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화. 열감기

by 지구인



요한에게 도착했을 때 사장님은 아직 진원의 아파트에 머물러 있었다. 그는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는지 통로에 나와 나를 맞았다.


아, 안녕하세요.


어서 와요. 아, 시은 씨네 집인데 말이 이상한가.


사장님은 계면쩍게 웃었다. 그 역시 요한이 저지른 일의 후폭풍 때문인지 다소 피곤해 보였다.


…아직은 아니니까요. 그런데 요한 씨 많이 안 좋은가요? 가게 오픈 시간 훨씬 지났는데 계실 줄 몰랐어요.


아니아니, 심하진 않아요. 약 먹고 잠들었어요. 가게는 부탁했고… 그 친구도 잘하고 믿을 만한 친구라 괜찮아요. 이제 가면 돼요.


네, 그럼…


나는 가벼운 목례를 하고 사들고 온 오렌지주스와 우유, 즉석 죽과 수프 등을 냉장고에 넣으려고 걸음을 옮겼다. 사장님은 내가 물건을 부릴 때까지 기다렸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요한이가… 원래 열이 나면, 아프면 헛소리를 해요. 좀 내버려두면 괜찮아지니까 놀라지 말아요.


…네.


그리고…


사장님이 거칠어 보이는 턱수염을 긁으며 침을 삼켰다.


전에 그런 일도 있었는데 와줘서 고마워요.


그는 요한이 내게 찾아와 온갖 폭탄을 떨어뜨리고 간 일은 모르는 것 같았다. 그 일에 비하면 나도 어떤 느낌이었는지 제대로 기억도 나지 않는 그 일은 별것도 아니었다.


아프다는데 어쩌겠어요.


나는 얕은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사장님은 다시 한 번 수염을 긁더니 이만 가겠다고 잘 부탁한다고 말하고 돌아갔다.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으나 그는 말하지 않았고, 나도 묻지 않았다.


진원에게 들어왔어, 약 먹고 자고 있어, 라는 메시지를 보내고 나는 욕실로 가 손을 씻었다. 그리고 냉장고로 가 조금 전 넣었던 900밀리리터짜리 우유팩을 꺼내 컵에 따랐다. 그 컵을 조리대 위에 놓고 바 의자에 앉았다.


여전히 거실은 넓어 보였다.


식탁과 소파와 소파테이블은 아직도 고르는 중이었다. 어쩌면 실물을 보러 백화점이나 쇼룸에 가야 할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누구라도 집에 오면 가장 눈에 띄는 가구들이니 아무래도 신경이 쓰였고, 특히 진원의 어머니가 흡족해하면 싶었다. 적어도 안목 없다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어쩌면 하랑에게 도움을 청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자신의 어머니의 취향을 오빠보다는 훨씬 잘 알고 있을, 순하고 착한 하랑은 내 요청을 몹시 기뻐하며 제 일처럼 나서줄 것이다. 진원의 본가에는 두 번이나 가봤지만 긴장해 있던 탓이었는지 도도한 안주인이 들여놨을 가구들이 어땠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곱게 깔린 잔디에 잘 가꾸어진 정원수들이 자리한, 정원에 가까운 널찍한 마당을 갖춘 2층짜리 단독주택의 위용에 이미 기가 죽어버린 탓이기도 했다.


우유 두 컵을 마시고 난 후 나는 그 컵과 주방세제와 가방에서 꺼낸 휴대용 칫솔을 들고 다시 욕실로 가 구강청정제를 입에 머금고 간단히 설거지를 했다. 빠르게 컵을 씻고 난 다음에는 물을 두 손으로 받아 여러 번 입안을 헹구었다. 싸구려 수전이 아니라 손잡이의 움직임이 부드럽고 물소리도 세지 않아 만족스러웠다.


양치를 시작하는데 칫솔거치대에 나란히 꽂혀 있는 두 개의 칫솔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진원의 것 옆에 요한의 것임이 분명한 새 칫솔이 있었다. 내가 진원을 만나기 전 이미 요한이 그의 옆에 있었던 것처럼, 내 신혼집의 칫솔꽂이에는 내 것보다 먼저 요한의 칫솔이 담겨 있었다.


나는 진원의 옛집에도 내 칫솔을 칫솔통에 넣어두지 않았었다. 부모님과 함께 사는 처지라 그의 집에서 자는 일이 드물기도 하거니와, 평소에 휴대용 칫솔과 치약을 갖고 다니기 때문이었다.


나는 요한이 내게 했던 말들이 다시금 머릿속에 맴도는 것을 떨치기 위해 양치질에 집중했다. 최대한 소리 없이 입안을 헹구는 것은 꽤 번거로웠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손을 씻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전화기가 조리대 위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진원이었다.


응. 어디쯤이야?


- 절반 정도 왔어. ㅇㅇ 휴게소야.


뭐 좀 먹었어?


- 가서 먹지 뭐. 괜찮아.


너무 늦잖아.


- 빨리 가는 게 더 중요하니까. 점심을 늦게 먹었어.


자기 건강과 안전이 더 중요해. 나 더 있어도 되니까 천천히 와.


- 녀석은 어때?


아직 나 온 지 30분도 안 지났어. 사장님이 괜찮다고 하셔서 아직은 안 봤어.


- 에이, 그래도 사람이 아픈데 오자마자 들여다봐줘야지. 부탁해, 시은아.


…알았어. 우동이라도 먹어. 금방 나오고 금방 먹을 수 있잖아.


- 그래, 알았어.


운전 조심해.


- 응. 이따 봐.


나는 전화를 끊고 침실 쪽으로 갔다. 조심스레 방문을 열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요한이 머리에 물수건을 얹은 채 잠들어 있었다. 내가 고르고 골라 들인, 나는 아직 누워보지도 못한 새 침대에 말이다. 아픈 사람을 넓지도 않은 바닥에 뉘일 수는 없는 일이고 이미 진원에게 전해들어 알고도 있었지만, 직접 눈으로 보는 것은 역시 쉽지 않았다. 잠깐 보았을 뿐이지만 별다른 이상은 없는 것 같아 나는 다시 방문을 닫으려 했다.


그때 요한이 앓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흐느끼는 소리로 바뀌는 것 같았다.


엄마. 엄마…


나이 서른이 넘은 남자가 엄마를 부르며 울고 있었다. 꿈결에 중얼거리는 듯 작은 소리였으므로 나는 한 발짝 방안으로 들어가 귀를 기울였다. 불을 켜지 않은 방안은 방문 틈으로 들어온 거실의 불빛과 반만 열어놓은 커튼 밖 창문으로 들어오는 어슴푸레한 해질녘 밝기 덕에 형체는 알아볼 수 있었다.


엄마, 가지 마요…


요한이 뭐라 더 중얼거리는 듯했으나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 수 없었다.


다만 마지막에 어머니, 라는 말만 들렸다. 그가 부른 어머니가 아들이 어릴 때 집을 나갔다는 생모인지, 십 년 가까이 함께 지냈지만 지금은 서로 불편한 관계가 된 양모 격의 진원의 어머니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나로서는 알 수 없었다. 요한은 알까. 깨어나면 기억할까.


혹시 그가 잠에서 깨 나를 보고 놀라거나 민망해할까 봐 나는 숨을 죽였다. 다행히 그는 반대쪽으로 뒤척이더니 다시 잠든 것 같았다. 그 바람에 물수건이 베개 위로 떨어졌지만 나는 그대로 한 걸음 다시 물러나와 조용히 방문을 닫았다.


나는 방문 앞에 한동안 그대로 서 있었다.


요한은 내게 복잡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존재였다. 그의 아름다운 외모에서 비롯하는 본능적 떨림은 이제 거의 사라지고 없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으로 삼을 만한 점이었다. 그의 위태로운 말과 행동들이 당혹스럽고 불편하고 화도 났지만 그에게는 그럴 만한 사연이 있었다고 하니, 그의 괴로운 심정을 생각하면 나에게 저지른 선을 넘는 언행들도, 쉽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참아줄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무엇보다 참을 수 없는 것은, 그래놓고는 정작 스스로를 견디지 못하고 일탈을 일삼거나 병이 나버리는 그의 나약함이었다. 내가 강해서가 아니었다. 나 역시 약한 사람이기 때문에, 내가 요한이었다면 더 심하게 잘못돼버렸을지 모른다는 직감 때문에 그를 보는 것이 괴롭다는 것을 나는 깨달았다. 내가 애써 모른 척하고 있고 남들에게는 철저히 숨기고 있는 나의 모습을 그에게서 봐야 하는 것이 싫었다.


왜 당신은 마음껏 미워할 수도 없게 그 모양 그 꼴이야. 그렇게라도 사랑하는 사람 옆에 있으니 행복해? 그 사람 옆자리는 내 것이라면서 정작 그 자리를 지금 차지하고 있는 건 당신이잖아. 내쫓을 수도 없게 당신은 또 병이 나 그러고 있고. 그 사람뿐 아니라 나까지 당신을 돌보게 만들고… 이게 대체 무슨 꼴이냐고. 대체 누구에게 하소연할 수 있겠어. 이 기막힌 상황을…


나는 마음속으로 요한을 원망하고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숨을 내뱉으며 진원을 떠올렸다.


요한과 나를 위해 급한 마음으로 고속도로를 타고 열심히 올라오고 있을 그를 생각해서라도, 이왕 온 것이니 부탁받은 일은 제대로 하고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언가 할 일이 생기면, 그에 집중하면 다른 생각들은 잠시 잊을 수가 있다. 나는 요한의 체온을 확인하고 물수건도 갈아줘야 한다는 것을 애써 떠올렸다.


내가 물수건을 만들어 침실로 되돌아갔을 때 요한은 다시 열이 오르는지 신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나는 방문을 열어두어 거실의 조명이 방안을 계속 비추게 했다. 조심스레 그의 귓속 체온을 재보니 38.3도였다. 나는 새 수건을 그의 이마에 올려주고 베개에 떨어져 있던 이전 수건을 집어들었다. 물수건을 그냥 머리에 올려놓기보다는 몸을 닦아주는 것이 좋다고 들었지만 내가 요한에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요한은 더욱 까칠해진 얼굴로 앓고 있었다.


가까이서 보니 매끈했던 얼굴에 수염들이 듬성듬성 돋아나 있었고 입술은 바짝 메말라 있었다. 평소처럼 깔끔하지 않은 모습이 오히려 더 인간적이고 현실적이었다. 우습게도 그 순간의 요한이 지금까지 본 모습 중에 가장 현실감 있게 느껴졌다. 그가 나와 같은 종족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나는 물수건을 그의 이마에서 떼어 얼굴이라도 닦아주려고 했다. 또 나쁜 꿈을 꾸는지 요한이 몸을 뒤척였다.


…추워…


요한의 메마른 입술이 달싹였다. 내가 그의 가슴팍 아래 내려가 있는 이불을 끌어올려 덮어주려는 순간 요한이 아픈 사람이라고는 믿을 수 없을 정도의 강한 힘으로 나를 끌어안았다.


나는 그에게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비록 잠결일지라도, 아니 꿈결이어서인지 한창나이의 성인 남성의 힘을 이겨내기는 역부족이었다. 선이 가늘어 진원에 비하면 유약해 보였던 요한은 워낙에 살이 없어 그렇게 보였던 것뿐이었다.


요한은 어느새 몸을 반쯤 일으켜 세워 나를 안은 채 내 가슴에 깊이 얼굴을 묻었다. 여름이라 얇은 겉옷과 속옷이었으므로 그의 또렷한 이목구비가 느껴질 지경이었다. 그의 피부와 숨결에서 열감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또 그의 향기가, 은은한 장미향이 느껴졌다. 순간 코로나에 걸렸을 때처럼 머릿속이 핑 도는 듯한 어지러움이 느껴졌다.


나는 가까스로 그의 마른 등을 주먹으로 쳤다.


정신차려요! 이거 놔!


그러나 나는 풀려나는 대신 침대에 거칠게 눕혀졌다. 나는 온몸이 굳어버렸다. 전에 목이 졸릴 때는 눈이라도 감았지만, 이번에는 눈조차 감아지지 않았다.


나를 내려다보는 요한의 다 떠지지도 못한 눈꺼풀 사이로 눈동자가 어둡게 빛나고 있었다. 그의 상체가 내게 기울어지는 순간, 초인종이 울렸다. 예상치 못한 소리에 나는 놀랐고, 요한도 소리를 들었는지 정신이 돌아오는지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열린 방문 쪽으로 고개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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