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왜 그리도 서로 오해하고 미워하며 미완의 판단으로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상처를 주고야 마는가. 소설가 테일러 젠킨스 레이드의 장편 『에블린 휴고의 일곱 남편』(박미경 옮김, 베리북, 2023)은 잘 읽히는 재미있는 작품으로 해외 소셜미디어에서 큰 화제가 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소설은 가벼운 소재를 다루면서도 얕지 않은 방식으로 인물의 입체적인 내면을 복합적으로 조명한다.
소설가 테일러 젠킨스 레이드 @Vanity Fair
『에블린 휴고의 일곱 남편』의 주된 이야기는 노년의 배우 '에블린 휴고'가 결혼 생활 등 자신의 삶에 대해 한 젊은 잡지사 기자에게 털어놓으면서 시작되는 회고 형식으로 펼쳐진다. 작중 에블린 휴고의 이야기를 듣는 화자 '모니크 그랜트'는 이 소설의 독자와 거의 같은 속도와 정도로 정보를 습득한다. 즉 회고를 듣는 화자가 곧 소설을 읽는 독자다. 여기에 실제 신문 기사를 보는 듯한 페이지들이 인용처럼 더해져 에블린 입장에서 에블린 위주로 전해질 이야기의 외연을 넓혀준다. (이 장치는 소설의 구성을 단조롭지 않게 해주는 효과도 있다.)
그 자체로 미디어와 대중이 연예인을 '소비'하는 방식에 대해 내내 신랄함과 위트를 담은 이 두꺼운 장편은 미디어를 전공한 소설가의 장점이 여실히 묻어난다. <안나 카레니나>나 <작은 아씨들> 등 당대의 유명한 저작과 영화에 픽션을 더하는 한편, 할리우드 고전기를 풍미한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1932-2011)를 얼핏 연상케 하는 작중 에블린 휴고의 궤적은 읽는 내내 그가 발화하는 이야기 이면에 당사자만이 알 수 있는 많은 감정이 응축되어 있음을 실감케 한다.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 @elizabethtaylor.com
"어떤 일에 유감스러워하면서도 후회하지는 않을 수 있어." (41쪽)
"촬영장에서, 우리는 카메라 렌즈에 모든 걸 마법처럼 멋지게 담고 싶어 해. 하지만 다 끝나기 전까진 제대로 담아냈는지 확실하게 알아낼 방법이 없어." (368쪽)
가십 위주로 유통되기 쉬운 유명인의 이야기에 있어 우리가 진정 생각해야 할 것은 그들에게도 마땅히 삶이 있다는 점이다. 사람들은 보이는 것만을 전부라 생각하고 흔히 그들이 자신과 똑같이 살며 사랑하고 느끼는 개인이라는 점을 잊는다. 유명하다는 이유로 마치 원치 않는 관심을 마땅히 감내해야만 하는 것처럼 당연시하기도 한다. 깊은 사생활까지 '알 권리'의 잣대를 들이대는가 하면 자신의 관심과 애정이 마치 유명인에게 무슨 말이든 해도 되는 권리를 부여해 주는 것처럼 착각해버리기도 한다.
한편으로 에블린 휴고는 자신의 환경을 바꾸고 출세하기 위해 누구보다 상술한 대중들의 관심과 미디어 산업의 어떤 토대를 잘 이용한 인물로 보이기도 한다. 그에게 있어 결혼은 일종의 비즈니스처럼 계산된 면이 있었고 에블린 휴고 역시 누군가(들)에게 상처를 안겨 주었다.
"진실은 그 자리에 있었지. 그들이 관심만 기울였다면 포착했을 거야." (499쪽)
모니카 그랜트와의 긴 대화를 통해 소설의 독자는 에블린 휴고의 일생의 사랑이 누구였는지를 자연스럽게 깨닫게 된다. 문제는 에블린 휴고의 전성기에는 그것이 알아지지 않았고 세월이 지난 뒤 스스로의 회고를 통해 간신히 전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것. 20세기의 미디어 환경은 지금과 많이 다르지만 소설 『에블린 휴고의 일곱 남편』은 여전히 연대를 능히 초월할 만한 시사적 화두를 제공한다.
이 소설은 아직 세부사항이 정해지지 않았으나 넷플릭스가 영화화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읽는 내내 여러 영화인들의 이미지와 삶을 겹쳐 떠올렸고, 읽고 나니 다양한 미디어 믹스로의 확장성까지 갖춘 영리한 소설이었다는 생각도 든다. 원작자 테일러 젠킨스 레이드가 직접 제작자로도 참여할 영화 <에블린 휴고의 일곱 남편> 역시 기대할 만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