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고백 (2)

by 지구인



어머님하고 대체 무슨 일이에요? 혹시 그거 때문에 진원 씨한테 더 집착하는 건가요?


그런 생각은 해본 적 없는데… 그런가? 그냥 생각하면 불편하고 또 죄송하고 그래도 어쨌거나 10년 가까이 날 돌봐주신 분인데… 진원이 말처럼 내가 먼저 풀어야 되는 게 아닌가 싶다가도, 그냥, 아직은 그분의 눈길을 참기가 어려워요.


요한의 얼굴에 순식간에 불편한 기색이 차올랐다.


참, 그림.


요한이 진원의 모친 생각에서 벗어나려는 듯 불쑥 말했다.


요새 시간 많으니까 그림 그릴까 해요. 잘 나온 사진 골라봐요. 아니면 앞으로 촬영할 사진 중에 고르던가요.


그림요?


네. 결혼선물로. 말했잖아요. 진원이가 너무 많이 칭찬해줘서, 진원이한테 잘 보이려고 한때 열심히 했었죠. 지금도 취미예요. …이제 그만 가죠.


요한이 찻잔을 비우고 일어섰다. 그러나 나는 아직 그를 보낼 수 없었다.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하겠다는 거예요?


…앞으로 뭐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은 별로 없는데.


요한이 다시 자리에 앉으며 대답했다.


몸 생각해요. 진원 씨랑 사장님 너무 걱정해요. 사장님도 요한 씨 친동생처럼 생각하시는 것 같던데.


맞아요.


요한은 또 쓸쓸히 웃었다.


형한테 너무 감사하죠. 죄송하고요. 제대하고 나서는 형 아니었으면… 형이랑 같이 살면서부터는 진원이도 안심하고 자기 할 일에 집중할 수 있었고. 안 그랬으면 시은 씨 만나서 연애하고 결혼하겠다고 못했을지도 몰라요. 몇 년은 더 걸렸을걸요. 그러고 보니 시은 씨도 형한테 신세진 거네요.


그가 새로운 발견이라도 한 듯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러나 나는 그가 어색한 분위기를 조금이라도 돌려보기 위해 일부러 그러는 것 같아 더욱 마음이 불편해졌다.


요한 씨는 그러니까 일단은… 진원 씨 옆에 계속 있고 싶은 거… 아닌가요?


나는 원래의 주제로 돌아가서, 차분하게 말하려 애썼다.


그렇죠. 계속 있고 싶죠. 내가 자꾸 사고치니까 시은 씨는 잘 못 보겠지만.


요한이 담담히 말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 수 있어요? 계속 마음을 속이고… 진원 씨한테.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지 않나요? 아까 다 말한 거 같은데. 그냥 진원이 옆에 지금까지처럼 형제처럼, 절친으로 지내는 것밖에. 진원이가 선택한 사람은 시은 씨고, 시은 씨도 진원이 포기 안 할 거잖아요.


결혼까지 앞두고 내가 포기해야 하나요?


내가 욱해서 목소리를 높였지만 요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싱긋 웃었다.


아니 결혼 상관 없이. 그리고 진원이도 시은 씨 아마 포기 안 할 거예요.


왜 우리가 서로를 포기해야 하는데요?


아니요. 그런 건 없죠. 당연히 그냥 나 혼자 생각이에요. 내가 혼자 생각해 본 거예요.


…부질없는 생각이에요. 내가 아니더라도 늦지 않게 결혼할 타입이에요, 그 사람.


진원은 내게 첫눈에 반하고 사랑하고 그래서 결혼하고 싶다고 말했고, 아마도 거짓은 아니겠지만 냉정히 말해 꼭 그 상대가 나일 이유는 없었다. 나는 그가 결혼할 여자를 만나고 싶어할 때 운 좋게 그의 눈에 들었고 감사하게도 그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는 요한이 지적했듯 결혼시장에서 탐낼 만한 조건의 소유자였지만 그런 식의 결혼은 원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선택한 여자라면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서라도 추진할 낭만주의자였다. 그리고 ‘여우 같은 마누라와 토끼 같은 자식들’과 사는 결혼생활에 충실할 보수주의자이기도 했다. 그는 좋은 남편이자 훌륭한 아버지가 될 것이다. 내 아이들은 나보다 훨씬 유복하게 자랄 것이다.


그러게요. 나도 내 마음을 모르겠어요. 그냥 진원이가 내게 특별하다는 거, 이 세상에서 그래도 나를 가장 사랑해주는 사람이라는 거, 내가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녀석뿐이라는 거… 그거 외에 다른 것들은… 잘 모르겠어요.


내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요한 씨한테.


요한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 것도 없어요. 하고 싶은 대로 해요. 내 이런 마음, 내가 한 말들, 진원이한테 말하고 싶으면 말하고,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말고. 나 참을 수 있을 것 같으면 만나주고, 못 참을 것 같으면 만나지 말고. 그냥 그러면 되지 않을까… 난 그냥 그래요.


말을 마친 요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그대로 앉아 있었다. 일어날 힘이 없었다.


근데 내가,


요한이 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내가 여자한테 키스한 거, 내가 먼저 한 거는 그날, 시은 씨가 처음이었어요.


그가 마스크의 고리를 다시 귀에 걸며 말을 이었다.


만약 그날 형이 말리지 않았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런 생각 잠깐 했었어요. 그리고…


요한은 잠시 뜸을 들였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


…먼저 갈게요. 만나줘서 고마워요.


그는 그대로 가버렸다.


나는 그저 멍하니 그가 나간 가게 출입문을 바라보다가 테이블에 놓인 찻잔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자동적으로 나는 바닥에 조금 남은 차를 마저 마셨다. 이미 식어버린 차는 에어컨을 틀어놓은 공기를 머금어 차갑게까지 느껴졌다.


그러니까 요한은 진원을 사랑하고… 거기에서 내 혼잣말은 멈추었다. 요한 자신도 정확히 모르겠다는 그의 마음을 내가 규정지을 수는 없었다. 진원도 요한을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요한이 원하는 수준까지는 아니다. 그리고 나는… 진원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요한을 어디까지 견딜 수 있을까.


진원을 나누고 싶지 않은 마음은 나에게도 있었다. 그럼에도 요한과 어느 정도는 나누겠다 각오도 했었다. 그리고 조금 기다리면, 시간이 흘러 요한에게도 사람이 생기면 마침내 해결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가 될지 모를 그때까지, 정확히는 아니라도 요한의 속마음을 듣고 난 앞으로는 진원과 함께 있는 그를 보기가 더욱 힘들 것 같았다. 요한 역시 진원과 함께 있는 나를 견디는 것이 힘들 것이다. 그동안 요한이 내게 보인 오락가락한 행태가 어느 정도 이해되었다.


그때 엄마에게서 왜 오지 않느냐는 메시지가 온 것을 보았다. 곧 가겠다는 답장을 하고 난 직후에 진원에게서 전화가 왔다. 나는 만감이 교차한다는 말을 실감하며 그의 전화를 받았다.


- 퇴근했지?


아니, 아직.


- 왜?


그냥 차 좀 마시고… 이제 가려고.


- 왜 무슨 일 있었어?


아니야. 그냥. 자기는? 언제 퇴근해?


- 응. 나도 지금 가려고. 생각보다 빨리 끝났어. 얼른 들어가야지.


…불 꺼진 집에 안 들어가도 돼서 좋겠네.


- 응. 자기 있는 것보다야 못하겠지만, 옛날 생각도 나고 나는 요새 좋아.


많이 좋아?


- 응. 어어… 가만, 이거 함정인가?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그런 거 아니야. 그냥 둘이 잘 지내는 거 보기 좋아서 그래.


- 남자끼리니까 편한 것도 무시 못하지, 사실.


그래.


- 뭐야, 자기 좀 이상하다. 그러고 보니 목소리에 기운이 없네. 무리하지 말고 먹어. 그러다 식장에서 쓰러진다.


식이조절은 사실 요한을 피하기 위한 핑계에 가까웠다. 예비 신부로서 최소한의 신경이야 쓰고 있지만 직장 생활을 하면서 과도한 다이어트는 어차피 무리였다.


술이야 원래 즐겨 마시지 않았고, 현재로서는 저녁에 먹는 양만 조절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술을 마시고 싶다. 마시고 취해버렸으면 좋겠다. 아니 아예 술 취했을 때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으면 좋았을걸. 제대로 기억 못했으면 좋았을걸.


- 자기야?


응. 조심해서 들어가.


- 그래. 이따가 잠깐 보러 가도 돼?


요한 씨 밤에 혼자 놔두면 안 되잖아.


- 데리고 가면 되지. 잠깐 차에 있으라고 하면?


진원과 함께 있는 모습을 요한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진원의, 나에 대한 애정행각을 보여주기 싫었다. 그가 진원을 보는 눈길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가 나를 보는 눈길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동안 이미 요한은 참고 견뎌왔다는 것을 이제는 알았다. 그러나 나도 견딜 수 있을지는 자신 없었다. 이제는 요한과 단 둘이 보는 것보다도 진원까지 셋이서 만나는 것이 내게는 더 힘든 일이 되어버렸다.


뭘 그렇게까지. 그냥 있어. 아직 며칠 안 됐잖아.


- 그럴 줄 알았지. 하하, 농담이었어. 이따 다시 전화할게.


응.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카페를 나왔다.


너무도 많은 생각이 한꺼번에 들었고, 동시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집에까지 오는 길은 그저 습관적으로 몸이 움직였을 뿐이었다. 이미 나는 요한의 말들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의 말들이 귓가에서 반복 재생되고 있었다.


나는 서둘러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들었다가, 이내 동영상 공유 앱을 켰다. 평소에는 보지 않으려 노력해온 1분 이내의 짧은 영상들을 보며, 조금이라도 웃기지 않거나 자극적이지 않으면 바로 넘겨버렸다. 집에서는 무섭고 잔인한 영화나 드라마를, 아니면 화려하고 시끄러운 액션 영화를 쉬지 않고 봐야겠다, 나는 이번에도 그렇게 회피하고 잊어버리기로 했다.


나는 내가 요한의 말들을 곱씹으며 고민하고 그래서 무엇이든 결심하고 그 결과를 감내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지 않다는 것만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요한의 행동의 배경을 궁금해하고, 그 궁금증을 못 이겨 단 둘이는 절대로 만나지 않으려고 했던 결심을 어긴 대가를 톡톡히 치러야 하는 것도 알았다.


그러니 나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것이다. 진원과의 결혼식, 그것에만 집중할 것이다. 그것이 나의 결심이었다.


마치 해탈한 듯 초연해 보였던 요한은 그러나 술병이 났다.


나를 만나고 돌아간 그날밤, 진원이 자는 동안 몰래 온갖 술을 퍼마시고 다음날 아침에 주방에 뻗어 있었다고 했다. 옆에는 구토물이 그대로 있었고 요한은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진원은 요한이 제대로 깨어나는 것을 보고 오후에야 출근했다. 바의 사장님한테 퇴근 때까지 요한을 부탁했고 다행히 별일은 없었지만 속을 다스리고 나니 이번에는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진원은 급한 출장이 다음날 일정으로 잡혀버렸다.


진원은 입원을 시키려 했지만 요한은 동네 의원에 가는 것마저 완강히 거부했다. 그렇다고 사장님의 집으로 데려다 놓기에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더구나 사장님은 자신의 집은 시장통에 있는 상가주택이라 조용히 쉬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난감해했다.


그래서 결국 내가 불려가게 되고 말았다.


정말, 정말 미안한데 두어 시간만 부탁해, 시은아. 열이 오르락내리락해서, 수시로 체온을 재야 할 거 같아서 그래.


진원은 절박하게 내게 매달렸다. 그는 혹시라도 내가 요한에게 더 부정적인 생각을 갖게 될까 봐 염려했던지 그의 상태를 알리지 않았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사장님은 요한 없이 주말 영업을 가까스로 버텨내고 한숨 돌릴 새도 없이 모처럼의 단체 손님 예약을 받아놓고 있었다. 아무래도 요한의 부재가 매출에 타격을 미치고 있었으므로 취소할 수는 없었다. 그나마 평일이라 요한의 대타를 구할 수 있어 불행 중 다행인 형편이라고 했다. 그는 진원에게서 내가 가겠다는 답을 전해듣고서는 내게 따로 전화해 연신 고맙고 미안하다고 했다. 거절했더라면 그의 원망까지 살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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