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를 딛고 춤추며 앞으로 나아가기
소설가 박완서의 산문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답다>에는 “전쟁은 그렇게 무자비했다. 그래도 나는 살아남았으니까 다른 인생을 직조할 수도 있었지만 내가 당초에 꿈꾸던 비단은 아니었다.”라는 문장이 있다. “내가 당초에 되고 싶었던 건 소설가가 아니었다”고 말하는 그의 이야기는 단순히 전쟁이 일상을 앗아간다는 사실을 말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자체가 얼마나 비극적인 것일 수 있는지 암시한다. 전쟁은 아이의 얼굴도, 여자의 얼굴도, 그렇다고 사람의 얼굴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전쟁이 일어나던 해의 박완서는 스무 살이었다.)
또 다른 ‘전쟁 영화’ 이야기를 해볼까. ‘12세 이상 관람가’에 ‘열 살’ 소년이 주인공인 전쟁 영화라면 상상할 수 있겠는가. 타이카 와이티티가 연출 및 각색하고 출연까지 한 <조조 래빗>(2019)은 소설 <갇힌 하늘>(Caging Skies)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각색상을 수상한 작품이기도 하다. 주인공은 나치 독일의 청소년 조직 ‘히틀러 유겐트’ 단원인 ‘요하네스 베츨러’(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다. 진심으로 나치 사상을 신봉하고 히틀러를 동경하는 쪽이라기보다는 단지 소속감을 느끼고 친구를 만들고 싶어 단원이 된 듯한 열 살 소년. 브라이언 싱어의 <작전명 발키리>(2008) 속 주인공이기도 했던 폰 슈타우펜베르크가 언급되는 것으로도 짐작할 수 있는 <조조 래빗>의 작 중 배경은 이미 독일의 패색이 짙었던 1945년. 전쟁 말기의 상황을 <조조 래빗>은 내내 소년의 시선에서 바라본다.
소년의 시선에는 상상 속 친구가 있다. 타이카 와이티티가 연기한 ‘아돌프 히틀러’는 진짜 히틀러가 아니라 ‘요하네스’, 곧 ‘조조’의 상상 안에만 있는 인물이다. 그 자체로 ‘조조’가 갖고 있는 나치즘에 대한 막연하고 실체 없는 동경 내지는 환상을 형상화 한 이 인물과 대조되는 캐릭터는 ‘조조’의 집에 숨어 사는 유대인 소녀 ‘엘사’(토마신 맥켄지)다. 그리고 ‘조조’의 엄마 ‘로지’(스칼렛 요한슨).
나치 사상에 대한 환상 속에 살던 소년 ‘조조’는 자신의 가정을 둘러싼 여러 가지 일들과 전황의 변화 속에서 자신이 믿고 있던 것이 얼마나 쉽게 허물어질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지켜보고 경험한다. 영화 초반 그는 유겐트 내에서 겁쟁이로 낙인 찍혀 ‘조조 래빗’이라는 별명을 얻지만 ‘조조’의 엄마는 “토끼는 겁쟁이가 아니”라고 말한다. 전쟁에서 ‘겁쟁이가 아닌 얼굴’은 어떤 것인가.
제2차 세계대전을 배경으로 삼는 영화는 당장 <인생은 아름다워>(1997) 같은 작품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숱하게 많은데, <조조 래빗>이 하는 이야기는 그들로부터 예상 가능한 바에 그치지 않는 것 같다. 특히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비롯한 2차 대전 중의 주요 전황이나 사건에 대해서라면 속속들이는 아니어도 꽤 여러 가지를 우리는 이미 접해왔지 않은가. 새로울 것이 또 무엇일까.
“인생은 선물이야. 우리는 마음껏 즐기고 축하해야 해. 살아있게 해주셔서 감사하다고 춤을 춰야 된다고.”
-로지, 조조에게
참혹한 전쟁의 실상을 고발하는 영화도, 그렇다고 해서 눈물을 짜내는 슬픈 영화도 아니게 다가오는 <조조 래빗>은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조조’의 이야기를 뭉클하고도 아련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만든다. 저 소년에게 가혹한 일은 우리에게도 가혹하다. 그러니 우리는 마찬가지로 저 이야기를 생생히 되돌아보고 인식해야 한다고, 그것을 기반으로 춤추듯 앞으로 나아가야만 한다고. <조조 래빗>은 그렇게 이야기하는 영화로 내게 다가온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과 엔딩 크레딧에 걸쳐 들을 수 있는 데이빗 보위의 노래 ‘Heroes’는 (내적) 춤을 추게 만들 뿐 아니라 그 자체로 얼마나 어울리는 선곡인가. 베를린 장벽을 무너뜨린 기적의 곡으로 통하는 노래.
장벽을 붕괴시키려면 그것이 어디에 어떻게 세워졌는지를 똑똑히 알아야 한다. 앞으로도 전쟁이 일어나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없지만, 이미 70년도 더 지난 이야기가 (물론 나를 포함한) 요즘 세대에게는 낯설거나 멀게 다가올 수 있겠다. <조조 래빗>은 오히려 그래서 더 필요하다. ‘전쟁 영화’라고 해서 꼭 막대한 예산을 들여 살육의 현장을 참혹하고 고통스럽게 담아내야만 하는 것은 아니겠다. 타이카 와이티티는 연출자로서는 물론 출연자로서 그 점을 간파하고 있으며 로만 그리핀 데이비스를 비롯한 출연진이 연기한 영화 속 인물들 역시 정확히 그 이야기의 일부이자 주역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