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4년 4월 16일. 난 부산역에 있었다. 근처 초량밀면에서 친구들과 밀면을 먹고 있었다. 부산역 광장에서 집회를 마친 뒤였다. 식당에 있는 티브이에서 여객선 한 척이 침몰하는 영상이 나오고 있었다. '세월호'라는 배가 침몰하는 중이고 그 안에 수학여행을 가던 청소년들이 타고 있었다는 속보였다. 바로 뒤 자막으로 '전원 구조'라는 자막이 떴다. 많은 사람들이 죽을 뻔 했는데, 다행히 구조가 되서 잘 마무리 되었구나. 세월호가 침몰하던 날 뉴스를 보고 이렇게 생각했다. "다행이네."
그 뒤로 며칠이 지났지만 가라앉던 배는 나에게 큰 관심사가 아니었다. 해야할 일이 많았다. 밀양 주민들이 공권력에 맞서서 싸우고 있었다. 핫 팩 한 개라도 더 모으기 위해서 동분서주했다. 수학여행 가던 중에 버스가 전복되거나 하는 사고는 생각보다 자주 있는 일이었다. '당연히 누군가 구했겠지'하는 가벼운 생각 뿐이었다.
- 페이스북을 내려보다 '전원구조가 오보다'라는 글을 봤다. 언제나 돌아다니는 음모론이겠거니 하고 무시했다. 공영 언론사에서 침몰한 배에 있는 사람들 구조 사실을 가지고 오보를 낼리가 없었다. 마음에 안드는 구석이 가득한 나라지만 그래도 눈 앞에서 침몰하는 배에 있는 사람 정도는 당연히 구할 수있는 정도 수준은 되는 나라였다. 사고가 나면 정확한 소식이 언론을 통해 나오고, 국가가 그들을 구해내는 일은 당연했다. 의심하지 않았다. 상식이었다.
며칠이 더 지나도 음모론은 잦아들지 않았다. 더 늘어났고, 근거가 생겼다. 배는 침몰했고, 299명이 사망했다. 5명은 아직 발견조차 하지 못했다. 유가족들은 영정사진을 안고 방송사와 청와대로 향했다. 경찰은 그들은 고립시켰다. 4월 16일. 세월호 참사라고 말하는 그 날의 기억.
- 배가 침몰했고, 사망자가 확인되었다. 시신도 없는 실종자도 있었다. 세월호 추모 행사를 준비했다. 해야한다고 들었다. 대자보를 쓰고, 리본을 만들고 유가족 간담회를 준비했다. 팽목항에 갔고, 미수습자 가족들을 만났다. 세월호 유가족과 함께 거리에서 물대포를 맞으며 경찰과 싸웠다. 비오는 날 부산역에서 세월호 집회에 참석하고, '가만히 있으라' 추모 행진도 했다. 일정은 힘들어지만, 세월호의 슬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하루하루 일정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세월호 일'을 하면서 계속 죄책감이 들었다. 사람들은 세월호 침몰에 오열하고, 절절하게 공감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세월호 유가족 간담회를 하면 강의실은 울음 소리로 가득했다. 감정을 크기로 구분할 순 없다. 사람마다 다르고, 공감하는 방식도 다르다. 공감할 수 없는 부분도 있다. 그럼에도 온 국민이 슬퍼하는 가운데 내 슬픔은 너무 작았다. 작다기 보다는 내 슬픔이 부족하다고 느꼈다. '세월호 참사'를 걸고 사람을 모으고, 행사를 진행할 만한 자격이 없는 사람이었다.
- 오늘은 2020년 4월 16일. 세월호가 가라앉은지 6주년이 되는 해다. 6년 전에 느꼈던 죄책감은 여전하다. '세월호'를 일로 동원했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슬픔에 공감하려는 노력보다 '세월호 참사'를 걸고 사람을 모으려고 한 나 자신이 싫다. 수 천개의 리본을 만들면서도 그 의미 한 번 생각해보지 않았다. 사업할 때 나눠줄 리본이 필요하니까. 그래서 만들었다.
세월호는 우리 사회 모순들이 층층이 쌓여서 가라앉은 참사였다. 난 그 사실에 집중했다. 잘못된 한국사회를 고발할 좋은 기회가 생겼다고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간과했다. 세월호 참사는 잘못된 일 이전에 너무나도 슬픈 일이었다. 299명의 사람이 죽고, 5명은 발견도 못했다.보유가족을 비롯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그 모습에 아파했다. 눈물을 흘렸다. 평범한 직장인이었던 사람은 활동가가 되었고, 자신의 이름 대신 세상을 떠난 가족의 이름으로 스스로를 대신했다.
- 그 아픔과 슬픔 덕분인지, 목숨걸고 애도를 했던 사람들 덕분인지 세상은 조금 나아진듯 보인다. 4월 15일. 어제는 총선이었다. 현 집권여당이 180석이 넘는 대승을 거두었다. '공룡여당'이 탄생했다. 세월호와 약자들에게 막말을 퍼붓던 정치인들은 우후죽순처럼 낙선했다. 세월호와 함께 싸우던 박주민 변호사는 압도적인 재선에 성공했다. 대통령은 세월호 참사의 교훈이 코로나19 사태를 이겨내는 교훈과 힘이 되고 있다고 말한다.
2020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 6주기를 홀로 보내고 있다. 버스에서 우연히 4.3 동백꽃 배찌가 떨어졌다. 가방엔 노란 리본이 달려있다. 피켓을 들고, 사업을 준비하고, 글은 썼지만. 세월호가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감정을 주는지 정리한 적이 없었다. 슬픔은 애도의 대상에 관한 일을 하고 외치면서 정리되지 않는다. 슬픔을 느끼고 애도하는 일은 적극적으로 내 안의 목소리를 들어야하는 일이다. 홀로 보내는 4월 16일 내 마음의 소리가 좀 더 잘 들린다. 사회적인 의미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나에게 주는 감정은 전혀 돌아보지 못했다. 나도 슬펐고, 아팠다. 충분히 애도하고, 슬픔을 느낄 시간이 필요했다.
- <노란 리본>. 이 영화를 지난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봤다. 세월호에 관한 영화지만 내 기억에 유가족은 나오지 않는다. 유가족과 함께 했던 카페 사장님, 자원활동가, 심리상담사, 팽목항 근처에서 물고기를 잡는 어부, 세월호 추모 행동을 했던 전교조 교사. 당사자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고, 남이라고 하기에는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기록 되어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기록에 관한 공부를 했다는 사람. 지금도 그 날을 어떻게든 기억하고 추모하려는 사람들. 일상을 살아가지만, 없었던 일로 만들지 않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세월호에 거리를 두고 살아왔던 사람들이 세월호를 어떻게 기억하고 살아야하는지 그 어려운 이야기를 일상에서 기억하고 추모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통해 보여준다. 우리는 절대로 세월호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사실 역시 보여준다. 코로나19라는 공동체의 안전을 극도로 위협하는 사태에 그나마라도 공동체가 버티고 살아가는건 6년전 침몰했던 세월호를 목숨걸고 애도했던 사람들 덕이다. 우리는 침몰 이전보다 안전한 공동체에 산다. 이는 세월호 참사가 잊혀지지 않도록 많은 사람들이 최선을 다해왔다는 증거다. 우리가 그 참사에서 절대로 자유로울 수 없음을 보여주는 연결고리이기도 하다. 그간 얼마나 많은 핑계로 연결고리와 슬픔을 피해왔는지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세월호 유가족 분들이 직접 만든 리본을 나눠주셨다. 손을 꼭 잡아주셨는데,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할 지도 몰랐다. 그 분들이 어떤 기분일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그저 부끄러움 뿐이었다.
공동체를 구성하며 살아가는 일원으로서 어떤 태도가 애도이고, 어떤 삶이 실천인지 뚜렷이 알지 못한다. '잊지않겠습니다. 기억하겠습니다.'는 말로 또 하루를 보내기엔 마음 한편이 답답하다. 말로는 기억을 지킬 수 없음을 몸이 알고 있다. 세월호는 돌고 돌아 나와 공동체를 지켜주고 있지만, 나는 세월호를 지켜내기 위해 무엇을 해야할는지. 흐릿한 감상뿐이다.
세월호 참사 이후에도 사람이 꾸준히 조용히 죽어나가는 공동체를 조금 더 안전하게 할 수 있는 삶. '안전한 공동체'에 대한 고민이 세월호를 지켜내기 위한 중요한 키워드가 되지않을까. 세월호의 침몰에는 아직 풀리지 않은 많은 원인이 있다. 원인이 밝혀지지 않으면 책임을 물을 수 없다. 왜 그 날 바다에 배가 침몰했는지. 299명이 죽고, 5명은 모습도 찾을 수 없는지. 모든 이유를 모두 밝혀내고 책임을 물어야한다. 책임을 물어야 반복되지 않는다. 다시는 배가 침몰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