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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core Nov 13. 2020

[수플레] 잘 놓아줄 것, 그리고 절대 놓지 말 것

ep.36 크러쉬 - 놓아줘 Let me go


어제 훈련소 입소한 효섭찡.. 잘 다녀와..


#1. 붙들고 싶어도 결국 놓아야 하는 것들


찬 바람이 불면서 실감하는 것들이 있다. 요즘 들어 부쩍 가늘어진 모발. 부정할 수 없이 점점 쌓여가는 뱃살. 갈수록 바닥을 기는 체력 등. 그러니까 마침내 이십 대와 멀어지고 있음을 느끼는 것이다. 최근엔 스킨/로션을 바꿨는데 현타가 쎄게 왔다. 큰 맘먹고 성공한 남자의 상징인 비오템 옴므를 샀는데, 그런데 웬걸, 생각보다 아저씨 스킨 냄새가 나는 것이다. 그런데 웬걸, 그게 썩 싫지만은 않은 것이다. 아, 이렇게 다들 아저씨가 되는 거구나. 아저씨 스킨 냄새가 포근해질 때, 바다보다 산에 가고 싶어 질 때, 할로윈 파티가 한심해질 때.


이번 겨울을 마지막으로 스물을 놓아줘야 한다. 가능성과 활력으로 무장한 젊은이의 타이틀을 반납하고 대신 뭔가 짐 같은 서른을 빌려와야 한다. 그러기 싫어도 그래야 한다. 세상에는 아무리 붙들고 싶어도 결국은 놓아야 하는 것이 있으니까.




#2. 놓아보려 애를 써도 끈질기게 되살아나는 것들


몇 주 전 친구가 이별했다. 삼 년을 넘게 만나면서 은근 결혼에 대해 얘기하던 상대와. 그것도 상대의 일방적인 문자 통보로 말이다. 나는 원래 타인의 이별 소식에 시큰둥한 편인데 (이별 후의 넋두리를 밤새 들어줬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만난다는 소식을 듣는 것만큼 허탈한 일이 없다) 이번에는 어쩐지 그냥 넘길 수가 없어 한달음에 그가 있는 곳으로 갔다. 녀석은 슬퍼하기보단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삼 년의 세월을 함께 보낸 상대가 한순간에 돌아섰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어떻게 만나서 정리할 기회도 주지 않고 메시지 하나로 끝낼 수가 있느냐고 했다. 그러면서, 내가 여태 누구와 사랑을 했는지 모르겠다, 하는 소리만 계속 반복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디서 봤던 구절이 떠올랐다. '돌아서는 뒷모습이 그의 진짜 모습이다.' 녀석이 사랑했던 사람의 진짜 모습은 아주, 아주 별로였다.


그럼에도 녀석은 전 애인을 붙잡고 싶어 했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밝히기 부끄럽지만 나는 통보하는 입장이었던 적이 있다―그건 가능성이 너무 낮은 일이었다. 차인 상대가 질척댈수록 재결합의 확률은 떨어지는 법이다. 그리고 삼 년의 세월을 문자 하나로 정리하는 인간에게 내 친구는 너무 아까운 남자이기도 했다. 그건 통보 유경험자인 내가 봐도 선 제대로 넘은 짓이다. 부들부들.


아직도 녀석은 사진첩을 정리하지 못했다. 전 애인이 등장하는 꿈을 꾸면 어김없이 손을 휘젓다가 엉엉 울면서 깬다는 녀석에게, 그렇게 잔인한 상대인데도 문득문득 못해준 것들이 생각난다는 미련한 녀석에게 아마 그건 요원한 일일 테다. 함께 행복했었던 추억들이 부득부득 되살아나서 많은 밤을 뒤척일 게 분명하다. 무언가를 놓는다는 게 렇게 어다.




#3. 그럼에도 놓지 말았으면 하는 것들


며칠 전 한 희극인이 스스로 생을 등졌다. 그 후, 그녀와 관계가 있건 없건 간에 많은 사람이 오랫동안 실의에 빠져 있다. 우리는 그녀결코 그럴 리 없다고 어렴풋이 믿었던 것 같다. 세상 모두가 우울증을 앓아도 그녀만은 마지막까지 남아 특유의 재치로 사람들을 웃겨주리라고, 머리가 희끗해질 때까지 살면서 오래오래 긍정적인 에너지를 나누어주리라고 믿었던 것 같다. 리가 이렇게 타인을 모른다.


우리는 그녀를 잃고서도 여전히 모른다. 마냥 밝아만 보이던 그녀에게 어떤 지긋지긋한 불행이 있었는지. 그걸로 그녀가 얼마나 오랫동안 지쳤었는지. 너무 지친 나머지 그것으로부터 놓여나기 위한 선택을, 자신의 생일 전날에 서두르듯 해버렸는지. 주변 사람들에게서 애정 어린 연락을 받으면 행여 마음이 약해질까 하는 마음이었을까. 하루만 더 있다보면 그래, 그래도 살아봐야겠다, 늘 그랬듯 다시 몸을 일으키게 될까 두려웠던 걸까. 나는 아직도 그게 가장 슬프다.


아마 영원히 알 수 없을 것이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싸움을 하는 중이고 그 속에는 수천 갈래의 고통이 있을 테니까. 그 싸움 끝에 결국 어떤 선택을 하는가는 오로지 개인의 몫이다. 거기에 타인이 이러저러한 말을 얹는 것은 주제넘은 짓일 것이나, 나는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구절을 빌려.

살아 있는 것들을 보라 Look to the living
사랑하라 love them
놓지 마라 and hold on
                     - 더글라스 던(Douglas Dunn)




앞으로도 많은 것을 놓아주고, 놓치게 되고, 놓아버리고 싶을 것이다. 놓으려 해도 그럴 수 없는 것들과 놓치지 않으려 해도 빠져나가는 것들 사이에서 오래 고뇌할 테다. 다만 살아가면서, 꼭 쥐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흘리고 있던 것들이 없었으면 좋겠고, 결국 놓아야 하는 건 부드럽게 놓아줄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럼에도 놓지 말아야 하는 건 꼭꼭 묶어두고 오래 간직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꼭.


(2020.11.13)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네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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