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으로 버티는 삶.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 삶의 보루. 나의 기록.

by 바다


1.


나를 더 앞으로 나아가게 해주는 것. 나를 더 뒤로 밀리지 않도록 해주는 것. 이 둘은 전혀 다르지 않다. 나는 언제나 수평선의 좌표처럼 한 점에 머물러있지만, 불리는 이름이 다를 뿐이다. 4보다 3은 앞에 있고, 2보다는 뒤에 있다. 3은 4보다 성장했지만, 2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오른쪽이 정방향인 시기에는 그렇다. 대세의 방향이 바뀌면 표현이 바뀐다. 3은 2보다는 밀렸지만, 4만큼 무너지지는 않았다. 대세가 오른쪽으로 흐르는 삶을 '성장'. 왼쪽으로 밀려가는 흐름을 '성숙'이라 부른다.


2.


'지금 이 순간'에 나의 상황을 알아차리기는 쉽지 않다. 내 점의 좌표가 4인지, 3인지는 지금 서 있는 한 점만으로는 분별할 수 없다. 3은 4보다는 오른쪽에, 2보다는 왼쪽에 있기 때문에 3이다. 4도, 2도 없다면 3은 존재하지만 부를 수도 인식할 수도 없는 어느 점이 된다. 나의 삶도 지금 이 순간에 모습만으로 객관적인 위치를 알아차리기는 불가능하다. 내 삶의 왼쪽 시간의 이야기, 삶의 오른쪽 시간의 계획을 함께 조망해야만 내 위치를 알 수 있다.


3.


나는 내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 글을 쓴다.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를 쓴다. 두려운 순간과 마주할 때면 마음을 추적하는 글을 쓴다. 다시 되풀이하고 싶지 않은 기억과 마주할 때면 더 열정적으로 기억해서 기록한다. 앞으로 나아갈 길이 막막할 때면 계획과 지향을 나열한 글을 몰래 저장해놓기도 한다.


가끔 기록을 들춰본다. 2012년 대학교 1학년 때 쓴 나의 일기를 본다. 무너질 듯 불안하고, 초조해하고 있다. 자물쇠가 잠긴 비공개 글에 욕설이 가득하다. 무섭고 두려웠다. 인간관계는 서툴고, 비겁한 스스로가 싫었다.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가 무서웠고, 모든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마음은 있었지만, 자물쇠를 풀고 마음을 드러낼 용기가 없었다. 방법을 몰랐다. 2020년의 나도 불안하고 무섭다. 사랑받고 싶을 때가 있고, 사랑받는다고 느낄 때고 있다. 마음이 들뜨고,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날이면 8년 전에 쓴 그의 일기를 읽는다. 지금 이 순간의 나는 훨씬 솔직한 인간이 되었다. 여전히 무섭고 불안하지만, 이제는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마음을 인정하고, 여유를 스스로 줄 수 있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다. 더 이상 내 마음을 타인에게 구걸하지 않는다. 덕분에 건강한 인간으로 성장하고 있기도 하다.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하면서 장래를 고민하던 2014년의 글을 읽는다. 상담사, 대학원, 평생교육사, 시민단체 줄줄이 직업이 나열되어 있다. 2020년의 내가 여전히 소망하는 직업도 있고, 멀어진 삶도 있다. 6년 전 나는 직업을 썼지만, 실은 어떤 마음을 남겨두었다. 상담사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스스로가 누군가와 이야기하고 위로받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대학원을 가고 싶은 마음에는 사람들과 만나고, 교육하고 지식을 나누는 역할을 제대로 하고 싶은 욕심이. 평생교육사가 되고 싶은 마음에는 운동을 더 적극적으로 하기에는 무서운 마음이. 시민단체에서 일하고 싶었던 마음에는 차마 공무원이나 회사원이라고는 적지 못했던 나름의 타협이 적혀있다.


지금 이 순간의 나는 이제 마음을 직업으로 적지 않는다. 그것을 꿈이라 믿지도 않는다. 상담사가 되고 싶다고 적었던. 마음이 작고 약했던 나는 작고 약한 나를 인정해 주고 상담을 하고, 치료를 받았다. 지식을 나누는 것이 즐거웠던 나는 여전히 책을 읽고 사람들과 나누고 있다. 선택을 두려워했던 나는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있다.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주는 안정감을 원했지만, 차마 적지 못해 타협했던 나는 더 단호한 사람이 되어있다. 안정보다 행복을 원하는 사람.


4.


자신의 위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은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고 믿는다. 위치를 알아야 제대로 처신할 수 있다. 자신이 노력하고 고민한 과거를 알지 못하면 삶을 폄하하고, 과거의 노력을 수포로 돌리기 십상이다. 스스로 걸어갈 목표와 지향을 모르는 사람은 조금씩 대세와 흐름에 떠밀려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끊임없이 기록하고 생각해내려고 애쓴다. 과거를 '기억'이 아니라 '기록'으로 남기려고 한다. 기억은 현재에서 바라본 과거다. 그 하루에 일어난 삶의 과정, 감정을 그날에 정리해야 '기록'이 된다. 일어난 일과 기록의 간극은 짧으면 짧을 수록 좋다. 그 기록은 현재에서 바라보는 내 처지와 별개로 존재한다. 현재의 처지가 아무리 비루해도 찬란한 기록을 가진 나를 만날 수 있다. 그 찬란함은 또다시 삶을 살아갈 힘을 준다. 과거에 찬란했으니 또다시 찬란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 나는 그것을 믿고 다시 일어선다.


5.


기록된 과거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는 없었을 것이라 확신한다. 나는 기억하고 기록한 글들의 총합이다. 쓰기 위해 생각하고 고민했던 순간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오른쪽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왼쪽으로 떠 밀려가기도 하지만. 써놓은 글과, 써야할 글을 붙잡고 버티고 있다. 그게 바로 나의 위치다.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던 기록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쓰고 또 쓰고. 내가 했던 치열한 삶의 노동, 고민을 흔적으로 남겨두고 내 인생의 보루로 만들고 싶다. 하루에도 몇 번씩 좌절하고 무너지는 삶 속에 흔들려도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보루가 되길. 그렇게 위태롭고 쓰러져도 다시 일어서는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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