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J에게 닥친 시련

꼴레오네의 수필집 #029

by 꼴레오네

내 MBTI는 J로 끝이 난다. 모든 삶의 영역에 있어서 계획형은 아니지만, 그중 가장 계획성이 높은 영역을 꼽자면 바로 해외여행이다. 여행지에 대해 조사를 많이 하고 후기를 많이 듣고 나면, 실속 있고 알찬 여행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보다 더 큰 원인은 낯선 해외 여행지에서의 불안함 때문인데, 내게 정보가 많을수록 그 불안감이 많이 해소되고 여행을 보다 마음 편히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나는 여행을 가기 몇 개월 전부터 여행 계획이란 것을 짜기 시작한다. 나로서는 계획을 짜는 과정과 여행지에 대해 후기를 읽어보는 것마저도 즐겁기 때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계획을 짜곤 한다.


그렇게 나는 인도로 향했다.

타지마할에 가기 위해 택시투어를 신청해 둔 상태였다. 물론 이 또한 3개월 전에 예약을 해둔 것이었다. 그리고 출발하기 전날 저녁이 되어서 투어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한국인 한 명이 추가되어도 괜찮냐는 것. 여태 내 동행인 K와 함께 여행을 해온 지라, 즉흥적 동행을 만날 일이 없었는데 반가운 마음이 들어 흔쾌히 좋다고 했다. 그렇게 우연히 H가 투어에 합류하게 되었다. H는 뼛속까지 P였다. 태국에서 인도로 넘어온 그날 바로 투어를 신청했던 것이었다. 붙임성이 좋은 그녀와 함께 타지마할을 보고 와서 이후 바라나시라는 도시에서도 일정이 겹쳐 이틀간 함께하게 되었다.


바라나시는 갠지스강 하류를 끼고 있는, 힌두교의 성지와 같은 도시이다. 힌두교 의식인 아르띠 푸자 그리고 시신을 화장하는 화장터와 같이 힌두교 색채가 짙은 도시이지만, 그 외 볼거리나 즐길만한 콘텐츠가 그리 많은 도시는 아니다. 바라나시를 여행하는 한국인이 그리 많지는 않은 탓인지, 인터넷에서 여행 후기를 찾아보기도 어려워서 애초에 계획을 짜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때문에 별다른 계획이 없이 바라나시에 도착해 버렸고, 그로 인해 약간의 불안한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무계획에서 나오는 쓸데없는 걱정은 나 혼자만의 것이었고, K와 H는 아무 생각이 없는 듯했다. 그들에겐 무계획이 디폴트였던 것이다. 그렇기에 나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 P 여행을 해보기로 했던 것이다.


사실 내게 P 여행이 허용될 수 있었던 것도, 나에게 애초에 계획이 없었기도 하지만 내가 바라나시에서 대한 어떤 기대나 목적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라나시의 좁은 골목을 따라 걸으며, 현지에서 파는 옷을 사 입고 라씨를 먹기도 한다. H는 겁이 없는 것인지, 낯선 인도 현지인들에게 말을 참 잘 걸고 도움을 얻어낸다. 덕분에 H가 뜬금없이 들어간 힌두교 사원에 따라 들어가기도 하고, 그곳에서 오래 수행을 해온 요기를 보거나, 혹은 노숙인들에게 밥을 나눠주는 장면을 목격하기도 한다. 보트투어를 하고 우연히 내린 곳에서 내가 기대하던 화장터를 마주하기도 했다. 원래 같았으면 현지인들에게 묻고 물어서 화장터를 찾아갔었어야 했겠지만, 보트가 내려주는 곳이 하필 화장터였고, 내리자마자 어떤 현지인에게 이끌려 투어를 당하기도 했다. 정말 뜻밖에 바라나시에 온 유일한 목적을 달성해버리고 말았다. 그렇게 P들에게 의지하여 P처럼 지낸 바라나시는 불안보다 편안함이 더 큰 도시로 기억되고 있다. 즉흥적인 이끌림에 의한 새로운 경험들에서 오는 도파민이 더 크게 와닿았던 것 같다.


그렇게 나와 K는 바라나시를 떠나 리시케시로 기차를 타기 위해 바라나시 기차역으로 떠났다. 그러나 내가 무려 3개월 전에 끊었던 1등석 기차표는 사실 확정티켓이 아니라 예비번호 티켓이었다는 사실을 기차역에 도착해서 직원들에게 묻고 나서 깨닫게 되었다. 표 구하기 힘들기로 유명한 인도 기차에서 티켓이 확정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절망 그 자체였다. J에게 닥친 첫 위기였다. 그리고 빠르게 상황 판단을 해서 뉴델리를 경유하여 리시케시 인근 데라둔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 표를 끊었다. 그렇게 우버를 타고 바라나시 공항으로 갔다가, 그곳에서 6시간 노숙을 하고 나서 비행기를 타고 뉴델리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데라둔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 남짓 비행동안 단잠을 잤다. 체감상 한 시간이 되어가는 듯했지만 비행기가 착륙하지 않았다. 단잠에 빠진 나는 한참이 지나서야 착륙과 동시에 잠에서 깼다. 그리고 내 옆에 있던 K가 말했다.

"여기 어딘지 알아? 델리야."


그랬다. 데라둔 공항은 기상악화로 정전이 되었고, 그래서 착륙하지 못하고 그대로 뉴델리로 회항한 것이었다. 그 소식을 듣자마자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비행기가 다시 연료를 충전해서 출발을 할 수 있을 것인지, 그렇다면 얼마나 비행기 안에서 기다려야 하는 것인지, 예약해 둔 숙소에는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것인지, 이 비행기가 출발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될 것인지. 내가 계획하고 준비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저 마음을 비우고 사태가 해결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리고 결국 비행기는 그대로 결항되고 말았다.


세상에 비행기 결항이라니. 그것도 비행기가 출발했다가 다시 회항하고 나서 결항이라니. 로또를 사야 하는 것일까. 항공사는 다음 날 정오의 비행기 티켓을 준다고 했지만, 그 마저도 현지 날씨에 따라 다시 결항될 수도 있다는 답변만 들을 수 있었다. 멘탈이 산산조각 나고 말았다. 리시케시에 도대체 어떻게 가야 하며, 오늘은 어디서 어떤 것을 해야 할까 등의 고민을 하다가, 그냥 이대로 한국으로 돌아가버릴까도 생각했다. 그러다가 결국, 이런 경우에 여행자 보험이 된다는 K 말을 듣고 호텔 인근의 5성급 호텔로 가게 되었다. 사실 나로서는 이 또한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여행자 보험을 들어본 적은 있지만, 비행기 결항으로 보상을 받아본 적은 당연히 없었고, 지금 이 상황이 보상을 받을 수 있는 조건이 되는지 조차 불투명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몸도 마음도 지친 상태에서 그저 이끌리듯 K를 따라 5성급 호텔로 향하게 되었다.


호텔에서 비싼 식사를 하고 수영장에 몸을 담근 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고 뽀송한 이불이 깔린 침대에서 잠을 청했다. 약 십 여일 간의 인도 여행 중 가장 호화스럽고 기분 좋게 지낸 하룻밤이 아닐 수 없었다. 실제로 내 인생에서 5성급으로 분류된 호텔은 처음이기도 했다. 결국 다음 날 날씨가 어떨지 불확실한 가운데, K를 설득하여 비행기 대신 택시를 타고 리시케시로 가기로 했다. 자동차로는 무려 7시간이나 걸리는 긴 여정이지만, 다시 회항하게 될 수 있다는 끔찍한 확률을 남겨두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새벽같이 택시를 타고 리시케시에 도착했고, 놀랍지 않게도 그곳의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맑았다.


불확실성을 최대한 제거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여행을 하고 싶어서 그동안 철두철미하게 계획을 해오며 여행하곤 했다. 그러다 우연치않게 따라 해본 P의 여행도 꽤나 즐거웠다. 계획이 없다 보니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었고, 어떤 이벤트가 펼쳐진들 나에겐 그 모든 게 도파민이었던 것이다. 마음을 비우고 가볍게 여행을 해보는 재미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아마 다음 여행에서도 나는 과할 정도로 계획을 짤 것이란 것을.

그게 나인 것을 어쩌겠는가.


그럼에도 앞으로는, 좀 더 살가운 마음으로 P의 여행도 즐겨볼 수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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