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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Oct 23. 2021

"만약 이게 내 최선이라면?"

어디서나 내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다는 것


"만약 이게 내 최선이라면?"

(What if this is the best version?)

[영화 <레이디 버드>(Lady Bird, 2017), 그레타 거윅]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피어슨.’

-‘크리스틴’이 교내 연극부 지원서에 쓴 자신의 이름


맥피어슨 가의 딸 ‘크리스틴’(시얼샤 로넌)는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 대신 스스로를 ‘레이디 버드’라고 부른다. 별명 정도가 아니라 아예 학교에서는 물론 집에서 가족들에게까지 그 이름으로 자신을 불러줄 것을 요구하는 사람. 영화 <레이디 버드>(2017)의 제목은 바로 그 ‘레이디 버드’다. 노아 바움백의 영화에서도 자신의 자전을 일부 반영해 캐릭터를 만들고 연기했던 그레타 거윅이 이번에는 직접 감독까지 맡았다. (<레이디 버드>는 그레타 거윅의 감독 데뷔작이다) 실제의 그레타 거윅은 본명 대신 별명을 스스로 짓지도 않았고, 학교에서도 규범 같은 것을 잘 따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자전적인 이야기라고 해서 꼭 자신의 생애를 그대로 다뤄야 하는 것은 아니고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다. <프란시스 하>(2012)에서 주인공 ‘프란시스’(그레타 거윅)가 부모님을 만나기 위해 잠시 들르는 고향으로 표현되었던 캘리포니아 주 새크라멘토가 <레이디 버드>의 주 무대다.


영화가 어떻게 흘러갈 것인지를 간결하고도 확실하게 보여주는 오프닝. 엄마가 탄 차 조수석에 앉아 있는 ‘크리스틴’은 사소한 이야기에서 시작된 말다툼 끝에 반항적인 마음으로 차 문을 열고 옆으로 뛰어내린다. 다행히(?) 한쪽 팔에 깁스를 하는 정도의 부상을 입고 이야기는 시작된다.


영화 '레이디 버드' 스틸컷


‘크리스틴’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온몸으로 자신의 타고난 정체성을 부정하고 자신이 원하는 모습으로 살기 위해 현재를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하는 고등학생이다. 자신의 옷차림을 보고 “나 새크라멘토에 사는 사람처럼 보여?”라고 묻는 건 그만큼 그렇게 보이고 싶지 않다는 뜻이다. 당면해 있는 인생 최대의 과제는 하루 빨리 고등학교를 벗어나 미국 동부의 뉴욕에 있는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다. 학교 생활에 만족할 리도 없었는데, 어느 정도인가 하면 교내에 연극부가 있다는 것도 3학년이 되어서야 처음 알게 된다.


학교 생활을 아주 열심히 하는 모범생은 아니었던 탓인지 지도 교사들도 ‘크리스틴’이 미국 동부의 학교로 진학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 듯하다. 부모님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거기에 대해 ‘그렇구나’ 하면 바로 ‘크리스틴 “레이디 버드” 맥피어슨’이 아니겠지. 연극부 오디션에서도 “제가 지어서 저에게 준 제 이름이에요”라고 ‘레이디 버드’를 당당하게 언급한 그는 엄마 몰래 동부의 몇몇 대학들에 지원서를 쓴다. 그 과정에서 아빠에게는 슬며시 이야기를 꺼내고 일부 도움을 받기도 한다. 영화 중반에는 루카스 헤지스와 티모시 샬라메가 각각 연기한 두 명의 남자친구도 차례로 등장한다. 하지만 <레이디 버드>는 그레타 거윅이 출연한 이전 작품들이 그랬던 것처럼, 여성 서사의 중심에 ‘연애’를 두지 않는다.


그레타 거윅은 자신이 쓴 이 시나리오에 대해 “내가 아는 대부분의 여성은 청소년 시절 각자의 어머니와 그 무엇보다 아름답고 헤아릴 수 없이 복잡한 관계를 맺었다고 한다. 나는 그 모녀 관계를 영화에 중심에 두고 싶었다.”라고 말한다. 남자친구나 아빠를 직접적으로 통과하지 않고 형성되는, 오직 모녀 사이에서만 가능한 관계. 이 영화가 ‘크리스틴’과 엄마 ‘매리언’(로리 멧칼프)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마찬가지로 둘의 이야기에서 끝나는 건 그만큼 이 관계가 영화 전체에서 가장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레이디 버드' 스틸컷


“엄만 옷정리 안하고 잠자리에 든 적 없어? 한 번도? 엄마의 엄마가 화내서 속상한 적 없었어?”


대화는 주로 이런 식이다. ‘크리스틴’은 엄마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사사건건 부딪힌다. 물론 그러다가 이내 함께 옷가게에서 예쁜 옷을 구경하기도 하지만 여기서 말하고 싶은 건 ‘크리스틴’이 엄마가 자기 나이일 때는 어땠는지를 궁금해한다는 점이며, 한편으로 그 말은 그만큼 본인도 성인이 되어 부모로부터의 간섭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딸은, 결국 엄마처럼 살게 되는 걸까 아니면 ‘엄마처럼은 되지 않겠다’라고 다짐하고 그것을 실현하게 되는 걸까.


<레이디 버드>를 처음 관람했을 때는 대학을 졸업하고 학생이라는 신분이자 안전망을 완전히 벗어나던 내 시기를 주로 떠올리며 이 이야기를 생각했다. ‘크리스틴’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는 것과 새크라멘토를 벗어나 뉴욕에 가는 것, 그리고 서울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는 건 서로 다른 층위의 것일 수 있지만 대학에 처음 입학할 때보다는 오히려 졸업 때가 ‘크리스틴’의 이야기와 더 맞아 들어간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서구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게 사실상 독립의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하니까. 그러나 <레이디 버드>가 마냥 ‘시작’과 ‘출발’의 영화이기만 한 것은 아니겠다. 어쩌면 이 이야기는 ‘크리스틴’이 갖은 실망과 좌절 끝에 자신에게 주어진 ‘바꿀 수 없는 것’을 일부 자각하는 이야기일 수도 있다.


영화 '레이디 버드' 스틸컷

‘크리스틴’의 첫 번째 실망. 그는 하고 싶은 것과 사고 싶은 것을 원하는 만큼 얻을 수 없는 가정에서 태어나 자랐다. 뉴욕에 있는 대학에 가기 위해서는 일단 합격을 해야 한다는 사실 말고도 비싼 학비가 기다리고 있지만, 일차적으로 이것은 난관에 부딪힌다. 아빠 ‘래리’(트레이시 레츠)가 실직을 하게 되고, 엄마는 ‘크리스틴’이 지금 살고 있는 지역에 위치한 (그리고 학비가 상대적으로 싼) 시립 대학으로 가야할 것임을 거의 기정사실화 한다. 다행히 아빠는 그런 상황에서도 ‘크리스틴’에게 “방법을 찾아보자”라며 그가 동부 대학에 엄마 몰래 지원서를 쓰는 일을 묵인해주지만, 어쩌면 ‘크리스틴’은 자신이 생각하고 꿈꾸는 것과는 달리 누군가와는 시작부터 다른 출발점에 서 있는 것이다.


두 번째 실망. 영화에서 중점적으로 나타나는 서사의 핵심 요소는 아니지만, ‘크리스틴’은 자신이 “왜 잡지에 나오는 모델처럼 생기지 않았을까” 하고 중얼거린다. 혼자만 말하는 게 아니라 옷 구경을 갔다가 피팅 룸 앞에서 바로 곁에 있는 엄마에게 묻는다. <레이디 버드>의 서사에서 물론 주인공의 외모가 중요하지는 않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주인공이 ‘10대’이고 ‘여성’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크리스틴’은 연극부에서 자신이 비중 있는 배역을 맡지 못했다는 것에 좌절하기도 하고, (다시 말해서 연기력 면에서도 크게 인정받은 게 아니라는 것이며) 뉴욕의 명문대까지는 아니더라도 ‘예술 계통’의 학교에 진학하기를 바라는 사람이다.


“난 언제나 네가 가능한 최고의 모습이길 바라.”라는 엄마의 말에 그가 거울 앞에 서서 “만약 이게 내 최선이라면?”이라고 답하는 장면이 있다. ‘크리스틴’은 엄마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이 말은 한편으로는 엄마 ‘매리언’이 자신을 좀 더 사랑스럽게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기를 바란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이게’라는 말은 내적으로든 외적으로든 자신이 가지고 있는 조건들에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는 뜻도 된다.


최선이라고 말할 때 그 선에 높낮이가 있다면, ‘크리스틴’이 원하는 곳은 특정한 ‘어딘가’인데 지금 그가 놓여 있는 자리는 그보다 낮은 곳이고 본인의 마음을 다해 노력해 도달할 수 있는 곳은 그보다 약간 높지만 원하는 곳보다는 낮은 ‘어딘가’라고 해볼까. 만약 이게, 최선이라면. ‘크리스틴’은 성인이 되기도 전부터 이미 자신이 사는 곳을 친구에게 “철길 너머 구린 동네”라고 소개하고 동네의 어느 비싸고 예쁜 집에 자기가 산다고 다른 친구에게 거짓말을 하기도 한다.


어떤 종류의 자각은 자신의 위치(앞서 지칭한 높낮이)가 그렇게 낮은 것도 아니지만 그리 높지도 않다는 ‘애매하다고 느낌’에서도 비롯할 것이다. 학교에서 소위 ‘인싸’로 불릴 만한 스타도 아니고 그렇다고 교사들이 주목하고 예뻐라 하는 우등생도 아닌 ‘크리스틴’의 위치처럼. 이는 가족들도 마찬가지여서 오빠는 마트에서 계산원으로 일하고 실직한 프로그래머 아빠 대신 간호사인 엄마는 정상적인 업무량보다 더 초과 근무를 한다. 그래야만 간신히 ‘중간은 사는 집’으로서의 위치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는 그래서 “네가 얼마나 쓸데없는 데 돈을 낭비하고 있는 줄 아느냐”라고 ‘크리스틴’을 혼내기도 한다.


영화 '레이디 버드' 스틸컷


앞에서 인용했던 “엄마는 옷 정리 안 하고 잠자리에 든 적 없어?”라는 말에 엄마 ‘매리언’이 하는 답도 이 ‘중산층’임을 지키려는 데서 나온다. 평소에 정리를 잘 하고 다니고 옷을 깨끗하게 세탁해 입고 다녀야 남들이 그걸로 자신을 무시하지 않는다면서 말이다. 그러나 실망하고 좌절하고 남들과 스스로를 자조적으로 비교만 했다면 <레이디 버드>의 이야기는 만들어지지 못했을 것이고 그 이야기를 만든 지금의 그레타 거윅도 시얼샤 로넌도 물론 아니었겠지. <레이디 버드>는 그 ‘비범하지 못함’에서부터 역설적으로 특별한 에너지와 활력을 찾는 이야기다.


“우리의 삶은 남들만큼 비범하고, 남들의 삶은 우리만큼 초라하다.”
-허지웅, 『살고 싶다는 농담』(웅진지식하우스, 2020)에서


지금까지 나열한 실망의 종류들은 모두 결과이거나 결론에 해당한다. 자신이 지금 어떤 위치에 ‘놓여’ 있고, 자신의 외모 등이 현재 어떤 ‘상태’라고 규정하는 것. 다시 말해서 이런 것들은 모두 본인이 선택할 수 없이 오로지 태어날 때부터 갖춘 채 살아온 요소들인데, 결국 우리가 ‘크리스틴’의 삶에서, 아니 어쩌면 영화 밖 우리의 삶에서 더 중요하게 생각해야 할 것은 자신이 선택해나가고 바꿔나갈 수 있는 것들이 아닐까 싶다. 그가 자신을 ‘레이디 버드’로 명명하고 혼자만의 지칭이 아니라 타인에게도 그것으로 자신을 호명해달라고 요구하는 일 역시 이와 같은 맥락일 것이다. 그리고 그건 자기만의 외침에 지나지 않고 실제로 친구들과 가족들 역시 ‘크리스틴’을 ‘레이디 버드’라고 불러준다. <프란시스 하>에서도 주인공의 이름이 중요했듯이 <레이디 버드>에서도 ‘레이디 버드’라는 제목이자 이름 자체가 중요해진다.


이 ‘레이디 버드’라는 이름을 가만히 생각해보면, ‘크리스틴’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을 그렇게 불러야 한다고 요구하지는 않는다. 후반부 뉴욕으로 새 터전을 잡고 나서의 에피소드에 자신을 ‘크리스틴’이라고 처음 만난 사람에게 소개하는 장면이 잠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상황에 따라 혹은 단지 사람을 가려서 자신을 때에 따라 달리 소개하는 건 좋은 캐릭터를 잘 만드는 사람의 영화에서라면 어울리지 않는, 달리 말해 ‘핍진’하지 않은 것이다. 서사의 일관된 틀 안에서 인물이 할 것이라고 믿어지는 말과 행동들을 영화에서 좋은 캐릭터를 만드니까. 그러니까 ‘크리스틴’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친구들이나 가족들에게 자신을 ‘레이디 버드’라 불러 달라고 한 것이고, 마찬가지의 목적으로 누군가에게 자신을 ‘크리스틴’이라고 소개한 것이겠다.


그가 자신을 본명으로 소개하는 대목이 영화의 다른 부분에는 없으므로 이것을 섣불리 경향성으로 따지기는 어려울 수 있다. 다만 어느 정도 유추하자면 나고 자란 고향인 새크라멘토에서는 자신을 오래도록 잘 알고 겪어온 사람들에게 ‘레이디 버드’라는 별칭을 언급하고, 뉴욕처럼 자신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곳에서라면 누군가 자신을 ‘크리스틴’이라고 불러도 상관없는 것이다. 지긋지긋하고 별 볼 일 없다고 생각하는 고향 소도시에서는 이름이라도 특별하게 지어야만, 즉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선택권 없는 성 대신 자신이 직접 의미를 부여해서 지은 ‘레이디 버드’를 사용해야 스스로를 본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잘 표현할 수 있다. 그러나 뉴욕에서라면 이미 그에게는 ‘뉴욕의 대학교에 다니는 사람’이라는 (자신이 원하던) 정체성이 추가되어 있기 때문에 그 자체로 ‘이미 특별해져 있는’ 것.


부모는 자녀가 성장하고 독립해 곁을 떠나는 것을 아쉬워하고 반대로 그런 자녀는 상경해 주체적이고 독립적인 성인의 삶을 원하는 일, 이것은 영화에서든 드라마에서든 우리 주변에서든 별로 새롭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레이디 버드>가 자전을 바탕으로 고유해질 수 있는 비결은 지금껏 언급한 주인공의 성격과 그의 엄마와의 관계에 있다. 새크라멘토를 떠나 뉴욕으로 가기 전, 이 영화에는 새로운 공간으로 첫 발을 딛는 ‘크리스틴’이 공항에서 탑승 게이트로 가기 전 배웅하는 가족의 얼굴을 뒤돌아보는 장면이 없다. 곧장 장면이 바뀔 따름이다.


그렇다고 해서 서로가 손을 흔들어주고 인사하는 ‘장면’이 ‘크리스틴’과 엄마 ‘매리언’, 그리고 아빠 ‘래리’ 사이에서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겠지. 다만 관객에게 그것을 영화가 보여주지 않았을 뿐. 대신 영화가 보여주는 건, 면허를 따고 차를 운전하는 ‘크리스틴’의 옆모습과, 딸을 데려다 준 뒤 혼자 차를 운전하는 ‘매리언’의 옆모습을 서로 나란히 포개는 것이다.


영화 '레이디 버드' 스틸컷


‘크리스틴’이 엄마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고 여겨도, 엄마가 딸의 어떤 행동을 못 마땅히 여기더라도, 두 사람에게는 어쩔 수 없이 공통점이나 유사점이 존재한다는 것도 <레이디 버드>는 놓치지 않고 보여준다. ‘크리스틴’이 자신이 일하는 곳에 찾아온 전 남자친구 ‘대니’(루카스 헤지스)를 어떤 일로 토닥이는 장면은 엄마가 ‘크리스틴’이 다니는 고등학교의 신부 ‘르비아치’(스티브 헨더슨)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는 장면과 겹쳐진다. ‘르비아치’ 신부가 마땅히 속내를 털어놓을 이 없어 찾아간 병원에서도, 간호사인 엄마와 잠시 대화하는 대목이 있다. ‘크리스틴’과 ‘매리언’의 행동 혹은 태도에 있어서 영화 내에는 이렇게 연결해볼 수 있는 요소들이 조금 더 배치되어 있다.


결국 ‘크리스틴’이 주인공인 <레이디 버드>는 ‘크리스틴’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그의 유년을 함께 통과한 주변인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이 놀라운 연출 데뷔작에서 그레타 거윅은 작가이자 감독으로서 어쩌면 ‘크리스틴’에게만 존재한 것은 아니었을 생의 어떤 관문을 들춰내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리고 자신에게도 상기시킨다. 시얼샤 로넌은 그레타 거윅에 대해 “뛰어난 관찰자”라고도, “열린 마음으로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도 언급했다.


이 글을 쓰며, 극장 개봉 당시 <레이디 버드>를 처음 감상했을 때 적은 기록들을 다시 읽어보았다. 이런 문장이 눈에 띈다. “내 경험을 떠올리면서 영화가 보여주진 않았지만 스크린 너머 그들의 일상에 적어도 한 번 이상은 있었거나 꼭 있게 될, 그 뒷모습들을 떠올릴 수 있었다.” 뉴욕에 간다고 해서 ‘크리스틴’의 성인으로서의 삶이 행복하고 낭만적인 나날로만 채워질 리는 없겠지. <레이디 버드>의 말미에서 뉴욕에 간 ‘크리스틴’이 경험하는 건 어떤 환상적인 사건이 아니라 ‘여기도 다 사람 사는 곳이구나’ 정도의 심드렁한 감상이다. 어쩌겠어, 우리는 매 순간이 자신의 최선이라고 믿으며 살아갈 수밖에. 혹은, 스스로의 최선이라고 말해볼 순간이 잠시나마 있다는 게 다행일지도. 어디에나 마찬가지로 사람이 산다는 건, 어디서나 ‘내 이야기’를 써내려갈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할 테니까.


영화 '레이디 버드'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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