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예상치 못한 방문자 [2부 完]

by 지구인



잠시 후 두 번째 벨소리가 들려오자 나는 요한을 밀쳐내고 거실로 뛰어나갔다.


세 번째 벨소리가 들렸다. 나는 옷매무새를 고치며 현관을 향해 누구세요, 를 외쳤다. 월패드를 확인하면 얼굴을 볼 수 있었겠지만 미처 생각이 나지 않았다.


…시은 언니?


젊은 여자의 목소리였다. 나는 설마했다.


언니, 하랑이에요.


진원의 여동생이 틀림없었다.


나는 신발장의 거울을 보았다. 누가 봐도 민망한 직전의 상황을, 나는 또다시 일방적인 피해자가 되었지만 미래의 시누이에게 조금이라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억지로 웃는 연습을 하고 현관문을 열었다.


언니, 안녕하세요. 오랜만이에요.


하랑은 얼굴 가득 미소를 띠고 내게 깊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손에는 큼직한 과일바구니가 들려 있었다.


언니한테 전화해서 비밀번호 물어봐야 하나 했는데… 다행이에요.


…진원 씨 아무 말 없었는데 어떻게 된 거예요?


네. 말씀드릴게요. 저 들어가도 돼요, 언니?


아아, 네. 들어와요.


하랑은 바구니를 든 채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왔다. 소개팅이나 데이트라도 했는지 나이에 어울리는 사랑스러운 파스텔핑크의 원피스를 입고 머리와 화장도 공들여 한 편이었다. 아주 화사한 모습이었다.


남자친구 생겼어요? 오늘 아주 예쁘네요.


네? 아니에요…


하랑은 얼굴을 붉혔다. 나는 주방으로 그녀를 안내했다.


침실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요한은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일까. 다시 잠든 것일까. 내 신경은 온통 보이지 않는 그에게로 쏠려 있었다.


오빤 몰라요. 말 안 하고 왔거든요. 언니가 계신 줄 몰랐어요.


하랑이 의자에 앉으며 말했다.


진원 씨가 출장가면서 부탁해서요.


사실이었으나 방금 전 일 때문에 나는 죄인이 된 기분이었다.


네에… 오빠 돌봐줄 사람 없다고 걱정하길래…


…그럼 요한 씨 혼자 있는 줄 알고 온 거예요?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높아졌다.


하랑이 그렇게 요한을 걱정하는 줄은 미처 몰랐다. 아마도 착한 하랑은 자신의 동기가 그러하듯 요한을 친형제처럼 생각하고 있나 보… 아니, 아니. 설레는 데이트를 앞두기라도 한 듯한 하랑의 모양새가 새삼스러웠다.


오빠 상태 괜찮으면 차나 한 잔 하고 가고 아니면 옆에 좀 있다가 원이 오빠 오면 가려고 했어요. 오빤 괜찮나요? 방에 있어요?


순간 하랑의 근심어린 예쁜 얼굴에 연주의 새초롬한 얼굴이 겹쳐 보였다.


닮은 데라곤 하나 없는 두 어린 여자의 얼굴이 닮아 보이는 까닭이 그저 내 주책맞은 노파심 탓이기를 바랐다. 그러나 마치 우리의 대화를 들은 것처럼 때마침 방에서 소리 없이 나온 요한을 보고, 반사적으로 일어서며 반색하는 하랑의 눈빛에서 나는 요한이 그녀의 마음도 가져가버린 것을 알 수 있었다.


오빠!


하랑의 목소리가 마치 연주의 것처럼 느껴졌다.


그 소리의 진동이나 주파수는 아마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그대로 연주의 그것과 겹쳐질 것이 틀림없었다. 나는 어지러웠다. 여전히 요한을 가슴에 품고 있을 연주의 앳된 얼굴, 연주보다 훨씬 더 오랫동안 요한을 그리워했을 하랑의 홍조 띤 얼굴, 어린 동생의 마음을 눈치채지 못했을 것 같은 내 약혼자의 당혹스러워할 얼굴이 한꺼번에 눈 앞에 떠올랐다. 그 얼굴들은 마치 크리스마스트리의 전구처럼 점멸했다가 소용돌이처럼 모여들었다가 역방향으로 튕겨져 나갔다 돌아오기를 되풀이했다.


그리고 조금 전 침실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나는 눈을 감으며 비틀거렸다.


눈을 뜨고 보니 내 팔을 붙잡아준 것은 요한이었다. 하랑은 방에서 나오는 요한을 보느라 고개를 돌린 탓에 나를 못 보았을 것이다. 나는 말없이 요한의 손을 밀어냈다. 그의 손에서 느껴지는 높은 체온이 방안에서의 사건을 떠올리게 했다. 그래서 조리대를 사이에 두고 나와 맞은편에 서 있는 하랑의 얼굴을 차마 볼 수 없어서 나는 시선을 떨어뜨렸다.


한이 오빠…


하랑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 같았다.


진원과 요한의 이름을 끝자만 따서 애칭처럼 부르는 데서 나는 하랑이 터울이 많이 지는 두 오빠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어린 누이였음을 실감했다. 요한은 물론이고 진원에게서도 하랑의 둘에 대한 호칭을 전해들을 기회는 없었다. 하랑 역시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 앞에서는 요한의 이야기를 한 적이 거의 없었다. 따져보면 굳이 내게 그의 이야기를 할 이유도 없을 것이다.


김하랑,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요한의 목소리는 다소 쉰 듯했고 힘이 없었지만 담담하게 들렸다.


뭐하러 여기까지 왔어… 어머니 아시면 어쩌려고.


오빠… 얼굴이 반쪽이잖아. 왜 병원도 안 가고…


하랑의, 친오빠 진원을 닮은 까맣고 또렷한 눈동자가 흔들리며 순식간에 눈물이 차올랐다. 하랑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울었다. 요한의 상체가 잠시 하랑에게 기울어졌다가 제자리로 돌아왔다. 대신 그는 갑티슈를 그녀 쪽으로 밀어보냈다.


언제까지 울보일 거야… 이젠 업어서 달래줄 수도 없는데.


나는 하랑의 옆으로 가서 화장지를 손에 쥐어주고 그녀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요한은 하랑에게서 시선을 돌린 채 바지주머니에 손을 꽂았다. 아직은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등이 구부정했다.


…앉지 그래요.


하랑을 바 의자에 다시 앉히며 내가 말했으나 요한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냉장고에 등을 기대어 섰다. 하랑의 감정을 알아채서인지 아니면 단순히 그녀의 어머니가 신경쓰여서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하랑에게 철저하게 거리를 두려고 하는 것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연주에게보다 더 단호해 보이는 태도였다. 물론 하랑이 연주처럼 악다구니를 쓰며 자신의 감정을 마구잡이로 발산하는 타입도 아니겠지만. 그렇다면 감히 재단하건대 하랑은 연주보다도 더 아플 것이다.


너무 걱정 말아요. 오늘밤 지나도 계속 열이 오르면 병원에 가기로 약속했대요.


…옛날부터 병원 가기를 싫어하긴 했어요. 하도 싫어해서 원이 오빠가 너 땜에 내가 의사해야 되겠다고 그랬었는데. 아주 아프게 주사 놓을 거라고…


울음을 그친 하랑이 티슈로 눈에 맺힌 눈물을 마저 찍어내며 말했다. 보기 흉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눈화장이 번져 있었다.


얼굴 체크하고 와요, 예쁘게 화장했는데.


내가 하랑에게 속삭이자마자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벌떡 일어섰다. 나는 하랑에게 화장실을 가리켰다. 하랑은 얼굴을 붉히며 뛰다시피 그곳으로 들어갔다.


요한을 처음 만난 날 내가 그랬듯 하랑도 가방을 둔 채로 가서 내가 가방을 들어 전해주려 했을 때, 다시 화장실에서 나와 허둥지둥 가방을 받아갔다. 그 와중에도 하랑은 두 손으로 물건을 공손히 받아들고 내게 목례를 하며 고마워요 언니, 라고 속삭였다.


그러면서도 쑥스러워하는 것이 아무래도 나보다는 요한을 의식해서인 듯했다. 그저 내 착각이라면 좋을 텐데. 하랑의 요한에 대한 감정의 실체, 그를 마주했을 요한의 대응, 그리고 진원과 그 부모님의 반응… 그 연쇄 작용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숨이 찼다.


나는 진원을 떠올렸다. 한시라도 빨리 그를 보고프고 그에게 안기고픈 마음과, 그가 도착하기 전에 이곳을 떠나서 그를 피하고 싶은 마음이 동시에 들었다. 아마 하랑이 오지 않았다면 나는 그 길로 도망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때 하랑이 누른 초인종이 울리지 않았다면…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시은 씨.


요한이 나를 불렀지만 나는 답하지 않았다. 그에게 시선을 주지도 않았다. 더 이상 그와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또 어쭙잖은 사과를 하려들 것이다. 그러나 곧 하랑이 나올 것이었다. 그녀에게 일말의 의문이나 걱정을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녀가 요한에게 조금이라도 연정이 있다면 더더욱.


요한이 다시 무언가를 말하기 전에 하랑이 화장실에서 돌아왔다. 나는 손아래 시누이의 등에 묻은 굵게 물결치는 갈색의 예쁜 머리카락을 떼어주었다. 하랑은 내게 고맙다며 미소를 지었다. 나도 웃었지만 입꼬리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오빠가 앉아.


하랑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의자를 가리켰다. 요한은 팔짱을 끼고 냉장고에 기댄 채 다시금 고개를 저었다.


과일 줄까요? 아니면 마실 거?


나는 하랑에게 물어보며 의자에서 일어나 싱크대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랑은 괜찮아요 언니, 대답하고는 마치 기다렸다는 듯 내가 일어나자마자 요한을 끌어 자리에 앉히려고 하다가 멈추었다.


아, 소파가 낫겠다. 언니, 저희 소파로 갈게요.


…그래요.


하랑은 요한의 한 팔을 두 손으로 끌어다시피해서 소파로 데려갔다. 요한의 마른 몸이 휘청이며 끌려가 소파에 묻히듯 앉혀졌다.


시간이… 저녁 못 먹지 않았어요?


나는 주방에 그대로 있는 채로 하랑에게 말을 건넸다.


네, 근데 괜찮아요. 언니야말로 퇴근하고 바로 온 거 아니에요?


난 대충 챙겨먹었어요. 그럼 이따 오빠 오면 같이 뭐라도 먹어요.


오빠가 먹는다고 하면 그럴게요, 언니.


요한은 바지주머니에 다시 양손을 꽂은 채 소파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고 있었다.


오빠, 괜찮아?


하랑이 요한의 이마에 손을 짚는 것을 보고 나는 침실로 가 체온계를 챙겨왔다.


제가 할게요, 언니.


하랑이 내게서 체온계를 받아갔지만 요한은 그녀의 손길을 피해 소파 끝으로 바짝 몸을 붙여 앉았다.


그냥 기운이 좀 없어서 그래. 이제 거의 나았어.


그래도 체온은 재 봐.


됐다니까.


요한이 뒤로 젖혔던 상체를 앞으로 구부려 앉았다. 하랑은 요한 쪽으로 몸을 돌려 앉아 있었으나 요한의 몸은 오히려 그 반대쪽을 향해 있었다. 집요하게 거리를 두는 요한의 태도에 하랑이 가엾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순간 예민한 요한이 하랑의 감정을 눈치채고 있기 때문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아무리 진원 남매의 어머니에 대한 불편함이 있다 해도 요한의 태도는 지나친 감이 있었다. 아니면 내가 남자였어도 호감을 가지기에 충분한 미모의 여대생으로 자란 하랑이 요한에게도 새삼 여자로 보여서였을까.


하랑의 말 못할 가슴 아픈 짝사랑이 나을지 아니면 둘 모두의 애달픈 연정이 나을지, 도저히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적어도 하랑이 요한에게 마음이 있다는 것만 분명해 보였고 그녀의 친오빠는 전혀 눈치채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어쨌거나 이제 곧 우직한 나의 정혼자가 도착하면 나는 모처럼 세 남매가 오붓이 회포를 풀라며 배려하는 척 떠날 것이다. 진원이 있을 때가 아니면 결혼 전까지는 다시 이곳에 오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는 정말로 내 남자의 위태로운 절친과 단 둘이 있지 않으리라.


요한에 대해서만큼은 그 어떤 예상이나 상상도 통하지 않음을, 그것이 가능하다 믿었던 것은 내 오만이었음을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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