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35. borns - clouds
가을은 어째 매년 짧아져만 가는 것 같다. 기나긴 여름과 겨울 사이에 모든 것이 노랗게 물드는 찰나의 계절. 그런 계절에는 유독 하늘을 더 올려다보게 되는데 어제는 가을 하늘을 보면서 파란 물이 든 한지가 하늘에 걸려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손을 뻗으면 한지의 질감이 나를 간지럽게 할 것만 같은데 실제로 손을 뻗으면 아무것도 닿지 않는. 실로 요즘이 그렇다. 무언가가 있는 것만 같은데 그게 무엇인지는 모르겠는 시간의 궤적들을 통과하고 있달까.
가을이 오면 곧 올해가 끝날 것 같다는 느낌이 몸을 감싼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드는 생각은 올해 난 무엇을 했나. 뭘 했길래 이렇게 매년 시간은 점점 빨리 가는 거지. 함께 일하는 매니저님은 어느 날 내게 물었다.
"영훈 씨, 왜 매년 시간이 점점 더 빨리 가는 것처럼 느껴지는지 알아요?"
"그러게요."
"삶의 패턴이 점점 익숙해져서 시간의 흐름에 둔해지는 거래요."
퇴근길, 언제나 오가는 지하철역 한 칸에서 정말 그런 걸까 골똘히 생각을 했었다. 매니저님의 말은 반은 맞고 반 정도는 틀린 것 같았다. 삶이라는 것은 밥을 먹고, 일을 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잠을 자고 모든 게 당장이라도 권태로워질 수 있는 일상의 연속이지만, 그 속에서 그 어떤 하루도 똑같을 수는 없으니까. 지금 내가 느끼는 감각, 감정, 생각이라는 건 느껴지는 순간 사라지고 언제나 단 한 번뿐인 거니까.
올해는 유독 더 그런 느낌을 받았다. 발생하는 찰나에 휘발되는 것들. 그만큼의 빠른 변화들. 변화라는 것이 그 어느 때보다도 발에 불붙듯 속도를 내며 달리는 시대라지만 올해의 나는 정말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올해 초만 하더라도 나는 친구와 길게 3년 이상을 보며 창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개선될 여지가 많았고 매일의 문제 해결의 연속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경험으로부터 배우는 즐거움이 있었다. 하지만 일을 하며 내가 추구하는 가치가 어딘가 모르게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고 언젠가부터 친구와 트러블도 잦아졌다. 사업을 통해 잘 맞는 친구와 마음이 통하는 대화를 제공해 더 풍성해지는 관계를 만들고자 했던 나는 어느새 이것저것 따지며 친구를 사귀는 좁은 사람이 되어가고 있진 않나 의문이 들었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 우리의 가치를 믿고 앞으로 나아갔지만 그 끝에는 함께한 친구와의 갈등으로 인해 일을 그만두고 마는 내가 있었으니. 일을 그만둘 때만 해도 앞으로 내가 셀렉샵에서 전시를 안내하고 작품을 판매하는 일을 할지는 까마득하게 몰랐었다. 애인이 차(tea)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었고 그래서 나 역시도 차가 좋아졌을 뿐이었는데, 어느덧 나는 창업을 그만두고 차와 같이 향유에 관련된 것들을 다루는 샵에서 일을 배우고 있다. 애인은 또 어떻게 되었나. 작년의 나는 이렇게나 좋아도 괜찮을 걸까 싶은 사람을 만나 연애를 시작했고 수많은 미래를 약속하며 나날이 생동한 하루를 보냈는데 올여름이 지난 나는 결국 애인과 헤어지고 추억이 가득했던 공간에서 우리만의 플레이리스트를 들으며 버드나무를 올려다보는 환절기를 보냈다. '우리'라는 단어는 어느새 이질적으로 느껴지고 그가 선물해준 찻잔세트는 버리지도 마음껏 사용하지도 못하는 채로. 물론 이 변화들이 결국 나를 양지에서 음지로 보냈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모든 감정은 빛과 그늘을 동시에 품고 있으며 다만 그 시간들 속에서 무언가를 배워가는 내가 있다고 자기 전 나를 다독이는 날이 많았다. 실제로 모든 변화들은 원인과 결과가 항상 뚜렷하지 않았고 여러 개의 사건이 서로 얽혀가며 발생하는 모양이었는데, 하는 일이 바뀌고 가장 애정 했던 사람들을 보내는 과정에서 올해 나는 비건을 지향하게 되며 식습관에 큰 변화가 생겼고, 사랑과 실패를 다루는 소설을 읽다 직접 소설을 쓰고 싶다는 마음이 생겨 창작 강의를 듣고 책을 만드는 클래스를 다니기 시작했으며, 단지 어떤 증상을 겪을 뿐인데 그것이 낙인으로 이어질까 봐 말하지 못하고 신체적, 심적으로 남몰래 아파하는 시기도 겪었다. 이 모든 것이 맞물리면서 하루하루 서있는 곳이 달라지고 조금씩 관계에 변화가 생기며 좋거나 나쁜 습관이 생기고 그것이 삶이 되어 비슷한 듯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나의 나날들. 익숙해질 수 없다는 사실만이 익숙해진 시간의 흐름 속에.
가을이 깊어진 만큼, 소설을 쓰고 싶다는 열망이 좀 더 강해진만큼 요즘은 책을 거의 매일 읽고 있는데 최근에는 김금희 작가님의 <우리는 페퍼로니에서 왔어>에서 그런 문장을 보았다.
'어디에서 왔는지도 알 수 없고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어서 울고 싶은 기분으로 그 시절을 통과했다는 것. 그렇게 좌절을 좌절로 얘기할 수 있고 더 이상 부인하지 않게 되는 것이 우리에게는 성장이었다.'
이 문장에 줄을 긋고 한참을 머물렀다. 요즘 가장 많이 하는 일중 하나는 이처럼 책에 밑줄을 긋고 아 지난 나의 시간들은 이런 것이었나 하고 떠올려보는 일이다. 그때 너의 감정은 이랬을까. 그때의 나는 이걸 이렇게 생각했던가. 시간이 지나서 지금 내 마음에 스며드는 글귀들이 나의 지난날들을 새롭게 덧칠한다. 판단은 최대한 내려둔 채 유보했던 사건들, 그게 무엇인지도 모른 채 겪어왔던 그 시절들이 조금 더 선명해지고 그렇게 새로워진 시간의 궤적 속에 머물며 나는 그리워하는 것이다. 지금의 나를 만든 친구들의 스쳐가는 말들, 애인이 가지고 있던 취향들, 처음 채식을 하기로 다짐하게 만들어준 누군가의 문장, 가치와 일을 둘 다 지키려다 와르르 무너져 내렸던 실패의 날, 많은 알약들을 입에 털어 넣으며 식은땀을 한가득 흘렸던 어느 밤, 그리고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마음들을. 그런 슬픈 일은 또 겪고 싶지 않아 하면서도 결국 또 찾게 되는 내 마음의 어떤 방들. 문장들로 인해 용기가 생간 날에 그 방들을 활짝 열어두고 마음껏 그리워하다 그 날의 소중함을 현재까지 연장시키는, 그래서 지금 이 순간이 더없이 소중해지는, 지금 여기에 무언가가 분명 있는데 어쩌면 그게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마음이지 않을까 하며 하루를 마무리하는 삶의 익숙한 패턴.
가끔 나는 그런 생각을 한다. 내가 정말 나일까. 내 몸은 한 덩어리인 듯 하지만 사실은 수십억 개의 세포들, 수백억 개의 원자들이 만나고 헤어지는 과정일 텐데. 어쩌면 정말 아무 의미 없는 움직임의 연속일지도 모르는데. 재밌는 건 그런 상상을 하다 보면 이상하게도 용기가 샘솟아 방구석 침대에 누워 발가락 끝에 힘을 빡 쥐어보게 된다. 모든 것이 유기적으로 맞물리며 수많은 사건 뒤에 '나'이거나 '내가 아닌 존재'로 만들어진 나라면. 내가 대단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볼 품 없는 사람도 아니지 않을까. 이제는 물리적으로 닿을 수 없게 된 수많은 존재가 있다 하더라도 그 존재들의 흔적이 내 몸에 쌓여있으니까. 지난 친구가 엽서에서 했던 말처럼 인생은 흘러온 역사고 관계는 그 역사가 부딪히며 또 다른 역사를 만들어내는 일이니까. 그러면서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고마움. 어떤 책임감. 혼자가 아닌 것만 같은 든든함. 역시 가을엔 책을 많이 읽고 고독해질 이유가 충분하다. 그리움을 그리워해 보는 시간은 내일의 용기를 만드니까. 어쩌면 오늘의 내 글도 어딘가에 닿아 또 다른 누군가를 만들 수도 있겠다. 그렇게 만들어진 무언가가 다시 내게 닿는 날도 있을 테고. 그건 정말로 무섭고도 매력적인 일이다. 그 시간의 궤적 속에 나는 꽤나 깊은 곳까지 가보고 싶은 열망이 가득하다. 시간과 공간을 늘릴 대로 늘려 분명히 있는 무언가를 부지런히 감각하고 표현하는 일. 그런 궤적에 이미 함께하고 있는 벗들에게 오늘은 이 노래를 추천하고 싶다. 그리움을 펼쳐놓기 좋은 가을에 어울리는 borns의 clouds.
https://www.youtube.com/watch?v=zklODPVvvgc
I forget all my dreams
I forget everyones name I meet
I forget about time and space
But I can't stop thinking 'bout your face
I can't stop thinking 'bout your face
'수요일의 플레이리스트(줄여서 수플레)'는 네 명의 브런치 작가가 매주 수요일마다 본인의 에세이가 담긴 음악을 소개하는 읽고 쓰는 라디오입니다. 잠들기 전 이름 모를 누군가가 추천해주는 노래를 듣고 싶으셨던 분들, 즐겨 듣는 노래에 다른 누군가는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을까 궁금해본 적 있으신 분들이라면 매주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려주시지 않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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