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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Oct 24. 2021

"눈을 감고 뭔가 좋은 것을 생각해 봐."

일상의 부재, 재난의 의미


"눈을 감고 뭔가 좋은 것을 생각해 봐."

(Close your eyes and think of something nice.)

[영화 <더 임파서블>(The Impossible, 2012),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


재난 영화라고 하면 흔히 화산이 폭발하거나, 쓰나미가 밀려오거나, 혹은 고층 빌딩이 무너지거나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하는 등 다양한 상황들이 있다. 아, 요즘 영화라면 좀비 창궐도 그중 하나로 넣어볼 수 있겠다. <2012>(2009)처럼 ‘지구 종말’을 테마로 이것저것 다 넣은 경우도 있었지. 상황은 다르지만 상업 영화의 측면에서 익숙하게 장르적으로 정립되어 왔거나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설정은 대략 이런 식으로 정리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아주 평화롭고 사소한 일상에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해변이나 리조트에서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 평소처럼 집에서 가족과 시간을 보내거나 직장에서 생업에 종사하는 사람들. 상황은 전례 없는 대지진이라고 해보자. 영화 초반은 대부분 위와 같이 별 일 없는 순간들로 채워진다. 그러다 어느 변두리의 괴짜스러운 학자가 평소처럼 연구 결과를 보다가 뭔가를 발견한다. 조만간 대재앙이 일어날 거라는 확실한 증거 같은 것을. 사색이 되어서 연구소나 정부기관 등에 위험을 경고하지만 아무도 들어주지 않는다.

그러다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새들이 떼 지어 날아간다거나 하는 전조 상황들이 제시되고, 바로 그 학자가 경고했던 장소에서, 사람들의 발 밑에서 조금씩 땅이 갈라지거나 흔들리고 불과 몇 분 안에 모든 것이 초토화된다. 대부분의 영화는 그 과정에서 건물이 무너지거나 수많은 사람들이 쓰나미에 휩쓸리는 등 피해 상황을 일종의 시각적 오락거리로 전시하듯 보여준다. 실제 일어나지 않은 일을 실감나게 보여줘야 하기 때문이다. 도로가 무너지면서 차들이 낭떠러지로 떨어지고 지하철이 궤도를 이탈하고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곳곳에 난무하는, <2012> 같은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리면 될 것 같다.

한 가지 더, 주인공은 대부분 가족(주로 아내와 자녀)과 소원한 채로 (주로 자기 일에 빠져) 살고 있다. 서구 문화권에서는 이혼을 하고도 자녀 문제 등으로 주기적으로 왕래를 하는 경우가 많으니까, 재난 상황을 앞두고 남자 주인공이 전처 대신 잠시 딸을 돌봐준다거나 하는 상황이 미리 설정된다. 재난이라는 건 가족주의적 정서와 상통하는 상업 영화에서 가족의 의미를 새기게 만드는 장치 같은 것이다.

한 가지 더! 주인공은 안전과 관련된 직종에 종사하거나 영화 속 해당 재난 상황의 해결 혹은 극복에 실마리를 제공할 수 있는 무언가를 가지고 있다. 예를 들어 <샌 안드레아스>(2015)에서 드웨인 존슨이 연기한 주인공은 구조헬기 파일럿이다. 무언가를 갖고 있지 않더라도 그 주인공은 우연한 계기로 많은 사람들을 구하는 영웅이 되거나 작중 재난 상황과 관련이 있는 인물이다. 소행성 충돌을 다루는 <딥 임팩트>(1998)의 주인공 ‘레오 비더먼’(일라이저 우드)은 천체 관측에 관심이 많은 열네 살 소년인데 그가 포착한 사진이 알고 보니 지구 궤도에 진입한 소행성의 존재를 처음 발견한 것이어서 소행성 이름이 ‘비더먼’이 된다.

상업 영화의 장르는 대중적 흥행에 따라 사후적으로 관습화 혹은 정착되어온 것이므로, 영화를 볼 때 대부분의 장르에서는 어느 정도의 공식 혹은 도상을 심하게 벗어나지는 않는다. 예산이 많이 들어가고 흥행 여부가 중요한 영화일수록 더더욱. 그러나 재난 영화가 꼭 위에서 언급한 경우들만 있지는 않다.


영화 '더 임파서블' 스틸컷


훗날 <쥬라기 월드: 폴른 킹덤>(2018), <몬스터 콜>(2016) 등을 연출한 스페인 감독 후안 안토니오 바요나의 작품인 <더 임파서블>(2012)은 2004년 12월 26일 태국에서 실제 있었던 쓰나미를 바탕으로 한다. 호주 출신으로 일본에서 생활하고 있는 주인공 가족은 휴일을 보내기 위해 해변의 리조트로 여행을 왔고, 오붓한 일상을 보내던 중 갑자기 찾아온 ‘물폭탄’을 만난다. 물폭탄이라고 표현한 건 영화가 주인공을 재난의 수많은 희생자 중 한 명으로 조망하는 게 아니라 주인공 시점에서 그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 이전까지 지질학자의 불길한 경고 같은 재난 영화의 클리셰 따위는 없이, <더 임파서블>은 오직 예고 없이 한 가족을 덮쳐온 거대한 재난으로서 쓰나미를 다룬다.


<더 임파서블>은 그 재난의 실제 스케일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거대한 스펙터클화 하지 않으려고 노력한 영화이기도 하다. 지금 중요한 건 당장 영문도 모른 채 눈앞에서 집채만 한 물에 휩쓸리게 된 인물이 느끼는 두려움과 공포감이니까.


극장에서 만나는 모든 영화는 관객의 일상으로부터 잠시 벗어나 비일상의 상태, 즉 영화 속 세계를 간접 경험하는 상태에서 보게 된다. 극장이 어둡고 독립된 공간에서 불특정한 낯선 다수와 함께 있는 환경인 건 그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재난 영화는 그 비일상의 상태에서, 한 번 더 비일상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라고 표현해볼 수 있겠지. 다른 의미의 3개의 차원인 것이다. 일상을 벗어난 비일상에서 다시 만나는 비일상.


영화 '더 임파서블' 스틸컷


물론,  영화에도 짧지만 일상의 순간이 있다. 비행기가 출발하고 나서야 “우리 가스  잠갔나?” 같은 이야기를 하는 대목이라든지, 리조트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난   번째 밤을 보내며 가만히 밤하늘 풍등을 향해 소원을 빌어보는 일들.  소원이라는  ‘복권 1 당첨되게 해주세요같은  아니라 아마 ‘우리 가족 내년에도 건강하고 행복하게 지내게 해주세요같은 것이었을 테니까. 그리고, 크리스마스니까!


‘재난 영화’라는 구분은 아주 엄격한 것이라 하기에는 다소 자의적이고 모호한 측면도 있다. 좀비 영화도 처음 시작은 시체가 되살아나 움직인다는 판타지 속 설정을 영화로 구현하기 시작한 뒤 그것이 훗날 우리가 보는 <월드워Z>(2013)나 <부산행>(2016)처럼 단순한 설정의 일부를 넘어 근원적인 인류 생존의 위기이자 재앙으로 발전해왔고 묘사 방식도 다양해졌으니까. 그러니 이런 영화들도 ‘좀비 아포칼립스’라는 SF의 하위 장르 영화가 아닌 ‘재난’ 영화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어쨌든 평정심을 유지하기 어렵고 이타적이기는 더더욱 어려운 극한의 재난 속에서, 그럼에도 피어나는 동료애 혹은 희생 정신 같은 것이 시체들이 집단으로 살아 움직이는 감염증과 그 혼돈의 파국 속에서 잘 드러나게 되니까.


<더 임파서블>이 흔한 재난 영화의 공식을 어떤 방식으로 뒤집는지에 관해 지금껏 서술했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재난 영화’일 생각이 별로 없는 영화였을지도 모르겠지. 앞선 분량을 할애해가며 그것에 관해 생각했다면 이 영화가 어떻게 비일상을 다루는지, 그리고 무엇보다 인물을 다루는 방식은 어떠한지에 관하여 짚어보는 것도 중요할 것이다.


영화 '더 임파서블' 스틸컷

나오미 왓츠와 이완 맥그리거가 각각 연기한, 삼형제의 엄마 ‘마리아’와 아빠 ‘헨리’에 관해 먼저 말해야겠다. 가령 <해운대>(2009)나 <타워>(2012) 같은 영화에서라면 어떨까. 부모인 주인공은 아주 높은 확률로 이런 말과 행동을 할 것 같다. “걱정 말고 여기서 꼼짝 말고 기다리고 있어 아빠 금방 돌아올게”라며 뒷모습을 남기고 가는 일. “그동안 사람답지 못하게 살아온 시간들이 많은데 이렇게라도 남에게 기여할 수 있다면 그것도 가치 있는 일이겠지.” 하면서 희생을 자처해 불/물 속으로 뛰어드는 일. 주위에서 쉽게 볼 수 있을 것 같은 평범한 인물이 위기 상황에서 영웅적인 면모를 발휘하고 개과천선하거나 가족 관계를 회복하는 일 같은 건 특히 재난 영화에서 더 다루기 좋은 서사임을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이 나쁜 게 아니라, 재난의 시각적 스케일에 치중하면서 인물의 희생을 통해 드라마 속 감정을 고조시키는 일은 너무 뻔하게 쓰여 왔다.


그러나 <더 임파서블>에서는 ‘마리아’도, ‘헨리’도, 아이들에게 “우리 꼭 살아서 집에 갈 수 있어” 같은 말을 하지 않는다. 차라리 “나도 잘 모르겠어.” “엄마도 무서워.”라고 말하는 쪽을 택한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아마도 그들 역시 재난 상황이 되면 아이들부터 먼저 구하겠다든지 어떻게 해서든 반드시 살아 돌아오겠다든지 하는 심정이었을지 모르지만, (2004년 기준) 지금껏 보지도 듣지도 못했던 거대한 파도가 모든 걸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는 아무리 부모이자 어른이어도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는 상태의 자신들을 ‘발견’하게 되었을 거다. 마치 극장에서 영화가 시작하기 전 수없이 반복해서 보거나 흘렸을 비상시 대피 요령 같은 게 정작 실제 상황이 되면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처럼.


영화 '더 임파서블' 스틸컷


그 상황에서 오히려 용감해지는 건, 톰 홀랜드가 연기한 맏아들 ‘루카스’다. 이 영화는 누군가 살아남고 죽는 일의 여부와 상황 자체가 엄밀히 스포일러에 해당되지는 않으므로, 간단하게만 언급해두겠다. <더 임파서블>의 초반부 쓰나미가 지나간 뒤, 다섯 명의 가족은 ‘마리아’와 첫째 ‘루카스’, 그리고 ‘헨리’와 둘째 ‘토마스’(사무엘 조슬린), 막내 ‘사이먼’(오클리 팬더가스트) 이렇게 둘과 셋으로 나뉜다. 그리고 서로의 생사를 앞 수 없는 상황에서 어디 있는지도 모를 서로를 찾아나가는 여정이 <더 임파서블>의 중심이다.


‘마리아’와 ‘루카스’가 얕은 물살을 헤쳐가며 올라갈 만한 높은 나무를 찾던 중, 낯선 아이의 울음소리를 듣는다. 의사 출신인 ‘마리아’는 아이를 구하려고 하지만 ‘루카스’는 엄마를 지키기 위해 그것을 만류한다. 결국 “저 아이가 네 동생일 수도 있잖아”라는 말에 함께 그 울음소리의 위치를 찾아 함께 움직이게 된다. 그러다 부상을 당한 엄마가 나무에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루카스’는 이를 악물고 자신의 손과 어깨를 내어주기도 한다.


큰 부상으로 인해 병상에 누워 있는 시간이 많은 ‘마리아’ 대신, 사실상 ‘루카스’의 비중이 영화 중반까지 꽤 큰 지분을 차지한다.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무엇이든 하라’는 엄마의 말에, 병원 안에서 몸이 불편한 채로 서로의 가족을 찾아 헤매는 낯선 이들을 대신해 함께 이름을 외쳐주고 분주히 이리저리 뛰어다니기도 한다. 그러나 ‘루카스’에게도 이 재난이 주는 압도적인 무게감은 마찬가지였을 거다. 게다가, 아빠와 두 동생의 생사를 알 수조차 없고 아픈 엄마 대신 자신이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것도 일종의 두려움으로 다가왔겠다.



그런 종류의 두려움이란 혼자서 쉽게 극복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게다가 ‘루카스’는 자신와 함께 단둘이 살아남았다고 믿는 엄마의 지금 다치고 약해진 모습을 두 눈으로 마주해야만 한다. 엄마의 한쪽 가슴과 오른쪽 다리에서는 피가 흐르고 있고 자신이 부축해주지 않고는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다. 푸켓으로 향하던 비행기 안에서는 난기류에도 미동도 하지 않은 채 태연하게 헤드셋을 끼고 있었던 ‘루카스’이지만, 옆자리에서 기체의 흔들림 하나하나에 놀란 채 눈을 꾹 감고 있던 엄마를 재미있다는 듯 바라봤었던 ‘루카스’이지만, 극한의 재난을 마주한 지금 엄마를 곁에 둔 ‘루카스’ 역시 마찬가지로 두렵고 나약해져 있다.


영화 '더 임파서블' 스틸컷


가까스로 좀 더 높은 나무 위로 올라간 뒤 몇 시간 후, 생존자가 있나 확인하러 온 현지 주민들에 의해 ‘루카스’와 엄마 ‘마리아’, 그리고 조금 앞서 두 사람이 구한 ‘다니엘’이라는 아이까지 세 사람은 인근 마을로 옮겨진다. 그리고 얼마 후 근처 병원으로 호송된다. 트럭에 실린 채 ‘루카스’는 근처에서 고통을 호소하며 울부짖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은 물론 시체를 운반하는 다른 차량의 모습까지도 목격한다.


영화 <더 임파서블>이 재난이 휩쓸고 간 자리를 원경에서 헤아리는 건 바로 이 대목이다. 영화의 상영시간 기준 40분이나 지난 뒤, 더 정확히는 마을 사람들에 의해 구조되기 직전 높은 나무 위에 올라 앉은 ‘루카스’의 시선으로부터 말이다. 보통의 재난 영화였다면 두 사람(세 사람)이 이 나무에 오르기 전부터 관객에게 최대한 재난의 풍경을 시청각적으로 생생하게 살려 보여주기 위해 애썼을 것 같지만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그게 아니라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자연의 위엄을 온몸으로 마주한 채 속절없이 휩쓸리는 당시의 공포감과 절망감일 것이다.


“눈을 감고 뭔가 좋은 것을 생각해 봐.”


‘마리아’도 ‘루카스’도, 서로에게 달리 해줄 수 있는 말이 없다. 한차례 쓰나미가 휩쓸고 지나갔지만 후속 파도가 언제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상황이기 때문에 이것이 이 재난의 끝인지는 아무도 모르는 상태. 아니 어쩌면, 진짜 재난이라는 건 아직도 시작되지 않았을지 모르는 상태다. 무엇보다 ‘헨리’와 ‘사이먼’과 ‘토마스’의 생사 여부를 알 수 없기 때문에 정말 지금부터가 시작인 게 맞는 건지도.


영화 '더 임파서블' 스틸컷


일상이 사라진 그때 힘이 되는 건 ‘루카스’와 ‘마리아’ 서로만의 존재는 아니었다. <더 임파서블>은 살아남은 사람들이 서로를 어떻게 위로하고 응원할 수 있는지를 진진하게 담아낸다. 언어도 통하지 않지만 ‘마리아’를 병원으로 옮겨준 마을 주민은 ‘루카스’에게 이리저리 손짓을 하며 무어라 말한다. 아마도 “너희 엄마 저기 병상에 데려다 놓았는데 병원에서 잘 보살펴줄 거야” 같은 내용이었을 법한 이야기. ‘루카스’는 그 아저씨의 뒷모습을 향해 연신 “땡큐”를 외친다.


다른 어딘가에 살아남은 ‘헨리’ 역시 대피소에서 다른 생존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말을 듣는다. 아내가 태국에 오기 싫어했는데 억지로 설득해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부터, 딸의 생사를 알 수 없는 가운데 아내가 남긴 ‘수영하러 간다’라는 메모를 붙들고 있는 이야기까지. 고향에 있는 가족과도 연락할 수 없다는 ‘헨리’의 말에 어떤 이는 만약을 위해 배터리를 아껴두었다며 자신의 휴대전화를 선뜻 내어준다. 장인과 잠시 통화를 한 ‘헨리’는 자신의 전화가 아니어서 끊어야 된다며 울먹이는 채로 황급히 전화를 끊는데, 정작 전화의 주인은 “그렇게 끊어서는 안 된다”라며 전화를 한 번 더 건넨다.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랐던 ‘헨리’는 장인에게 “마리아와 아이들을 꼭 찾아보겠다. 곳곳의 병원들과 대피소들을 다 살펴보겠다”라며 간신히 다음을 기약하는 이야기를 해준다.


섣불리 “꼭 돌아오겠다” 같은 약속을 하기 조심스럽지만, 그러니 ‘헨리’ 역시 떨어진 아내와 ‘루카스’를 찾아낼 수 있다는 보장을 하기는 어렵지만 그 상황에서 타지 소식을 밤새 손꼽아 기다리고 있을 장인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최선을 다짐하는 말 외에는 없을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헨리’ 역시 엄마와 형의 생사를 알고 싶어하는 두 아들에게 자신이 꼭 찾아보겠다며 가까스로 안심시킨 뒤에 아이들을 대피소에 맡기고 온 처지다.


우리는 이런 상황에서 용감해지기 어렵다. 다른 누군가를 구한다는 건 더욱 어렵고, 나 자신을 챙기는 것조차 버거운 상황이 된다. 그러나 ‘루카스’는 자신도 두려움에 휩싸인 채로 엄마를 지켜야 한다는 생각에 앞서 들려온 다른 아이의 울음소리를 애써 외면할 만큼의 ‘강해지려는 마음’이 된다. ‘헨리’ 역시 피투성이가 된 채 무섭기는 마찬가지지만 두 아이에게 엄마와 형을 데려오겠다며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애써 입을 열어본다. 아빠를 대신해 막내를 돌보게 된 둘째 ‘사이먼’은 자신도 누군가를 돌보는 건 처음이라 겁이 난다고 하지만 아빠의 떨리는 눈빛과 목소리에 그렇게 해보겠다고 말한다.


<더 임파서블>은 살아있음의 이미지를 몇 가지 방식으로 제시한다. 두 동생을 끌어안는 ‘루카스’의 모습은 두 아들을 마찬가지로 안고 있는 ‘헨리’와 겹쳐지고, 고요한 바다의 모습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해변가의 사람들과 리조트 건물을 모두 삼켜버렸던 바다와는 정반대의 양상으로 겹쳐진다. 병상에 누운 채로 아들을 바라보는 ‘마리아’의 모습은 살아있는 다른 누군가를 찾기 위해 병원 곳곳을 누비는 ‘루카스’와 대비된다.


영화 '더 임파서블' 스틸컷


재난이라는 건,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어떤 초월적인 일을 만들기도 한다. 앞에서 언급한 것들이 바로 그런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살아남은 사람들은 최선을 다해 ‘용기를 내기로 노력’한다. 그런다고 용기가 날 것이라 장담할 수 없지만, 게다가 떨어져 있는 가족들이 살아 있을지 여부도 가늠하기 어렵지만, 이미 돌아갈 곳도 돌아갈 수 있을지 여부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에서 단지 ‘살아있다는 사실’ 자체에 기대는 수밖에는 도리가 없다. 조해진 소설 『빛의 호위』(창비, 2017)에는 “저는 살아 있습니다. 살아 있고, 살아 있다는 감각에 집중하고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있다. 모든 걸 집어삼키는 폭풍과 파도가 지나간 뒤의 바다에는 어김없이 햇빛이 찾아온다. 살아있다는 감각을 생각하고 느끼게 해주는 바로 그 빛. 이 사람들이 맞이하게 된 일상의 부재가, 바로 우리의 일상이 여기 아직 존재한다는 사실을 한편으로 깨닫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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