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올라프
스웨덴의 긴 겨울이 드디어 끝나가고 있다. 늦은 일출과 이른 일몰 탓에 깜깜할 때 출근하고 퇴근하는 일상을 반복하는, 신체 건강은 물론이고 스스로의 심리 및 정신 건강에 각별한 신경을 써야 했던 시기였다. 스웨덴의 어둡고 긴 겨울을 해외에 나가지 않고 처음부터 끝까지 견뎌내야 했기도 했고, 코로나 영향으로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못했던 것 또한 큰 영향을 끼쳤던 것 같다. 스웨덴의 척박한 겨울은 다섯 해가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구나 하는 씁쓸한 깨달음과 함께 다음 겨울에는 어떻게든 반드시 이곳을 탈출하리라 다짐했다.
지난 3월 말 썸머타임을 기점으로 놀라울 정도로 날씨가 따듯해졌고(는 반쯤 거짓말이다, 오늘도 눈이 왔다) 날도 길어졌다. 이제는 아침 햇살에 눈을 뜨는 일도, 아직 날이 밝을 때 집에 도착하는 일도 가능해졌다. 이렇게 바깥세상이 천지차이의 변화를 겪는 동안, 나 또한 버티는 일상 끝에 국제관계학 박사과정생이 필수로 수강해야 하는 과목을 모두 완료하게 되었다. 앞으로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발보리(Valborg, 봄을 맞이하는 축제)만 지나면 정말 만연한 봄이 될 터인데, 나도 이에 발맞추어 끈기가 필요했던 긴 시간들을 지내고 새로운 시기로 접어드는 느낌이다.
이 타이밍에 맞춰 본 브런치 글에서 1년차 박사과정 중간점검 차 코스웍을 중심으로 한 교과 과정과 함께, 이전 글에서 트로피칼 디프레션의 주제를 이어받아 지도교수에 대한 이야기 또한 해보려 한다. 교과 과정에 대한 내용은 스웨덴 내 타 대학 혹은 타 학과에 적용되지 않을 수 있음을 미리 알려둔다.
학생이라는 직업의 묘미와 스스로의 한계를 동시에 느끼게 한 코스웍 과정
스웨덴의 박사과정은 풀타임 기준 4년 과정으로 이루어져 있고, 다른 주요 유학국 과는 달리 학비를 내지 않고 하나의 직업처럼 대학교에 고용이 되는 형태이다. 고용되는 조건으로 학부 내 행정 업무나 학석사 학생들을 대상으로 가르쳐야 하는 의무도 있는데, 그럴 경우에는 해당 업무에 사용한 시간만큼 최고 1년까지 계약이 연장된다. 이 4년(최장 5년)의 기간 동안 총 240학점을 이수해야 하는데, 우리 학과의 경우에는 75학점은 수업을 수강하는 흔히 말하는 코스웍(coursework)을 통해 채워야 하고 나머지 165학점은 논문 작성을 통해 채우게 된다. 이 때문에 (인문사회 분야에 한해) 흔히 의무 수업 수가 많고 코스웍이 좀 더 강조되는 미국 시스템과 코스웍 과정이 없는 영국 시스템의 중간 정도로 보기도 한다.
박사 과정에서는 본인 연구와 박사과정 전반에 대한 자율성이 많이 보장되는 만큼 코스웍을 언제 마치느냐도 본인의 선택과 계획에 따라 다를 수 있지만, 박사과정 초반인 1년 차에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나 같은 경우도 필수로 수강해야 하는 다음과 같은 다섯 개의 수업을 작년 9월부터 연달아 수강해왔다. (1) Introduction to International Studies, (2) Theorizing International Relations, (3) Qualitative Methods, (4) Quantitative Methods, (5) Global Political Economy 등 국제관계학의 기초를 다질 수 있는 수업들과 연구의 기본이 되는 방법론 수업들로 이루어져 있어서, 박사 시작 후부터 논문 작성 전에 수강하면 좋은 수업들이었다.
국제관계학에서 다루는 주제들과 일부 논의들이 어느 정도 익숙하기는 했지만, 이론 수업에서는 새롭게 배우는 이론과 개념들이 많았다. 또 질적 방법론에 익숙한 반면 양적 방법론은 생소해했던 내게, 통계 개념에 대해 익히고 R이라는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새롭게 배워 양적 분석 페이퍼를 제출해야 했던 수업은 도전적이기도 했다. 과정이 모두 끝나갈 무렵 돌아보자니 배움을 업으로 하는 학생이라는 직업의 큰 묘미와 한계를 동시에 느낀 시간들이었다. 엉켜있던 생각들로 근질근질했던 머릿속 한 부분을 긁는 듯한 시원-한 느낌을 받을 때도 있었고, 나의 부족함과 무지와 대면하면서 한동안 어지러운 마음을 안고 지낼 때도 있었다. 매주 평균 200페이지 정도의 논문들과 또 다양한 감정의 높낮이와 씨름해야 했던 코스웍 과정을 거치니, 제자리만 맴돌고 있는 것 같다고 느끼고 있다가 그래도 천천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무언 무형의 확인 도장을 받은 느낌이라 조금의 안도감이 얹힌다.
이수해야 하는 코스웍 학점의 절반은 선택 과목 수강으로 채워야 하는데, 현재까지 나는 아직 한 과목도 수강하지 않았다. 사실 연초에 새해 다짐과 함께 높은 의지와 일찍 끝내고자 하는 욕심 때문에 필수 과목들과 함께 두 가지 선택 과목도 함께 들으려 계획했지만, 필수 과목들로 허덕이고 있는 모습을 보며 제때 하나라도 제대로 하자라는 마음에 결국 둘 다 취소하게 되었다. 코로나 이전 같았다면 오프라인 수업에 묶여있지 않고자 무리를 해서라도 일찍 끝내고자 했을 텐데, 요즈음엔 대부분의 수업이 온라인으로 진행되어 해외에 있을 때에도 수강이 가능하기 때문에 가을 학기부터 필요할 때마다 하나씩 수강할 예정이다.
선택 과목의 경우 내 논문과 관련이 있는 과목들 중에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데, 필요하다면 석사 과정 수업을 들을 수도 다른 학과나 혹은 다른 대학 (특히 유럽 내 국가들끼리는 학점 교류 협약이 잘 되어있다) 수업을 수강할 수도 있다. 다른 방법으로 개인 주제에 맞게 과목 자체를 디자인할 수 있는 리딩 코스 (reading course)도 있다. 이 경우 한 가지 주제를 정해 그 분야 내 1000장 정도의 논문이나 도서를 읽고 관련 페이퍼를 써내는 방식으로 학점이 주어진다. 박사 논문을 위해 어차피 읽어야 하는 논문과 도서로 학점을 받을 수 있고 또 개인 페이스로 코스를 디자인할 수 있다는 이점 때문에 많은 박사과정생들에게 선호되는 방법이다.
인생의 중요한 시기를 함께 하는 파트너, 박사과정 지도교수
지난 8개월 동안 필수 코스웍을 끝내기도 했지만 중간에 지도교수가 바뀌는 경험을 하기도 했다. 흔히들 박사과정 중 지도교수가 바뀌는 경험은 흔하지도 않을뿐더러 박사과정 중 일어날 수 있는 가장 안 좋은 일 중 하나로 말하기는 하지만, 나의 경우에는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그나마 논문에 영향을 적게 받을 수 있는 박사과정 초반에 일어난 일이기도 했고, 또 지도교수와의 관계가 다소 특이한 스웨덴 대학 시스템 덕택이기도 하다.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 또 트로피칼 디프레션이 수학하고 있는 싱가포르나 한국의 경우에도 많은 경우 입학 전에 잠재적으로 지도교수가 될 수 있는 사람 혹은 지도교수로 지정하고 싶은 사람을 염두에 두고 박사 지원을 하고, 또 박사 지원 전에 해당 교수에게 미리 컨택을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물론 스웨덴에서도 연구 주제가 본인 것과 유사하거나 혹은 그 분야 연구에 대해 지도할 수 있는 교수를 마음에 두고 해당 대학과 학과에 지원하기는 하지만, 진학할 대학과 학과를 선택하는 데에 있어서 요인으로서의 지도교수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작은 편이다. 때문에 지도 교수가 바뀐다고 내 박사과정의 기반이 흔들리거나 하는 경우가 적다 (하지만 특정 프로젝트에 고용이 되는 경우는 이야기가 다르다). 나의 경우에도 입학 전 특정 교수를 지도교수로 정하고 지원하지는 않았고, 입학 후 한 달 여 후에 여러 가지 조건들을 고려하여 상의 끝에 첫 지도교수를 선택하게 되었다.
스웨덴에서 학사 그리고 영국에서 석사를 졸업하고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이 교수는 전문적으로 국제관계학자로 트레이닝받기도 했고 주요 국가 교육 시스템 및 국제관계학 내 다양한 논의에 익숙했기 때문에, 내가 국제관계학이라는 학문 안에서 교육을 받고 논문을 쓸 수 있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다. 특히 영국으로 대표되는 유럽 내 국제관계학파와 미국 내 국제관계학파의 논의를 뉘앙스 있게 이해하고 밸런스 있는 시각을 갖는 목적을 이루는 데에는 제격이었다. 더군다나 내 논문 프로포절이 제안하는 연구 방향 및 방식과 유사한 접근법으로 논문들을 출판해온 안보 전문 학자였으며, 대화를 할 때면 끈기 있게 경청하고 다양한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대화 상대로도 제격이고 인간적으로도 신뢰할 수 있는 교수였다. 내가 입학할 당시 그 교수는 마침 육아휴직 후 복직한 후였기 때문에 여러모로 좋은 타이밍이기도 했는데, 아쉽게도 그 교수가 올해 2월을 끝으로 다른 대학으로 옮겨가게 되어 지도교수를 바꿔야 하는 상황이 왔다.
한두 달간 당시 지도교수와 박사과정을 총괄하는 교수와 상의한 끝에 현재 지도교수로 결정을 하게 되었다. 학석박사 과정 모두 스웨덴에서 이수한 경력 등 이전 지도교수와는 프로필이 다르긴 하지만 이전 교수와 접근법이 가장 유사하고 실증적 연구에는 더 많은 경험이 있으며 또 내 연구 주제와 상당 부분 겹치기도 해서, 사실 애초에 차선으로 마음에 두고 있던 교수였다. 그나마 다행으로 코로나 2차 대유행이 오기 전 작년 9월 따로 점심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눠보기도 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내 출근 첫날이었던 교직원 콘퍼런스 날 일정 중 하나였던 퀴즈 프로그램에서 같은 팀이기도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지도교수-박사과정생의 인연을 맺은 후에는 단 한 번의 오프라인 만남 없이 온라인으로만 소통하고 있는데, 그나마 그때 얼굴을 보며 서로 캐주얼하게 이런저런 이야기할 기회를 가져서 또 그때 대화가 잘 통했다는 기억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도교수를 어떤 방식으로 정하든 어떤 이유로 인연이 맺어지든, 지도교수는 내 인생의 중요한 부분을 함께하는 파트너라는 트로피칼 디프레션의 말에 공감한다. 특히 내가 경험해온 스웨덴 대학 시스템 내에서 지도교수의 역할은 내가 박사과정을 성공적으로 마치기 위해 다양한 관점에서의 도움을 주는 조력자에 가깝다. 역할이 논문 지도에 그치지 않고 네트워킹 확대부터 심리적 지원까지 다양하기 때문에, 내게도 이 지도교수가 앞으로 남은 3년여의 박사과정 동안 내 학문적 성장의 과정에 함께하고 또 가장 큰 영향을 끼칠 중요한 파트너임에 틀림없다. 박사 시작부터 함께 하진 못했지만 앞으로 남은 여정에 현재 지도교수와의 건설적인 관계가 큰 힘이 되길 바라고 또 그렇게 되길 믿는다.
*커버 사진: 리모델링 후 옮긴 새 연구실에서 바라본 풍경. 거센 비바람이 몰아친 후 먹구름 사이로 비친 햇빛 덕분에 생긴 쌍무지개가 박사과정생과 지도교수의 관계에 대한 본 글에 어울린다고 생각해 커버 사진으로 선택했다. 2021년 4월 13일 저녁 6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