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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바다 May 01. 2018

 "내 반쪽짜리 노동의 조각을 찾아서"

<우리들의 알바데이> 공모전 용 글

http://alba.or.kr/xe/news/272868


<우리들의 알바데이> 공모전 용 글

"내 반쪽짜리 노동의 조각을 찾아서"


[5월 1일, 근로자의 날]


5월 1일은 달력에는 근로자의 날로 적혀있고, 우리가 노동자의 날이라고 부르는 날이다. 만들어진 역사에 따라 이름의 차이는 있지만 어쨌든 노동자를 위한 날이다. 괜찮은 사업장은 단축노동을 하기도 하고, 좀 더 좋은 사업장은 출근을 하지 않는다. 그리고 어떤 노동자들은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일을한다. 분명,노동자들을 위한 날이라고 하지만 5월 1일을 맞이하는 삶의 모습은 전혀 다르다.


  나는 5월 1일에 일을 한다. 티비와 신문에서는 근로자의 날을 선전하고, 국가에서 휴가 비용도 지원해준다고 한다. 워라밸(일과 삶의 밸런스)이라는 괴상한 신조어로 근로자의 날 행사를 하는 회사도 있다. 나의 일터는 미동도 없다. 물건이 들어오고, 물건을 정리한다. 박스를 치우고, 냉장고를 채우고 청소를 끝내고 손님을 맞이한다. 끝없는 감정노동과 육체노동의 고리를 반복하다가 시간이 되면 식사를 한다. 교대시간이 되면 불안한 마음으로 마지막 시재를 체크하고 '0'이라는 숫자에 안도하며 퇴근을 한다. 세상이 노동자를 위해서 온갖 혜택과 제공하고 대통령이 노동의 가치를 존중하겠다고 발표까지 하지만 그것은 우리 가게의 문 앞에서 모두 사라진다. 아무 일도 없는 5월 1일을 보내면서 나는 '노동자'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난 일을 한다. 나는 노동자다. 그렇다면 나는 사회적으로 최소한의  노동자의 대우를 받고 있을까? 나는 근로기준법의 법률들을 모두 위반하지 않는 사업장에서 일한다. 나는 최저시급이상의 돈을 받고, 주휴수당을 받고, 야간수당도 받는다. 이외에도 유급휴게시간과 '과분하게도' 하루 4천원의 식대도 월급이외에 따로 나온다. 4대보험과 국민연금에도 가입되어서 매달 납부하고 있다. 난 '노동'의 기준이 되는 법과 제도를 모두 만족하는 조금은 좋은 아니, 양호한 노동을 한다. 하지만 나는 5월 1일에 쉬지 않는다. 모든 근로기준법이 나에게 적용되지만, 딱 하나의 법률 5월 1일은 유급휴일이어야 한다는 한 줄짜리 <근로자의날 제정에 관한 법률>은 나에게 적용되지 않는다.


[싸우는 노동자와 편의점 노동자]


흔히 이야기하는 노동계에서는 노동자의 날 행사니, 집회니, 비정규직 철폐니 등등 여러가지 요구들을 외치면서 정부와 사용자와 혹은 또 다른 노동자와 싸우기 위한 결의를 다진다. 그런 결의와 외침들은 강한 바람에 실려와서 문고리가 흔들거리는 편의점 문 앞에서 모두 먼지가 되어 사라진다. 어느 때와 다름 없이 바닥을 쓸고 닦아야 하는 나에게는 노동자의 날의 숭고한 대의와 이념들과 구호들조차 닦아야할 먼지에 불과하다. 그런 이념과 대의들 보다는 먼지가, 귀찮은 먼지들 보다는 노동자의 날 행사가 진행되는 어느 광장 주변에 있는 편의점 노동자들의 삶이 나에게는 더 큰 관심사다.


노동자의 날 행사가 진행되는 광장의 편의점들은 '싸우는 노동자'들의 습격으로 초토화 된다. 거리에서는 '싸우는 노동자'였던 수 만명의 사람들은 문을 열고 들어오는 순간 감당할 수 없는 '소비자'집단으로 변모한다. 집회에 참여한 사람들에게는 가슴을 뜨겁게 하는 하나된 노동계급의 모습인 것이, 편의점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은 자신만 빼고 하나인 듯한 '소비자'들을 목격한다.


점주는 이 '소비자'의 행렬을 예측하고,  매출을 올리기 위해 노동자의 날 아침에 평소보다 몇 배는 많은 물건을 추가로 발주한다. 경찰이 물대포를 등장 시킨다는 소식이 들리면 우산과 우비도 함께 주문한다. 물건을 정리하고 수 많은 노동자들의 술과 안주에 바코드를 찍는 것은 편의점 '노동자'다. 싸우는 노동자의 등에는 하나 같이 '인간답게 살고 싶다' '비정규직 철폐하라' '비정규직도 사람이다'처럼 따뜻한 구호들이 적혀 있다. 하지만 그 사람들의 따스함은 정확히 가게문 앞에서 한 번 포스기 앞에서 또 한번 차갑게 사라진다. 포스기에 물건을 내려놓으며 그들은 편의점 '노동자'에게 소비자로서의 대접을 요구한다. '싸우는 노동자'들이 싸움을 위해 먹고 사라진 자리를 치우는 것은 편의점 '노동자'다.


나는 다행히도 지역에서 일을 한다. '싸우는 노동자'들의 무한 행렬로 고통받을 일은 없다. 다만, 더 세련되고 더 높은 임금의 정장을 빼입고, 가족과 여흥을 즐기는 '즐기는 노동자'들과 싸워야 한다. 봉투 20원을 요구하면 싸늘한 눈빛과 경멸의 시선이 내 온 몸을 훑을 것이다. 컵라면 2개를 구입하고 젓가락 20개를 요구하는 사람들에게 '죄송합니다.'를 연신 반복해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가 잘못한 것은 떠오르지 않는다. 내가 '싸우거나, 즐기는' 노동자가 아니라 그냥 편의점 '노동자'인 것이 죄인가보다 하고 이내 마음을 정리한다.


 나는 노동자의 날이지만 먼지가 된 구호들을 쓸고 닦으며 일을 한다. 노동자들이 모여서 구호를 외치고, 쉬는 날에 나는 쉬지 않고 일을 한다. 나에게 얻을 것은 먼지요, 잃을 것은 직장이다. 나의 유일한 구호는 '집에 빨리 가고 싶다'이다. 도저히 쉽게 납득할 수 없는 상황 속에서  나는 다시 한번 의문을 가진다. 나는 진짜 노동자인가?


[나머지 반쪽 짜리 노동의 조각]


나는 두 부분으로 나뉘어진 노동자다. 나의 노동의 반쪽은 법과 제도가 지켜주고 보호해주며 인정해준다. 빼앗으려 하거나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면 국가가 나를 대신해서 처벌하고 돈을 받아준다.  나의 나머지 반쪽 짜리 노동은 내 삶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못한다. 그것은 철저히 다른 나라, 큰 노조, 큰 공장, 공무원들에게만 존재하는 노동이다. 남은 반쪽 짜리 노동은 법과 제도가 아닌 사람과 사회가 인정해주는 것이다. 그것은 노동자의 날에 먼지를 쓸지 않고, 거리로 나서서 내 일터의 유니폼을 입고 당당히 구호를 외치면서 행진하는 것이다. 이것은 나에게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으니 빼앗겼다고 이야기하기도 힘들다. 내가 얻지 못한 노동의 조각이다. 다른 노동자들은 오랜 기간 싸우고, 지금도 싸워서 이 반쪽짜리 노동의 권리를 향유하고 있다. 나는 한 번도 싸우지 않았고, 지금도 순종적이라 앞으로도 쉬거나, 즐기는 노동자의 날을 보내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나의 이름은 '노동자'보다는 '알바'다. 우리 매장에서는 세련되게 'PT님'이라고 부른다. 그래봐야 본질은 매 한 가지다. 나는 최저의 임금을 받으며, 법의 최저의 선에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고 있는 사람이다. 내 노동을 통해 즐거움을 느낀다고 이야기하면 '알바 따위에 만족하는 젊은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되도록이면 평생 이 정도 조건에서 일을 하며 자유롭게 살고싶다고 이야기하면, '야망이 없는 젊은이'라 비난한다. 그래서 더 좋은 조건을 달라고 최저임금 인상을 이야기하면 '아무것도 안하면서 돈만 가지고 가려는 도둑놈!'이 된다. 이것이 '알바'로 살아가는 내가 받는 대우와 시선이다.


모처럼 5월 1일이 다가온다. 난 어느 달처럼 생활비에 쫓기고 있고, 월급이 들어와서 소액대출을 갚고 새로운 출발을 하고 싶다. 그래도 5월 만큼은 여느 달처럼 무기력하고 자연스럽게, 바람이 불어서 가게에 먼지가 들어오고 그것을 쓸어내리는 것처럼 나의 반쪽짜리 노동의 조각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 나도 나의 구호를 가지고, 유니폼을 입고 거리로 나서고 싶다. 5월의 첫 번째 날 만큼은 출근하지 않아도 임금을 받고 싶다. 그렇다고 내가 옆에 있는 동료에게 '노동조합'을 제시할 만큼 '깜'이 좋은 사람은 아니다. 점장의 요구를 투덜거리면서 실행하는 조합비도 잘 안내는 불량 조합원이다. 그래도 창고에 몰래 들어가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으면서 라도 외치고 싶다


'알바도 노동자다'

'노동자의 날엔 쉬고 싶다.'

'최저임금 즉각 만원으로 인상하라'

'우리의 노동은 최저 노동이 아니다.'

'먹었으면 치우고 가라'

'컵라면 한개당 젓가락 한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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