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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대석 Jan 21. 2023

[박대석칼럼] 세계라는 밭을 일궈야

밭에서 난 산출물인 철 지난 이론(사유)에 잡혀서는 안 된다.

하늘(자연)과 인간이 하는 일을 잘 아는 사람이 삶의 고수(高手)다. 장자도 "수준이 가장 높은 사람은 하늘이 하는 일을 알면서, 인간이 하는 일을 아는 사람이다(知天之所爲 知人之所爲者 至矣)"라며 같은 말을 했다. 인간은 자연과 문명이라는 두 세계가 어우러진 판에서 산다. 자연은 인간이 없을 때부터 존재했고 인간을 위해 움직이는 세계도 아니다.


이에 반하여 문명(文明)은 모두 인간이 건설했다. 인간에게 이 2 세계 외는 없다. 따라서 인간이 두 세계를 높은 차원에서 바라본다면 지적으로 탁월한 능력자, 고수다. 그러나 거의 불가능하다. 근처만 가도 성인 반열에 든다.  문화는 인간이 무엇을 하거나 만들어서(文) 변화(化)를 만드는 일이다. 인간의 상상과 창의가 동력이 된다. 문화의 결과가 인간 문명이다.


이 두 세계를 인간은 문과(文科, 문명에 관한 학문)와 이과(理科, 생물, 물리 등 자연에 관한 학문)로 구분한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수학Ⅱ를 잘하는 학생이 택하는 전공이 이과라는 현실이다. 균형 있는 공부를 하려면 문과와 이과를 동시에 공부하여야 한다.


장자는 문과와 이과를 모두 아는 비범한자는 천수를 누리고 ‘요절’ 하지 않는다고 했다. (終其天年 而不中道天者 是知之盛也) 문리(文理)를 깨치면 무슨 거창한 일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저 천수를 누린다 하니 과연 장자답다.


▲ 세계라는 밭을 일궈야지, 산출물(이론)인 사유에 붙잡혀있으면 안 돼

Machu Picchu in Peru / 이미지 출처 unsplash

높은 단계의 지식인은 세계를 직접 보고 말한다. 세계를 사유하지, 사유를 사유하지 않는다.  구체적인 세계에 직접 접촉하지 뜬 구름 잡지 않는다. 구체적인 세계에 직접 접촉하고, 거기서 성숙해지는 것이야 말로 지적으로 완성된 경지다. 결국 지적인 완성은 현실에서 검증될 뿐이다.


지식은 구체적인 진짜 세계를 밭으로 삼아 태어난다. 지식 수입국은 밭에서 지식이 생산되는 과정을 모른 채 수확된 이론 체계만을 가져다 쓴다. 생산 과정을 모른 채 이론을 수입한 나라는 그 이론을 바로 진리로 여긴다. 밭에서 생산된 것이라는 인식이 있으면 밭을 터전으로 삼지만, 그 과정을 모른 채 수확물만 수입해서 쓴다면 수확물 자체를 보물로 여기기 때문이다.


종교를 포함한 공산주의, 파시즘, 자유민주주의 모두 그 당시 현실, 그 당시 세계라는 밭에서 나온 산물이다. 모두 이론이다. 이론을 실체로 붙잡고 늘어지는 일은 어리석다. 현실 세계가 다르거나 보는 기준이 바뀌면 새로운 이론이 나온다. 지식 생산국은 늘 새로운 이론을 창출한다. 그러나 지식 수입국은 이론이 전부인양 붙잡고 늘어진다.


한국의 주자 성리학이 그렇다. 패망의 기운에 붙잡힌 고려 말의 모순을 극복하고 새로 성립된 나라, 조선은 고려하고 전혀 다른 통치 구조나 이데올로기를 쓸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성리학(性理學)과 중앙집권적 관료체제를 선택한다. 성리학은 중국 송나라 때 형성된 새로운 형태의 유학 이데올로기다. 조선은 원나라와 명나라가 교체되는 시기에 성리학을 받아들여 그것을 통치 이데올로기로 정하고 난 후, 줄곧 성리학 본래의 모습을 지키려고 무척 노력한다.


하지만 중국은 왕조가 교체되는 정치적 격변을 동반하였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구체적인 현실 세계의 사회경제적 조건이 달라지면 바로 거기에 맞춰 이데올로기를 바꿨다. 그래서 같은 유학이라도 명나라 때에는 양명학(陽明學)으로, 청나라 때에는 고증학(考證學)으로 바뀐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성리학을 이데올로기로 채택한 후 사상 논쟁의 핵심은 누가 더 철 지난 성리학의 원래 모습을 철저히 지키느냐는 것이었다. '순수 집착'에 빠진 조선의 엘리트들은 사회경제적 조건이 어떻게 변하더라도 중국에서 들어온 '진리 '로서 '성리학'을 손톱만큼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모름지기 한 나라는 이데올로기 혹은 어젠다나 비전 등이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요구와 일치하였을 때에만 발전한다. 그 사회가 처한 현실적 요구와 비전이 일치하지 않으면, 바로 비효율이 쌓인다. 비효율이 쌓여가면서 국가는 허약해지고, 길을 잃는다. 조선은 이데올로기를 현실에 맞춰 바꾸는 대신, 현실을 이데올로기에 맞추려는 노력만 했다. 세계에서 이론을 생산하려고 노력하지 않고, 세계를 정해진 이론에 꿰맞추려 한 것이다.


진리를 지키려는 순수한 집착,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물론 여러 가지 효율적이며 실재적인 일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큰 틀에서는 이 흐름을 줄곧 유지하였다. 조선은 수입한 이데올로기에만 장장 200년 동안이나 집착했다. 200년 동안 하나의 이데올로기를 변함없이 지키려고 노력한 결과, 국가는 극단적인 비효율에 빠져 허약 해졌다.


조선, 일본과 너무 달랐다.

Hendrick Hamel 동상 출생지인 네덜란드 Gorinchem / 이미지 출처 위키피디아

1543년 9월, 일본 가고시마 항 남쪽으로 배를 2시간 정도 타고 가면 나오는 다네가시마라는 작은 섬에 포르투갈 상선이 표류해 왔다. 열다섯 살의 도주 도키타카는 그들로부터 화승총 한 자루를 선물로 받았는데, 거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한 자루를 사서 대장장이 야이타로 하여금 본떠서 만들게 하였다.  그래서 일본은 자신들이 직접 조총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일본 사람들은 자신들과는 다른 포르투갈 사람들을 알려고 노력한다.


한편 1653년, 조선에 네덜란드 상선이 표류하였다. 인원은 36명이었고, 그중에 하멜이라는 청년도 있었다. 그 배에는 대포와 조총 등이 가득 실려 있었고, 항해전문가와 무기 전문가들이 있었지만, 조선의 그 누구도 이런 문물에 관심을 표하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살아남은 여덟 명이 일본의 나가사키로 도망갔다. 그 후 하멜은 네덜란드로 돌아가 자신이 조선에 머무는 동안 받지 못한 임금을 받기 위한 증빙자료로서 조선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그것이 『하멜표류기』다. 그 당시 일본은 나가사키에 네덜란드 상인 구역을 만들고 네덜란드와 상업을 하고 있었다.


그 결과 1894년 한국은 당시 몽둥이, 창, 활 등을 가지고 일본 신식 무라다 총에 맞서 동학 농민군은 3만에서 5만 명이 사살됐다. 부상자까지 30만 명에서 40만 명에 이르지만, 일본군의 사망자는 단 1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달랑 고급 무기, 첨단 무기를 얻었다고 해서 강대국, 선진국이 되지 않는다. 활을 가진 시스템에서 첨단 소총과 전투기를 만들고 생산하고 사용하려면 국가의 정치, 경제, 사회, 교육 등 모든 시스템이 함께 바뀌어야 한다. 일본은 서양 소총을 도입하면서 메이지유신을 통하여 국가 시스템을 대 개조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냉정하게 평가하고 알아야 한다.


▲ 철 지난 이론에 빠진  '주자 성리학' 탈레반 나라 된 조선

2010년 4월 15일 아프가니스탄 칸다하르에서 지역 여성들이 자수를 배우는 모습 / gettyimages

왜 조선은 이방인들이 왔을 때 그들이 가지고 온 기술을 배우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을까? 호기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은 계속 자기가 알고 있고 자기가 가진 정답이었던 철 지난 이론인 주자학으로만 세계를 관리하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유교 경전을 읽으면서도 그것을 정답으로 적용하지 않고 세계를 열린 시각으로 보며 호기심을 더 앞세웠다. 아직도 우리나라는 지적 영역에 있는 사람이나 아닌 사람들이나 다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데 초점을 맞추거나 감동을 구하지 않는다. 단지, 이미 가지고 있는 정답을 적용하는 데에만 더 열심이다.


이론에 지우 친 정답으로 간주되는 특별한 이념을 숭배하는 삶을 오래 살다 보면, 정답을 수행하는 당위만 강해지고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핵심가치나 존재의미는 살피지도 않는 바보가 되기 쉽다. 그래서 생각하는 능력까지도 퇴화된다. 국가 간의 관계 문제에 있어서도 생각하는 능력이 있다면, 우선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놓치지 않는다.


상대국이 우리의 영토와 문화와 역사를 존중하는지 존중하지 않는지를 가장 근본적인 문제로 다루어야 한다. 사회주의와 같이 이념화된 특정한 정답을 가지고 덤비면, 상대 나라가 우리의 역사나 문화, 영토를 욕심내는 데도 거기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고 '정답'만을 건지려 하기 때문에 결국은 우리의 생존을 위협받는 지경에까지 내몰리게 되는 것이다.


결국 조선은 1592년 일본의 침략 앞에 맥없이 당하는 치욕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1894년에 일어난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기고 1895년에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되었다. 1875년 9월, 일본은 운요호를 앞세워 강화도를 공격한다. 1876년 2월에 이 사건의 해결을 빌미로 하여 조일수호조규, 즉 강화도조약을 맺는다.


그런데  이본이 청나라 개입을 막기 위하여 '조선은 자주국임을 천명한다'라는 조문이 들어간 시모노세키 조약 이후로 조선의 지식인들은 "이제는 조선이 독립됐구나!"라면서 독립협회를 만들고 중국 사신을 만났던 영은문을 부수고 그 자리에 독립문을 세웠다.  한심한 일이다. 일본은 1897년에는 대한제국을 선포하고 고종을 황제로 만든다. 하지만 얼마 되지 않은 1910 년에 한일강제병합이 이루어졌다.


마치 조선은 이슬람 극단주의 아프가니스탄 탈레반(학생들이라는 의미)처럼 됐다. 변화를 타락으로 간주하여 변하지 않는 것을 찾는 성리학 근본주의(fundamentalism) 빠졌다. 변하는 세상을 보지 못함은 물론이고 여성인권과 실용 등은 모두 사라졌다.


▲ 중국은 이론 생산국, 한국도 '철 지난 이념'이 아니라 세계에 시선을 두어야...

모스크바에 있는 레닌 도서관/ 이미지 출처 unsplash

그렇다면 중국은 어떻게 이론의 틀에 세상을 맞추려 하지 않고, 세상이 달라짐에 따라 대담하게 이론을 바꾸는 일을 할 수 있었을까?


간단하다. 중국은 그 이론을 생산한 나라이기 때문이다. 이론을 생산한 나라는 이론이 현실이라는 밭에서 생산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시선의 무게 추를 이론에 두지 않고, 현실에 둔다. 구체적인 세계와 현실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지, 이미 정해진 이론을 금과옥조로 여기지 않는다. 이론은 그저 현실에서 생산된 부산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개념이라는 것은 실재 세계의 손님일 뿐'이다.


이와 달리 이론을 수입한 나라는 이론이 생산되는 과정을 경험하여 일치하지 못한 채, 이미 생산된 이론만을 수입해서 쓰기 때문에 이론을 불변하는 진리로 여기기 마련이다. 이런 경우에는 이론이나 이데올로기를 바꾸면 바로 정의롭지 않은 변절자 취급을 당하기 십상이다.


그러나 세상의 진화는 현실에 기반을 둔 변절자(혁신가)가 해내지, 이념이나 이데올로기에 충실한 근본주의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서 지적인 완결성은 구체적인 현실에 시선의 무게 추를 두고, 거기서 사유의 밭갈이를 하는 우직함에서 드러난다. 그 밭갈이의 완성은 또 이 세상에서 가장 구체적일 수밖에 없는 자신의 생명 앞에서 좌우된다. 지식의 원심력을 극복하고, 실재의 중력을 항상 느껴야 한다. 그것이 독립적이고 창의적으로 사는 길이다.


2023.01.20.


최진석교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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