꼴레오네의 수필집 #030
평소에 느끼던,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느낌들에 대해 잘 설명해 주는 책이 있다. 그런 책을 읽으면 찝찝했던 내 기분이 설명되는 듯하여, 해방감 내지는 시원한 기분이 들곤 한다. 내게 "아비투스"가 그러했다.
내가 이해한 아비투스는, 어떤 사람이 나고 자란, 유년기부터 청소년기까지 습득한, 몸에 베여버린 문화적인 성격이다. 사고방식부터 시야, 견문, 습관, 매너, 가치관 그리고 취미까지. 광범위하고도 사소한 많은 것의 집합인데, 이런 무형의 가치가 얼마나 "자연스럽게" 묻어 나오는지에 대한 것이다.
고등학생까지는 이런 아비투스에 대해 체감할 일이 그리 많지 않았다. 이도 당연한 것이, 같은 동네에 살면서 부모님의 소득 수준도 엇비슷했기에 내가 만나온 친구들도 다 비슷비슷한 아비투스를 가지고 살아왔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아비투스를 체감했던 몇 안 되는 기억이 있다.
중학교 2학년 즈음, 같은 반 친구가 "스케일링이나 받으러 가야겠다."라고 말했던 것이 아직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에는 어린 탓도 있겠지만, 치아관리에 적극적이지도 않았고 필요성도 잘 느끼지 못했다. 사실 스케일링이라는 개념 자체도 잘 몰라서, 나름대로 추측해 냈던 것이 치아미백이었고, 과하게 유난 떤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그 친구가 본인의 아비투스를 의도적으로 과시하려 했던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무튼 아비투스의 차이를 조금 실감했던 최초의 기억인 것은 확실하다.
고등학교 1학년때는 재외동포의 자녀들이 우리 학교를 방문하여 같이 체험활동을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한 적이 있다. 미국, 중국, 이탈리아, 인도네시아 그리고 남아공까지. 전 세계 각지에 살고 있는 재외동포들의 자녀가 그들 부모의 고향인 한국에 방문했던 것이다. 그중 일부는 아버지나 어머니가 외국인과 결혼하여 외국에 정착한 경우였지만, 대다수는 외교관 또는 국제기구에 근무하고 있었기에 외국에서 좋은 처우를 받으면서 살고 있었던 것이다. 그중 어떤 친구는 수영을 즐겨한다고 했고 나는 어디서 수영을 하는지 되물었다. 나로서는 수영을 하기 위해서 스포츠센터나 인근 대학교에 방문했어야 했기에 별 뜻 없이 자연스럽게 물어보았던 것이다. 그러자 그 친구는 본인 집에서 수영을 한다고 했다. 집에 수영장이 있었던 것이다. 물론 우리나라보다 부동산 가격이 부담되지 않는 나라에서는 외교관에게 아파트보다 전원주택을 사택으로 제공했을 것이고, 어쩌면 집에 수영장이 있는 게 그리 부자연스럽지 않았을 수도 있다. 하지만 집에 수영장이 있을 수 있다는 사실이 나에게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던 것 같다.
성인이 되고서 대학교, 군대, 직장생활을 거치면서 아비투스를 체감할 수 있는 일은 자연스럽게 더 많아졌다. 나의 교수님은 정년을 곧 앞두신 분이셨다. 꽤나 키가 크시고 흰머리를 굳이 염색하지 않으시며 깔끔한 복장을 하고 다니시던 분이셨다. 말투는 굉장히 점잖으셨으며 오래된 세단 자동차를 타고 다니셨다. 아침에 오시면 항상 연구실 문을 활짝 열어서 환기를 시키시고 클래식 음악을 틀어두시면서 네스프레소 캡슐커피를 드시는 것이 매일의 루틴이셨다. 내가 입학한 이후 졸업까지 6년간 꾸준히 같은 일상을 보내셨다. 그다지 사치를 부리지 않으셨고 교수라는 직업치고 꽤나 검소했으며 가끔 등산을 가시곤 하셨다. 나는 그런 교수님의 모습이 고지식하고 지루하다는 느낌을 받았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건 교수님의 아비투스였던 것이고, 감히 내가 공감조차 할 수 없는 수준이었기에 고지식하게 볼 수밖에 없었던 것은 아닐지 의심되곤 한다. 잘 지내시려나 모르겠다.
그리고 내가 결정적으로 아비투스로 인해 큰 충격을 받았던 것은 입사 이후 동기들과 처음 모이는 자리에서 생기고 말았다. 인구 16만 명의 작은 도시에서 나고 자랐고 지방에서 -공부를 그리 잘하지 못하던 학생들이 가는- 대학교를 나온 나는, 처음으로 수도권에 발을 들이게 되었고 나름 이름 있는 대기업이란 곳에 입사했던 것이었다. 동기들끼리 모인 자리에서 저마다 출신 대학을 언급하며 아는 척을 했고, 인서울 대학 안에서 서열나누기를 농담 삼아 즐기곤 했다. 심지어 고등학교까지 내려가서, 누구는 명문고를 나왔느니,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 나가는 외고를 나왔느니 등 서로 띄워주기 바빴다. 외국에서 살다 온 사람도 꽤나 많았는데, 그들의 네트워크에서는 외국에 거주해 보았거나 대기업에 입사하는 것이 그리 대단하거나 신기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 마치 너무나도 "당연"했던 것이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고 그 어떠한 공감도 할 수 없었다. 높은 자존감과 강인한 멘탈로, 이런 상황에서 재치 있게 흥미로운 질문들을 던져가며, 그들의 아비투스에 "아무렇지 않은 척" 위화감 없이 녹아들고자 노력했다. 그들이 살아온 삶은 나와 전혀 달랐다. 나는 그저 내 출신 학교 따위를 궁금해하는 상황을 모면하기 위해 최대한 다른 대화주제를 꺼내기 위해 애썼을 뿐이었다. 그들의 자연스러운 대화에 끼기 위해 나는 '어떤 노력'을 해야만 했던 것이다. 나는 이때 처음으로 아비투스의 큰 격차에 에너지 소모가 된다는 것을 자각했고 약간의 불편한 기분 또한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4년 즘 지난 지금, 나는 더 이상 동기들과의 대화가 어렵지 않고 별다른 노력을 하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더 이상 내 출신학교를 밝히는 것에 개의치 않게 되었고, 그들이 살아온 인생에 크게 위화감을 느끼지도 않는다. 어쩌면 무뎌지고 익숙해진 것이 맞겠다. 이렇게 아비투스가 달라진 환경에 처음 내딛게 되면 노력이란 것이 필요하고 시간이 지나면서 내 아비투스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되는 것 같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아비투스가 "달라졌다"라고 느낄 뿐, 이게 마치 내 본연의 아비투스로 여겨지지는 않는다.
여전히 고향에 가면 편안한 기분이 드는 이유는 바로 이 본연의 아비투스 때문도 있을 것이다. 부족하지만 경쟁이 없는 인프라에서 스트레스받지 않는 것, 웨이팅 없는 식당에서 식사를 즐기는 것이 나에겐 너무 자연스럽다. 고향에서 직장생활을 하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이야기를 하면 더욱이나 편안하고 안정감이 들기도 한다. 마치 태초로 돌아가 내 본연의 아비투스에 맞게 살아가는 듯 한 느낌이다. 그럼에도 나는 직장을 다녀야 하고 그렇기에 수도권에서 살아가야만 한다. 이 아비투스 간의 이질감은 내 평생을 따라올 것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내게 자녀가 생긴다면, 내 자식은 지금 내가 바꿔놓은 이 아비투스가 본연이 될 것이다. 이렇게 세대를 거치면서 아비투스가 조금씩 달라지는 것은 아닐까.
아버지가 그 시골에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아비투스를 바꾸어 놓았듯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