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적 없는 세계를 그리워하기
"곤도와에 이런 노래가 있죠. ‘땅에 뿌리내려 바람과 함께 살아가자. 씨앗과 함께 겨울을 넘고 새들과 봄을 노래하자.’ 아무리 강한 무기가 있고 불쌍한 로봇을 무수히 지배해도 땅을 버리고 살 수 없어요."
지금도
하나의 우주가 나를 그리워한다
-이사라, '옛집' 부분
『저녁이 쉽게 오는 사람에게』(문학동네 시인선 105)
한 번도 마주하지 못한 어떤 세계를 그리워한 적이 있을 것이다. 있습니까, 가 아니라 있을 것이다, 라고 적은 건 그 세계의 모양과 세부, 크기 등은 다르겠지만 저마다에게 저마다의 방식으로 존재했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예컨대 사소하게는 밤하늘을 가만히 올려다보는 일도 달이라든가 태양계의 어딘가에 대해 여러 자료나 매체 등을 통해 접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곳에 가본 적이 없으니까. 결국 눈으로 직접 보지도 않았고 그곳의 공기와 냄새는 어떠한지 알지 못하는 곳을 사람은 그리워할 수 있다고 표현 가능하다.
소년이 자주 하늘을 올려다본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아버지가 남긴 한 장의 사진에는 보통의 사람이라면 보고도 믿을 수 없는 풍경과 세계가 담겨 있다. 하늘에 떠 있는 섬. 지상과 거리를 둔 채 부유하는 그 섬이 가능하냐고 물으면 평균적인 상식을 가지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말도 안 된다고 했겠지. 실제로 소년의 아버지가 찍은 그 사진을 보며 당시 사람들은 아버지를 거짓말쟁이로 몰았다. 하지만 소년은 사진이 거짓이 아닐 거라고 믿었고, 직접 비행기를 만들어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하늘로 올라가 부유하는 섬을 발견하는 것을 꿈으로 가지고 있다.
영화 <캐롤>(2015)에도 '캐롤'이 '테레즈'를 보며 "하늘에서 떨어진 천사"(My angel, flung out of the space.)라는 표현을 쓰기도 했으니 '어느 날 하늘에서 떨어진' 같은 표현은 이미 익숙하고 경우에 따라 진부해진 것이기도 하겠지만, 소년에게는 그 일이 글자 그대로 일어난다. 하늘에서 낙하하고 있는 무언가를 저 멀리서 발견한 소년은 그것을 향해 달려갔고 이내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차린다. 수직으로 그리고 느린 속도로 지상으로 누운 채 내려오고 있는 소녀를 발견한 소년은 저절로 이끌리듯 달려가 소녀를 구해낸다. (구했다기보다 소녀는 이미 안전하게 떨어지고 있었고 소년은 단지 그 앞에 있었다고 하는 게 정확하겠지만) 이것은 '시타'라는 소녀와 '파즈'라는 소년의 이야기다.
1986년작인 <천공의 성 라퓨타>는 공식적으로 스튜디오 지브리의 첫 번째 애니메이션이다. 미야자키 하야오는 이미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1984)를 연출했지만 그것이 스튜디오 설립 전의 일이므로, 많은 사람들이 <바람 계곡의 나우시카>를 지브리의 시작으로 인정하고는 있지만 상징적으로는 어쨌든 <천공의 성 라퓨타>를 분기점으로 봐야 하겠지. 미야자키 하야오는 조너선 스위프트의 <걸리버 여행기>에 나오는 부유섬 '라퓨타'에서 모티브를 얻어 이 작품을 만들었다. 19세기 후반 유럽을 시공간적 배경으로 삼되 어떤 면에서 현재보다 더 초월적으로 발전한 과학 기술이 등장한다는 면에서 장르적으로는 스팀펑크 계열로 분류할 수 있다.
<천공의 성 라퓨타>는 후대의 많은 작품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지브리 세계관의 힘을 잘 압축한 작품으로 지금껏 평가받는다. 물론 첫 작품이다 보니 <하울의 움직이는 성>(2004) 같은 작품들보다는 조금 투박해 보이는 면도 있고 실제로 오락성과 상업성에 집중해야 했던 기획이다 보니 메시지와 스토리텔링의 깊이 면에서는 이후의 지브리 작품들에는 조금 미치지 못한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한다.
이 작품이 가본 적 없는 세계를 담는 방식은 전형적인 모험담과 구원의 서사를 기초로 하는 듯 보인다. 부모의 어떤 과거를 안고 있는 소년과 그 배경을 알 수 없지만 소년에게 어떤 신비한 계기로 등장하는 소녀, 그리고 소녀를 노리는 어떤 악의 세력의 구도까지도 지금에 와 생각하면 예상 가능한 정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더 중요한 건 '무엇' 자체가 아니라 '어떻게'에 해당하는 것이다. 우선 돋보이는 점은 하늘을 나는 일을 여러 가지 모습과 속도, 방향으로 다채롭게 묘사한다는 점이다. 오프닝에서 비행선 안에 탄 '시타'가 처음 발을 헛디뎌 지상으로 떨어지는 순간의 앞쪽에는 비행선으로 접근하는 해적선 '도리' 일당의 작은 비행체들이 비행선에 접근하는 과정이 역동적으로 묘사된다. 어떤 일로 '파즈'는 해적단의 리더 '도라'의 소형 비행정을 직접 조종하게 되는데 방향타를 잃고 수직으로 곤두박질치던 비행정이 '파즈'의 노력으로 다시 수평선을 가른 뒤 비상하는 순간과 같이 영화 안에는 잘 연출된 '비행'의 순간들이 가득하다.
마치 천국과 같은 이상 세계 혹은 사후 세계를 상상하는 것처럼, 하늘에 떠 있는 대륙이나 거주 가능한 공간을 가정하고 그것을 그려내는 일은 미디어 믹스 구분을 막론하고 꽤 자주 일어났고 일어나고 있다. 예를 들어 닐 블롬캠프 감독의 <엘리시움>(2013)과 같은 디스토피아 세계에서도 나타나는데, <엘리시움>의 세계는 인류가 더 이상 지구에서 살기 어렵다고 판단한 상류층 사람들이 아예 지구를 버리고 인공 행성을 만들어 거기서 사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못해 ‘엘리시움’에서의 거주권을 선택받지 못한 대다수 사람들은 황폐화된 지구에서 미래도 없이 어렵게 생존을 이어가고 있다. 우리가 하늘에 떠 있는 달을 바라보듯이 영화 속 사람들은 인공위성이나 비행기를 보듯 ‘엘리시움’의 머나먼 모습을 그저 올려다본다.
<천공의 성 라퓨타>에 등장하는 ‘라퓨타’ 역시 이 세계의 지구인들이 바라보는 위치는 어느 정도 비슷한 면이 있다. 일단 ‘라퓨타’는 작중 묘사되기로 고도의 과학 기술 문명을 누렸으나 어떤 일로 인해 수 백 년 전 멸망한 세계다. ‘파즈’가 아버지가 남긴 사진 속에서 발견한 그 부유 대륙이다. 사람들은 다만 그 전설처럼 전해 내려오는 ‘라퓨타’가 이제는 자취를 감추었거나 현존해도 인간의 기술로는 도달할 수 없다고 생각할 뿐이다. 하늘을 올려다보는 행위에는 그 자체로 어떤 유토피아를 바라는 마음이 존재하겠다.
<천공의 성 라퓨타>는 주 배경이 하늘이지만 실은 ‘땅’을 강조하고 있는 작품이다. 부유하는 ‘라퓨타’는 그냥 바위 같은 걸로 된 섬이 아니라 과거에 문명이 번성했던 곳인 만큼 대륙의 형태를 하고 있고 말하자면 땅 위의 하늘 위의 땅이 또 있는 이미지를 나타낸다. 그 땅에는 또 땅에서 보는 하늘이 있겠지요. 말하자면 땅-하늘-땅-하늘의 구조로 된 <천공의 성 라퓨타>의 공간은 그래서 천상의 시점보다는 지상의 시점이 좀 더 중요하게 작용한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시타’가 ‘라퓨타’ 사람이지만 주로 지상에 사는 ‘파즈’의 성장에 중점을 두고 이야기가 짜여 있다.
앞서 잠시 꺼낸 <엘리시움>이 지구가 사실상 버려진 곳으로 묘사되는 것과 반대로 <천공의 성 라퓨타>에서는 ‘라퓨타’가 오히려 그렇다. 하지만 ‘라퓨타’를 부유하는 대륙으로 만들어주었던 ‘비행석’이 지구에서는 사람들이 곳곳의 광산이나 지하 동굴 등을 뒤져서 찾는 희귀한 광물이 된다. ‘시타’ 가족이 대대로 그것의 결정체를 목걸이 형태로 물려받아 왔던 것이 비행석의 능력을 가지고 지구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가진 세력에게 발각되어 ‘시타’는 오프닝에서 해적들의 공격으로 비행선 아래로 떨어지게 되었다.
중요하게 생각되는 점은 ‘라퓨타’가 작중 현재 시점의 배경인 1900년대는 물론 2020년대에 와서 생각해도 월등하게 발전된 (<블랙 팬서>(2018)의 ‘와칸다’처럼) 문명을 이루고 있음에도 그것이 몇 백 년 전에 이미 멸망했다는 점이다. ‘라퓨타’는 어떻게 되었고, ‘라퓨타’에 살던 사람들은 또 어떻게 되었기에 문명은 폐허와 전설로 남았을까.
땅 위의 땅, 하늘 위의 하늘은 비행선을 타고 구름 위를 유영하는 중에도 이어진다. ‘파즈’는 ‘시타’를 구하고자 소형 비행선 외에도 ‘도라’가 이끄는 해적단 모선에 동승하게 되는데, ‘파즈’는 해적선에서 일종의 감시탑 역할을 하는 연처럼 생긴 작은 비행체에서 보초를 선다. 모선과 일종의 와이어를 통해 연결된 채로 모선보다 좀 더 높은 곳에서 더 먼 곳을 감시하는 것. 더 높은 곳에서 보는 하늘은 폭풍전야처럼 어둡고 스산하지만 동시에 아름다워 보인다. 그렇게 보일 수 있는 것은 ‘파즈’가 어릴 때부터 ‘라퓨타’라는 공간을 궁금하게 여기며 자랐기 때문이고 ‘시타’는 ‘라퓨타’ 출신 왕족인 것으로 묘사되기 때문이다. 이유야 다르지만 두 사람 모두 ‘라퓨타’에 가야 할 이유가 있으니, 그곳으로 향하는 과정에서 생애 처음 마주하는 풍경들은 경이로움을 동반할 여지가 충분하다.
'라퓨타'에는 과거 라퓨타 인들이 다루던 오래된 로봇들이 다수 등장하는데, 형태는 다소 원시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먼 미래 배경의 최첨단 SF 영화 못지 않게 강력한 위용을 가지고 있다. 다만 지금은 라퓨타 인들이 그곳에 없으니 세월에 휩쓸려 버려지거나 주인 없는 채로 움직이고 있을 따름이다. 그들 중에는 주기적으로 누군가의 묘지에 꽃을 가져다 놓는 로봇이 있는데, ‘라퓨타’에 도달한 ‘파즈’와 ‘시타’가 가장 먼저 만나는 이 로봇은 새 둥지 안에 있는 알이 다쳤을까 봐 두 사람에게 알려주는 등 여느 영화에서 보았을 법한 인간과 비생명체 사이의 유대감을 발화되는 대사 없이도 꽤 세밀하게 그리기도 한다. 이것 역시 결국 <천공의 성 라퓨타>가 진정 말하고 싶은 것과 관련이 있다. ‘시타’는 그래서 후반에 가면 작중 메인 빌런에 해당하는 ‘무스카’에게 아래와 같이 말한다.
“곤도와에 이런 노래가 있죠. ‘땅에 뿌리내려 바람과 함께 살아가자. 씨앗과 함께 겨울을 넘고 새들과 봄을 노래하자.’ 아무리 강한 무기가 있고 불쌍한 로봇을 무수히 지배해도 땅을 버리고 살 수 없어요.”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무엇을 위해 이 세계를 만들었는지에 관해서는 영화의 오프닝에 이미 단서가 있는 듯하다. '시타'가 해적들의 공격에 의해 비행선에서 추락하는 첫 장면 이후, 히사이시 조의 곡 'The Girl Fell from the Sky'가 흘러나오는 영화의 오프닝 시퀀스는 물론 음악 자체가 유명하지만 배경에 그려지는 장면들에도 주목할 만한 대목이 있다. 영화에 나오는 '라퓨타'는 섬 하나 정도로 보이지만 오프닝에 나타나는 과거 수백 년 전의 라퓨타는 수십 개의 섬들이 모여 군락을 이루었던 것으로 묘사되고 있고 부유섬만이 존재했던 게 아니라 라퓨타 인들의 압도적인 과학 기술로 만들어진 수많은 비행선들도 함께였다. 지구의 모든 나라들을 간단히 제압할 수 있는 초월적인 군사력도 물론이었다. 길지 않은 오프닝으로 <천공의 성 라퓨타>의 도입에는 이미 '라퓨타'의 흥망성쇠를 집약해 그려낸다.
지구인의 입장에서라면 라퓨타의 존재는 그 자체로 공포의 대상인 동시에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기도 했겠다. '파즈'의 아버지가 라퓨타를 운 좋게 찍은 사진이라며 공개한 것을 사람들이 믿지 않았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이미 수백 년 전에 멸망해 전설로만 남은 그곳이 현존한다는 사실 자체도 믿기 어려운 것이겠지만 라퓨타로 향하는 길에는 인간이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와 위력의 폭풍, 번개가 기다리고 있어서다. '파즈'의 아버지와 일행이 비행선으로 거기까지 올라갔던 것도 기적처럼 행운이 따른 것이었고, 거대한 구름 뒤에 가려진 '라퓨타'의 일부나마 사진으로 남길 수 있었던 것도 그만큼의 기적 같은 일이었으니 일반적인 시각에서 그곳을 눈으로 직접 보았다는 건 그때의 상식을 벗어나는 일이었다. '파즈'만이 그게 거짓이 아니라고 믿었을 뿐이다.
작품의 메인 빌런인 '무스카'는 정부 관계자인 것으로 묘사되며 정부와 군은 전설로만 치부했던 사람들과 달리 '라퓨타'에 진지하게 관심을 가지고 추적해왔던 것으로 보인다. 멀지 않은 과거에 '라퓨타'에서 쓰이던, 인간의 기술로 만들었으리라 납득하기 어려운 로봇이 하늘에서 갑자기 떨어진 적이 있고 '시타' 본인은 그 존재를 알지 못했으나 '시타'가 가지고 있는 비행석 결정체의 존재가 알려지면서 정부에서도 '라퓨타'가 아직 존재한다고 믿게 된 것이다. 표면적으로 '무스카' 개인은 '라퓨타'의 언어나 문명에 대해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고 그것을 복원하는 것 자체 - 나아가 '라퓨타'의 힘을 자기 것으로 만들어 지구 전체를 지배하려는 사람 - 를 추구하지만 정부와 군은 '라퓨타'에 남아 있는 각종 보물들을 탐낸다.
'시타'가 언급한 자기 고향의 '곤도와'(라퓨타 인들 중 일부가 생존해 지구에서 대를 이어왔던 곳으로 추정) 노랫말을 생각하면 이들은 땅에 뿌리내릴 생각이 아니라 땅을 벗어날 생각을 하고 있는 셈이다. 지구에는 없는 것을 찾고자 골몰해 있었으니까. 사실 이들은 꽤 전형적이고 예상 가능한 빌런들이기도 한다. '무스카'가 지적이고 신사적인 언행과 카리스마를 보여주는 인물이란 점도 그렇고 그와 달리 군 관계자는 뻔하게 보일 정도로 물질적으로 탐욕스러운 이들로 그려진다. 다만 이것은 캐릭터가 입체적이지 못하다는 단점이 된다기보다 오히려 34년 전에 만들어진 애니메이션이 한 스튜디오의 훌륭한 출발점이 되었다는 면에서 다르게 보인다. '무스카'는 충분히 '파즈'와 '시타' 입장에서 압도당할 만큼 위력을 지닌 존재이기도 하다.
<천공의 성 라퓨타>는 익숙하고 좋은 메시지를 대중적인 화법으로 잘 전달할 줄 아는 작품이다. 바람과 함께 살아가며 씨앗과 함께 새들과 봄을 맞이하자는 이야기는 아무 작품에서나 적당히 끼워 넣을 수 있다, 권선징악처럼. 그러나 이것이 현실 세계와 이상 세계의 관계를 포괄하고 지구 소년 '파즈'와 라퓨타 출신의 소녀 '시타''의 이야기로 전해지는 순간, 게다가 애니메이션이라는 장르와 만나는 순간 특별한 이야기가 된다. 지브리의 작품들을 좋아하는 이들 중 <천공의 성 라퓨타>를 언급하는 이들이 많은 건 단지 스튜디오의 공식적인 첫 작품이어서만은 아닐 것이다. 그 옛날 사람들이 하늘을 나는 일을 꿈으로만 꾸었던 것처럼, 한 번도 경험해본 적 없는 세계를 처음 만났을 때의 그 경이로움 때문이었겠다.
그 경이로웠던 마음을, 지금도 기억하는지. 책이든 영화든 게임이든 여행이든 무엇으로부터든 간에. <천공의 성 라퓨타>를 두 번 다시 보면서 주로 눈과 마음에 들어왔던 건 있을 거라는 믿음만 가지고 있었는데 실제로 '라퓨타'를 본 '파즈'의 표정과, 자신도 몰랐지만 스스로의 뿌리를 둔 곳임을 알며 그곳을 보게 된 '시타'의 표정이었다. 나아가 지금은 해적단을 이끌고 있지만 과거 남편과 함께 모험가로 각지를 누비며 활약했던 '도라'가 '파즈'와 '시타'를 보는 마음이었다. 지금은 '할머니'로 불리지만 '도라'의 방에는 그가 젊었을 때의 사진 - 지금과 똑 닮은 머리 모양을 한 채로 위풍당당히 서 있는 - 이 걸려 있다. 비행선 위에 올라가 보초를 서던 '파즈'와 거기 몰래 올라간 '시타'의 대화를 통신 장치로 듣게 되는 '도라'의 표정이 떠오른다. '도라'는 두 소년 소녀를 보며 자신의 유년을 떠올렸겠지. 눈을 감고도 그것들이 선연히 그려졌겠지. 본 적 없는 세계가 다른 어떤 이에게는 생생히 경험한 세계가 될 수도 있다. 우리는 끝내 그 세계들 사이를 누비며 기억을 더듬고 또 그리움 저편을 넘나들며 추억 하나를 갖게 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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