 19절은 더욱 강력하게 이 원리를 적용한다:
[고전 14:19] 그러나 교회에서 내가 남을 가르치기 위하여 깨달은 마음으로 다섯 마디 말을 하는 것이 일만 마디 방언으로 말하는 것보다 나으니라.
바울이 방언을 반대한 것이 아니다(그는 18절에서 자신이 방언을 더 많이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교회의 덕을 세우는 데 있어서 이해 가능한, 명료한, 교훈적인 말씀이 얼마나 중요한지 강조한다. 감정적으로 고양되고 영적으로 열정적인 것은 좋지만, 만약 그것이 이해와 교훈을 동반하지 않는다면 교회를 세우는 데 제한적이다.
케빈 드영(Kevin DeYoung) 목사는 그의 글에서 이렇게 주장한다:
"가장 지속되는 열정은 신학적 교리와 하나님에 대한 참된 지식에 뿌리박을 때 나온다. 처음의 강렬한 감정은 시간이 지나면 식을 수 있지만, 하나님을 더 깊이 알아갈수록 그분에 대한 사랑과 열정은 더욱 성숙하고 지속 가능한 형태로 발전한다."[12]
이것은 결혼 관계에 대한 비유와 유사하다. 처음의 열정과 흥분만으로는 50년의 결혼 생활을 유지할 수 없다. 그러나 배우자를 더 깊이 알아갈수록, 그의 성품과 가치관과 마음을 이해할수록, 사랑은 더욱 깊어지고 성숙해진다.[12-1] 마찬가지로, 하나님과의 관계도 아는 만큼 더 사랑하게 되고, 그 사랑은 오래 지속된다.
따라서 평생토록 감정적 체험만 있고 진리 지식에는 전혀 자라지 못한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성화의 모습이 아니다. 베드로후서 3장 18절은 명령한다:
[벧후3:18] 오직 우리 주 곧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 가라 영광이 이제와 영원한 날까지 그에게 있을지어다
은혜에서 자라는 것과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는 것은 분리되지 않는다. 참된 은혜의 성장은 언제나 지식의 성장을 동반한다.
J.C. 라일(J.C. Ryle)은 그의 글 "Beware of Zeal Without Knowledge"에서 맹목적 열심의 위험을 이렇게 경고한다:
"빛 없는 열심은 매우 위험한 것이다. 그것은 종종 큰 해악을 끼친다. 열정적이되 무지한 사람들은 신앙의 역사에서 가장 큰 문제를 일으켰다. 그들의 열심은 종교 재판, 박해, 분열을 가져왔다. 우리는 열심과 함께 빛을, 열정과 함께 진리를 간구해야 한다."[13]
라일은 역사를 통해 잘못된 열심이 어떤 결과를 가져왔는지 지적한다. 십자군 전쟁, 종교 재판, 마녀 사냥 등은 모두 열심은 있었으나 올바른 지식이 없는 사람들에 의해 자행되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을 위해 헌신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진리에서 벗어난 광신이었다.
물론 이것이 모든 Type B 그리스도인이 이단이나 광신자가 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진리의 뿌리가 없는 열심은 언제든지 잘못된 방향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분명 이런 상태를 책망한다. 이사야 29장 13절에서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사 29:13] 주께서 이르시되 이 백성이 입으로는 나를 가까이 하며 입술로는 나를 공경하나 그들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났나니 그들이 나를 경외함은 사람의 계명으로 가르침을 받았을 뿐이라
예수님도 이 구절을 인용하시며 헛된 경배를 책망하셨다(마 15:8-9; 막 7:6-7).
J.I. 패커(J.I. Packer)는 그의 고전적 저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에서 중요한 구분을 제시한다. 그는 하나님에 대한 개념적 지식(knowledge about God)과 하나님을 인격적으로 아는 지식(knowledge of God)을 구분한다.[14]
전자는 하나님에 관한 교리적, 신학적 정보를 아는 것이다. 후자는 하나님과의 인격적 관계 속에서 그분을 경험적으로 아는 것이다. 패커는 이 두 가지가 구분되지만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한다. 우리가 배운 각종 진리들을 하나님 앞에서 묵상하여 기도와 찬양으로 바꿀 때, 비로소 머리로 아는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가슴으로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전환된다.
이것이 바로 Type A 그리스도인이 보여주는 모습이다. 그들은 단순히 신학 지식을 축적하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그 지식을 통해 하나님을 더욱 깊이 만나며, 그 만남은 다시 하나님을 더 알고자 하는 갈망을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지식과 체험의 선순환이다.
반면 Type B의 위험은 이 선순환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체험'은 있지만 그것이 진리의 지식으로 심화되지 않으며, 따라서 그 체험은 피상적이고 변화 없는 반복에 머물 위험이 있다.
앤서니 후크마의 분석에 따르면, Type B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성화의 주요 수단이 결여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화는 성령의 사역이지만, 성령은 진리를 통해 역사하신다.[8-3] 말씀에 대한 갈망과 추구가 없다면, 성령께서 사용하시는 주요 도구가 부족한 것이다.
이것은 마치 농부가 씨앗 없이 추수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 성장을 주시지만, 그 성장은 씨앗이 심어질 때 일어난다. 말씀을 듣지 않고, 배우지 않고, 묵상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믿음이 자랄 수 있겠는가?
골로새서 3장 10절은 새 사람이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입은 자"라고 명시한다. 이것은 거듭남의 본질적 특징이다.[8-4] 만약 어떤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나려는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면, 그가 진정으로 새 사람을 입었는지 의문을 제기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것이 모든 Type B가 구원받지 못했다는 의미는 아니다(우리는 타인의 구원을 평가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참된 거듭남이 있다면, 성령께서 반드시 말씀의 진리로 이끌어 가신다(요 16:13). 만약 평생 그런 이끌림이 전혀 없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성화의 모습이 아니다.
개혁주의 믿음론에 따르면, 참된 믿음에는 앎, 즉 지식(notitia)이 필수적이다.[6-1] 우리가 전혀 모르는 사람이나 잘못 알고 있는 사람에 대해 믿음을 가질 수 없다. 로마서 10장 14절은 묻는다:
[롬 10:14]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말씀 속 진리를 깨달으려는 노력 없이 맹목적으로 '믿습니다'라고 하거나 감정적으로 고양되는 것은, 대상을 제대로 모르면서 신뢰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말씀을 알고자 하는 열망이 결여된 열심은, 그 대상이 '성경의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의 종교적 감정'일 위험이 크다.
로마서 12장 2절의 명령은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으라"이다. 마음(nous)의 새로움이 없이는 진정한 변화가 일어날 수 없다.[8-5] 단순히 집회 분위기에 젖어 있고, 찬양에 감정적으로 반응하는 것은 마음(사고방식, 세계관)이 새로워지는 것과는 다르다.
참된 성화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세상을 보는 관점, 가치를 판단하는 기준이 변화되는 것이다. 이런 변화는 말씀을 통해서만 일어난다. 시편 119편 105절은 선언한다:
[시 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물론 신자마다 성향과 은사의 차이는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12장은 한 몸에 여러 지체가 있듯이, 교회 안에 다양한 은사들이 있음을 가르친다(고전 12:4-11). 어떤 이는 학구적인 성향이 강해 말씀 연구와 교리에 깊이 뛰어들고, 또 어떤 이는 섬김이나 위로, 찬양의 은사로 하나님께 열심을 나타낼 수 있다.[15]
모든 사람이 신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초대 교회에도 사도들(가르치는 은사), 집사들(섬기는 은사), 선지자들(예언하는 은사) 등 다양한 직분과 역할이 있었다. 성령께서는 각 사람에게 다른 은사를 주시며, 이를 통해 교회의 몸이 세워진다.
하지만 은사의 다양성이 진리 추구의 의무를 면제해주지는 못한다.[15-1] 모든 그리스도인은 "온 마음과 뜻"으로 하나님을 알아가야 하고(마 22:37), 모든 성도는 "성경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을 받아 온전하게 될" 부르심을 받았다(딤후 3:16-17).
베드로후서 1장 5-7절은 모든 신자에게 명령한다:
[벧후1:5-8] 5 그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6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7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더하라 8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 흡족한즉 너희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게으르지 않고 열매 없는 자가 되지 않게 하려니와
지식은 모든 신자가 추구해야 할 덕목 중 하나이다.
참된 성화라면 시간이 지날수록 신앙의 전인적 균형이 잡혀갈 것이다.[16] 처음에는 지식이 적어도 열정이 있을 수 있고, 반대로 처음엔 지식은 많으나 사랑의 열심이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참된 성령의 역사 아래서는 점차 마음과 뜻과 행동이 함께 변화되어 간다.
예를 들어, 어떤 새신자는 많은 교리를 알지 못해도 순수한 열심이 있을 수 있다. 이것은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일이다. 그러나 그 열심이 오래 지속되려면 결국 교리와 하나님 말씀의 뿌리가 필요하다. 뿌리 없는 나무는 처음엔 푸르러 보여도 곧 시들고 만다.
반대로, 어떤 사람은 신학 지식은 많지만 마음이 차갑고 열정이 없을 수 있다. 이것 역시 왜곡된 형태이다. 야고보서 2장 19절은 경고한다:
[약2:18-20] 18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너는 믿음이 있고 나는 행함이 있으니 행함이 없는 네 믿음을 내게 보이라 나는 행함으로 내 믿음을 네게 보이리라 하리라 19 네가 하나님은 한 분이신 줄을 믿느냐 잘하는도다 귀신들도 믿고 떠느니라 20 아아 허탄한 사람아 행함이 없는 믿음이 헛것인 줄을 알고자 하느냐
지식만 있고 사랑과 헌신이 없다면, 그것은 죽은 정통주의일 뿐이다.
따라서 균형이 중요하다. 그리고 참된 성화는 이 균형을 향해 나아간다. 만약 평생 한쪽으로만 치우쳐 있다면, 그것은 건강한 성화라 보기 어렵다.
'교회'는 예배와 교육에서 말씀을 중심에 두어야 한다. 느헤미야 8장은 에스라가 어떻게 백성에게 말씀을 가르쳤는지 보여준다:
[느8:7-8] 7 예수아와 바니와 세레뱌와 야민과 악굽과 사브대와 호디야와 마아세야와 그리다와 아사랴와 요사밧과 하난과 블라야와 레위 사람들은 백성이 제자리에 서 있는 동안 그들에게 율법을 깨닫게 하였는데 8 하나님의 율법책을 낭독하고 그 뜻을 해석하여 백성에게 그 낭독하는 것을 다 깨닫게 하니
에스라는 백성들이 단순히 읽는 것에 그치지 않고 뜻을 해석하여 깨닫게 했다.
현대 교회는 때때로 감각적 예배, 화려한 찬양, 감동적인 간증에 지나치게 의존할 위험이 있다. 이런 요소들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만약 이것들이 말씀의 체계적 교육을 대체한다면 문제가 된다.
디모데후서 4장 2-3절은 경고한다:
[딤후4:2-3] 2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3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교회는 체험적 경건과 교리적 깊이를 분리해서는 안 된다. 청교도들은 이 통합의 모범을 보여주었다. 그들은 엄격한 신학자들이었지만 동시에 뜨거운 경건의 사람들이었다. 존 오웬(John Owen)은 깊은 신학 저작들을 쓰면서도 개인적 경건에 있어서 탁월했다.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는 철학적이고 신학적인 저술을 남겼지만, 동시에 대각성 운동의 지도자였다(그는 성령의 올바른 역사에 대해 누구보다 깊게 연구하고 체험한 신학자였다).
현대 교회는 이 통합을 회복해야 한다. 예배는 감정적으로 풍성하면서도 신학적으로 건전해야 한다. 찬양은 아름답고 감동적이면서도 교리적으로 정확해야 한다. 설교는 마음을 뜨겁게 하면서도 정신을 명료하게 해야 한다.
교회는 성도들이 개인적으로 말씀을 읽고, 말씀을 공부하고, 참된 성경 지식을 가지고 묵상하도록 격려해야 한다.
여호수아 1장 8절은 명령한다:
[수 1:8]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안에 기록된 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며 네가 형통하리라
시편 1편은 (구원의) 복을 받은 자의 모습을 분명하게 제시한다:
[시 1:1-2] 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2 오직 여호와의 율법을 즐거워하여 그의 율법을 주야로 묵상하는도다
말씀 묵상은 단순히 빠르게 읽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천천히, 기도하는 마음으로, 성령의 조명을 구하며,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듣고자 하는 자세로 성경을 대하는 것이다. 조지 뮬러(George Müller)는 매일 아침 첫 번째 과제가 "말씀을 통해 내 마음을 기쁘게 하는 것"이라고 말했다.[17]
목회자들과 성숙한 신자들은 Type B 성향의 신자들을 사랑으로 권면해야 한다. 이것은 판단하거나 정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이 더 풍성한 신앙 생활로 나아가도록 돕기 위함이다.
히브리서 5장 12-14절은 이렇게 권면한다:
[히 5:12-14] 12 때가 오래 되었으므로 너희가 마땅히 선생이 되었을 터인데 너희가 다시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에 대하여 누구에게서 가르침을 받아야 할 처지이니 단단한 음식은 못 먹고 젖이나 먹어야 할 자가 되었도다 13 이는 젖을 먹는 자마다 어린 아이니 의의 말씀을 경험하지 못한 자요 14 단단한 음식은 장성한 자의 것이니 그들은 지각을 사용함으로 연단을 받아 선악을 분별하는 자들이니라
영적 성숙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일어나야만 한다. 만약 오랜 세월 신앙 생활을 했는데도 여전히 초보적 단계에 머물러 있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다는 신호이다.
이제 우리는 처음 질문으로 돌아갈 수 있다. Type A(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와 Type B(지식 추구 없이 찬양과 집회 중심의 그리스도인)의 차이는 무엇인가? 성경적 관점에서 볼 때, 이것은 단순한 성향의 차이가 아니다.
Type A는 성경이 가르치고 개혁주의 신학이 강조하는 건강한 성화의 패턴을 보여준다. 이들은 진리를 통해 거룩하게 되고(요 17:17), 지식에까지 새롭게 되며(골 3:10),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롬 12:2), 은혜와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간다(벧후 3:18). 이것이 참된 신자의 모습이다.
반면 Type B의 모습은 (만약 그 상태가 지속된다고 가정한다면) 참된 성화라고 보기 어렵다.
왜냐하면:
- 성화의 주요 수단(진리, 말씀)이 결여되어 있다.
- 새 사람의 본질적 특징(지식에까지 새롭게 됨)이 나타나지 않는다.
- 참된 믿음의 필수 요소(지식)가 부족하다.
- 마음의 새로움(사고방식의 변화)이 일어나지 않는다.
물론 우리는 개인의 구원을 판단할 수 없다. 그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다. 필자는 "이런 잣대로 타인의 구원을 판단하고 권면하자는 의미"에서 이 칼럼을 작성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러나 우리는 성화의 증거들을 관찰할 수 있고, 성경이 가르치는 원리들을 적용할 수 있으며, 따라서 두렵고 떨림으로 신자 본인의 구원을 되돌아 보는 거울로 삼을 수 있다(빌 12:12).
참된 거듭남이 있다면, 시간이 지남에 따라 성화의 증거들이 나타날 것이다. 처음에는 지식이 부족할 수 있다. 그러나 참된 신자라면 점차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갈망이 생기고, 말씀을 사모하게 되며, 진리를 깨닫는 기쁨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만약 수년, 수십 년이 지나도 여전히 진리에 대한 관심이 전혀 없고, 오직 감정적 체험만 추구한다면, 그것은 심각하게 본인의 신앙을 되돌아 봐야 한다는 신호이다. 참된 성령의 역사가 있다면, 성령께서는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요 16:13) 때문이다.
최종적으로, 성경은 우리를 균형 잡힌 신앙으로 부르신다. 우리는 뜨겁게 하나님을 사랑하면서도(신 6:5), 온 마음과 뜻으로 그분을 알아야 한다(마 22:37). 우리는 영으로 예배하면서도(요 4:24), 마음(지성)으로도 예배해야 한다(고전 14:15). 우리는 은혜에서 자라가면서도(벧후 3:18), 주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야 한다(벧후 3:18).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 교리와 경건, 신학과 영성은 분리될 수 없다. 칼빈이 『기독교 강요』에서 보여주었듯이, 참된 경건(pietas)은 지식에서 시작하여 사랑과 헌신으로 표현된다.[2-1]
목회자들은 Type B 성향의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면할 수 있을 것이다.
"감정적 체험과 찬양의 기쁨을 포기하라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들을 더욱 풍성하게 하라. 그러나 그것에 더하여 진리의 뿌리를 깊이 내리라. 말씀을 사모하고, 교리를 배우고, 하나님을 더 깊이 알기를 갈망하라."
그렇게 할 때, 여러분의 찬양은 더욱 의미 있어질 것이다. 여러분의 기도는 더욱 구체적이 될 것이다. 여러분의 헌신은 더욱 지속 가능해질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이제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누구신지에 대한 깊은 이해에 뿌리박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도 바울의 기도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골 1:9-10] 이러므로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주께 합당하게 행하여 범사에 기쁘시게 하고 모든 선한 일에 열매를 맺게 하시며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게 하시고
이것이 참된 성화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워지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자라가는 것. 지식과 열매, 이해와 실천, 교리와 경건이 함께 성장하는 것. 이것이 개혁주의 성화론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비전이며, 성경 전체가 우리를 부르는 방향이다.
[1]: GotQuestions.org, "Why does God desire mercy and acknowledgement of Him instead of sacrifice (Hosea 6:6)?"
[2]: Calvin, John, 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 Book I, Chapter 2
[3]: Ibid., Book I, Chapter 1, Section 1.
[4]: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Chapter 13, Section 1.
[5]: Sproul, R.C., "Zeal without Knowledge," Ligonier Ministries.
[6]: Berkhof, Louis, Systematic Theology, "The Constituents of Saving Faith."
[7]: Clearly Reformed, "Can I Passionately Follow Jesus and Not Care About Good Doctrine?"
[8]: Hoekema, Anthony A., Saved by Grace (개혁주의 구원론), "Sanctification: God's Work and Our Work."
[9]: Ferguson, Sinclair B., "The Reformed View of Sanctification," Union Publishing.
[10]: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Chapter 13.
[11]: Biblehub, "How does 1 Corinthians 14:15 guide the balance between spirit and mind in worship?"
[12]: DeYoung, Kevin, "Can I Passionately Follow Jesus and Not Care About Good Doctrine?" Clearly Reformed.
[13]: Ryle, J.C., "Beware of Zeal Without Knowledge," The J.C. Ryle Archive.
[14]: Packer, J.I., Knowing God (하나님을 아는 지식), Chapter 2.
[15]: Clearly Reformed, "Can I Passionately Follow Jesus and Not Care About Good Doctrine?"
[16]: Westminster Confession of Faith, Chapter 13; Ferguson, Sinclair B., "The Reformed View of Sanctification."
[17]: Müller, George, Autobiography of George Müll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