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쩐 일이에요.
요한은 앉혀 둔 채, 홀로 주문하고 받아온 따뜻한 카모마일 차 두 잔과 피낭시에가 몇 개 담긴 접시를 테이블에 놓으며 내가 물었다.
그제야 요한이 마스크를 벗었다. 여전히 해쓱한 얼굴이었다. 검은색 라운드 티셔츠에 대비되어 하얀 얼굴이 창백해 보였다.
그러나 아직은 젊은 그의 얼굴은 약간 패인 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아름다웠다. 남자의 얼굴이 청순가련해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을 나는 그를 보고 알았다. 한 손에 감겼던 붕대는 이젠 대형 반창고로 바뀌어져 있었다.
오늘은 진원이가 도저히 일찍 못 온다고 해서… 알죠?
네.
언제까지 있을지 모르지만 내 옷이랑 물건도 가지러 나갔다 와야겠는데, 갑자기 생각이 나더라고요. 한 번은 따로 만나 얘기하고 싶어서.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왜 아무 연락도 없이 왔을까. 엇갈리거나 내가 혹시라도 일정이 있으면 어쩌려고.
안 되면 어쩔 수 없다 생각하면서, 그냥 기다렸어요. 시간도 많고.
요한은 마치 내 의문을 읽은 듯 말했다.
그날…
그의 빠르지 않은 말이 더 느려졌다. 나는 그의 말을 가로챘다.
어떤 그날이요? 내가 알고 싶은 건 내가 음식 가지고 간 지난 토요일 일인데요.
아니 다른 날…
다른 날… 그날은 사장님이 전해주셨어요. 본인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걸 내가 이제 와 다시 물어본다고… 혹시 뭐 다르게 생각난 게 있어요?
아니요. 별로…
그렇다면 얘기하고 싶지 않아요, 그날 일은. 난 그냥 요한 씨가 술 취해서 실수했고, 내게는 접촉사고 같은 거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그날 둘이… 둘이 키스하는 거, 진원이가 시은 씨한테. 봤어요.
요한의 말에 나는 그날의 일이, 정확히는 그날 고동치던 심장박동과 호흡하기 힘들었던 일이 떠올라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가고 있었어, 시은 씨한테. 나도 모르게 그러고 있었어…
요한이 중얼거렸다.
역시 색다른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렇다면 나는 또 다른 그날에 대해서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요한의 말이 이어졌다.
내가 진원이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녀석처럼 되고 싶어 하는지 시은 씨는 몰라요. 그래서였던 것 같아. 진원이처럼 되고 싶어서. 그 순간 진원이가 된 것처럼, 나도 모르게…
그 사람이 된 것처럼 그랬다고요?
나는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해 못하겠죠. 나도 말하면서 이상하다고 생각했어요.
요한이 한숨을 쉬었다.
어려서부터, 같이 살기 전부터도 진원이가 좋았어요. 제일 좋았어요. 벌써부터 똑똑하고 뭐든지 잘하고 자신감 넘치고 활달하고. 어른들이나 애들이나 모두 좋아했어요. 그러면서 또 착했어요. 불쌍한 건 그냥 두고보질 못하고. 어려서는 눈물도 많았어요. 그 모든 게 다, 내 눈에는 멋있었어요. 진원이처럼 되고 싶었어.
내가 궁금해했던, 진원과 요한의 어린 시절 이야기였으므로 나는 잠자코 있었다. 요한은 마치 그 시절이 눈 앞에 선연한 듯한 얼굴로 조곤조곤 말을 이어갔다.
같이 살게 된 게 그래서 너무 좋았어요. 그때야 아무것도 모를 때니까 그저 좋기만. 고등학교, 결국 자퇴하긴 했지만 진원이 없었으면 그 정도도 못 버텼어요. 그리고 동반입대하지 않았다면… 그것도. 진원이는 나 때문에, 나한테 맞춰서 같이 가줬어요. 그런 녀석이에요. 나한테 둘도 없는, 친구 이상의, 내게 하나뿐인 가족… 그래서 나도 모르게 그날 그랬나 봐요. 말도 안 되는 거지만.
나는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웠다.
누군가를 지독히 좋아하고 동경해서 그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마음은, 나는 그런 적이 없어 체감하지 못하지만, 그럴 수 있을 것도 같다. 하지만 그 일은, 차라리 술에 취한 탓으로 나를 연인이나 썸녀와 같은 여자로 착각했다거나 아니면 차라리 솔직하게 술기운에 몸이 달아오른 터에 마침 주변에 있던 여자가 나였기에 본능에 충실하고 말았다는 류의 변명이, 더럽지만 훨씬 그럴 듯하게 들릴 것 같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나는 진원 씨인 줄만 알았어요. 그건 확실히 말해두고 싶어요.
네. 들었어요.
요한 씨인 줄 알았으면 그렇게 가만히 있지 않았을 거예요.
그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장님한테 말씀 들었죠. 그 사람한텐 말하지 않기로 한 거.
네.
하지만 언제까지 숨길 수 있겠어요? 언젠가는 알게 될 것 같단 말이에요. 세상에 영원한 비밀은 없으니까. 그나마 나는 그 사람인 줄로만 알았다는 명분이라도 있는데 요한 씨는, 진원 씨를 너무 좋아하고 동경해서 자신도 모르게, 빙의된 것처럼… 귀신이라도 씌인 것처럼 그래서 그랬다… 진원 씨가 이해할까요?
모르겠어요. 이해해줄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죠.
요한은 뜻밖에 담담히 대답했다. 우문현답이었다.
그러면 그 음식 먹었던 날, 내가 가져갔던 날, 그날은 왜 그러고 있었던 거예요? 난 사실 그게 더 궁금해요. 진원 씨를 좋아하고 동경한다는 게 설마 성적으로… 성적으로 그렇다는 거예요?
다소 민감할 수 있는 질문이었으나 요한은 여전히 침착했다.
많이 고민했죠. 내가 혹시 동성애자인가 아니면 양성애자 뭐 그런 건가… 그런데 나이 들고 이것저것 찾아보고 생각하고 나름의 결론을 내렸어요. 나는 그저 진원이에게만, 오직 진원이에게만 그렇다는 거. 다른 남자들한테는 그런 감정 느껴본 적이 없어요. 진원이에게는… 뭐 성적으로도 그런 건지도 모르겠네요. 그런데 그보다는, 그저 곁에 있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는 게 더 큰 거 같아요. 시은 씨처럼요. 근데 안 되는 거잖아요.
요한은 쓸쓸히 웃었다.
차라리 내가 여자라면 진원이랑 결혼할 수도 있겠다, 평생 옆에 가장 가까이 있을 수도 있겠다, 그런 생각은 여러 번 했었어요, 십대 때. 진원이가 받아준다면? 난 게이든 성전환이든 했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안 되잖아요. 남자랑은 볼만 대도 자지러지고 그쪽으로는 꽉 막혔는데. 내가 이런 생각까지 했던 거 알면 날 역겨워할 것까지 난 알아요.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가 뭐예요?
진원이처럼 되고 싶지만 그럴 수 없고 진원이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고 싶지만 그것도 안 되고… 그냥 그렇다고요. 녀석을 가질 사람은 결국 시은 씨니까. 난 인정할 수밖에 없다고요.
인정할 수 없다고 했잖아요… 우리집 앞에 왔을 때.
그제야 요한이 약간 당황했다.
그건… 그날 갑자기 찾아간 거…
우리집 몇 층인 건 어떻게 알았어요? 정말 알아서 말했던 거예요?
요한은 바로 답하지 않았다. 대신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그러고도 잠시 가만히 있었다. 그러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사실 전부터 알고 있었어요… 시은 씨에 대해.
그의 폭탄선언은 어디까지인 걸까. 뒤통수가 지끈거리기 시작하는 것을 나는 느꼈다.
진원이가 시은 씨 만나고서 이번엔 진짜라고, 결혼할 것 같다고, 결혼해야겠다고 말했을 때 대체 어떤 여잔지 너무 궁금했죠. 그 전까지는 그런 얘기 한 적 없었으니까. 그리고 청혼하겠다고 했을 때 설마 만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설마설마하면서 일단은 두고 봤죠. 그리고 시은 씨가 만만치 않다고 고민하길래 그냥 아니겠지 아니면 좀 더 걸리겠지 했는데, 얼마 지나지도 않아 이젠 될 것 같다고 하길래요. 집은 어디고 직장은 어디고 어떻게 사는지, 혹시라도 이상하거나 나쁜 여자는 아닌가 좀 알아봤어요.
…지금 날 미행했다는 건가요? 뒷조사했다는 얘기네요.
말하자면 그런 거죠. 멀리서 본 적도 몇 번 있어요.
불법사찰만으로도 기가 막힌데 더 기가 막힌 것은 요한의 태도가 너무 거리낌없다는 점이었다. 요한이 어이없어하는 내 얼굴을 보더니 살짝 웃었다.
미안하지만 그건 미안하지 않아요. 진원이가 결혼하겠다고 나선 여자였다면 난 누구였대도 그렇게 했을 거니까. 진원일 안 믿는 거 아니고 못 믿는 것도 아니지만, 또 의외로 순진한 구석이 있단 말예요. 아무 여자한테나 줄 수는 없었어요. 진원이, 어디 내놔도 꿀릴 데 없잖아요? 결혼정보회사에서도 모셔가려고 난리였는데. 솔직히 시은 씨보다 더 좋은 조건의 여자 골라서 갈 수 있잖아요?
요한에게서 진원의 어머니가 애써 입밖으로 내지 못한 말들을 대신 들을 줄은 몰랐다. 둘 사이가 껄끄러운 것이 이해되지 않을 정도로, 요한은 그 순간 내게 제2의 시어머니나 다름없었다.
그래서 난 통과 못했다는 건가요? 그날 쫓아와서…
아니, 아니요. 금방 알았어요. 좋은 여자고 진원이한테 어울리고 둘이 잘살겠다.
요한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나 그날 진원이랑 같이 있었잖아요. 진원이가 자는데, 잘 때 은근 귀엽잖아요. 어렸을 때 얼굴도 나오고… 그럼 나도 어렸을 때로, 같이 살았던 때로 돌아가는 것 같아서 자꾸 보게 돼요. 그렇게 자는 모습 보는데 시은 씨를 부르더라고요. 미치겠더라고요. 정말 줘야 하는구나. 완전히 가버리는구나. 그래서 쫓아갔었죠. 견딜 수가 없어서. 그날 조금만 술 더 마셨었으면 정말 뉴스에 나올 뻔했어요.
지금 그쪽이 하고 있는 말들이 모두 뉴스거리거든요? 라고 쏘아붙여주고 싶었지만 나는 그 말을 입밖으로 낼 기운이 없었다.
마음 한구석에는 시은 씨가, 목까지 졸렸으니 겁먹고 도망치길 바랐는지도 모르겠어요. 완전 미친놈이었으니까. 근데 그러지 않았죠. 진원이한테 말도 안 하고 그냥 없던 일처럼, 그냥 내가 진원일 많이 좋아해서 잠깐 선을 넘은 거라 생각하는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사실은… 시은 씨 인정할 수밖에 없다는 거 알고 있었어요. 근데 쉽지가 않더라고요. 진원이는 내가 가진 유일한 사람이니까.
요한의 목소리가 더욱 낮아졌다.
나는, 시은 씨가 원한다면 내 이런 마음 다 진원이한테 털어놓을 생각이에요. 어쩌면 그냥 다 털어놓고 손절당하는 게 낫겠다라는 생각도 많이 했어요. 어떻게든 되겠지.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아니면…
흐려진 요한의 말은 한참 동안 끊겼다. 그가 구운 과자 하나를 집어 천천히 씹어 삼켰다. 나는 그를 보고만 있었다.
혹시라도, 진원이에 대해 걱정할 건 없어요. 그저 나를… 내가 가엾고 불쌍해서 챙겨주려는 것뿐이에요. 착한 녀석이라 나를 외면할 수가 없는 거야.
…그것만은 아닐 거예요.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애초에 우리의 시작은 그런 거였으니까. 그래도 시은 씨 나타나기 전에는 내가 첫 번째였으니까. 그래요, 나를 좋아하고 아끼는 마음도 있긴 하겠죠. 알아요. 하지만 내가 진원이를 사랑하는 것만큼은 절대 아니죠.
아무렇지 않게 진원을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요한에게 나는 일종의 질투심을 느꼈다.
내가 진원일 사랑한다는 말이 이상한가요?
요한이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물었다. 나는 답하지 않았다.
내가 여자였다면 진원이 절대 포기 안 했을 거예요. 어쩌면 진원이도 나를 받아줬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또 그런 생각도 들어요. 내가 여자였다면 이렇게까지 진원이 옆에 있지 못했을 거다. …어머니가 가만두지 않았을 테니까.
진원의 모친 이야기는 마치 빵 부스러기처럼, 끊어진 목걸이의 흩어진 구슬처럼 진원과 요한의 말에서 조각조각 묻어나왔다. 그러나 아직까지 나는 그 조각들만으로는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