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머티리얼리스트'(2025) 리뷰
가령 낸시 마이어스나 노라 에프런 같은 여성 감독들이 만들고 빛내온 '현대'의 할리우드 '로맨틱 코미디'가 이제는 한물갔거나 시대에 뒤떨어진 장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때쯤 반갑게도 <머티리얼리스트>(2025)가 찾아왔다. 잘 나가는 사모펀드 매니저과 케이터링 아르바이트를 하는 연극배우 지망생, 그리고 (한때 배우를 꿈꿨으나) 결혼정보회사의 매치 메이커로 일하는 주인공 루시. 여기에 배경은 이름을 발음해보기만 해도 어떤 낭만을 불러일으키는 뉴욕. 여기까지만 생각하면 또 어디서 많이 봐 왔을 대도시의 삼각관계인가 싶겠지만 <머티리얼리스트>는 제목에서 유추할 수 있듯 '결혼'과 매칭을 소재로 사랑과 관계의 속성을 조금 더 현실적으로 탐구하고자 한 작품이다.
설렘을 주는 달콤한 로맨스에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소재와 제목이지만 셀린 송은 전작보다 조금 더 확장된 외연/규모와 더 다층적인 인물 관계 속에서 한때 결혼정보회사에서도 일했던 자전적 경험과 극작가로서의 역량을 토대로 관객들에게 당신의 사랑은 무엇이고 만약 결혼을 하고 싶다면 그 이유는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관객 중 사랑 한 번 안 해본 이는 많지 않을 것이고 특히 이 현실적인 문제에 대해 저마다 정도는 달라도 대체로 여러 고민과 시행착오를 겪었을 것이므로 마치 <머티리얼리스트>는 결론을 끝까지 들어보지 않아도 흐름이 그려질 법한 이야기이기도 하겠다. 그렇지만 연출자의 의도와는 별개로 이 소재와 설정이 과연 어디까지 나아갔는지에 대해서는 돌아볼 여지가 있다.
먼저 언급할 것은 작품의 근간이자 전개의 핵심이 되는 매칭에 대한 것이다. 주인공 루시(다코타 존슨)의 고객 중 한 명인 소피의 말처럼 우리 모두 "상품이 아니라 사랑받을 가치가 있는 사람"이지만 이 '시장'은 철저히 비즈니스 영역에 있다. 무엇인가 특출 난 매력이 없다면 어느 시장에서도 설 자리가 없다. 심리 상담사에게 그러한 것보다 더 솔직하게, 결혼정보회사의 고객들은 자신의 수치화된 욕망(키, 연봉, 직업, 나이 등)을 매치 메이커에게 털어놓는다. 그저 "운명적인 만남"을 꿈꾸는 것일 뿐이라고 말하지만 고객들은 자신이 원하는 만남의 조건에 대해 리스트업 하며 자신이 지불한 비용(투자) 이상의 효용을 충족하는 만남을 기대한다. 적어도 <머티리얼리스트>의 초중반부가 전제하는 대로라면 결혼을 작동하게 하는 건 비즈니스 영역이고 그에 따르는 만남과 관계도 마찬가지다.
문제 혹은 변화는 루시가 고객의 결혼식장에서 만난 '부자 남자' 해리(페드로 파스칼)와 데이트를 이어가면서 시작된다. 둘의 관계가 진전되는 모습은 마치 기업 투자 유치 협상 과정에서 실사(DD)를 마친 뒤 최종 조건을 제시하는 일련의 과정 같다. 해리는 지금 루시에게 '투자'를 하고 있고 그건 겉으로 보이는 게 아닌 '무형자산'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좋은 파트너가 될 것이다. 이 만남은 이미 서로가 인지하고 있을 만큼 '계산(math)'적이다. 반면 루시는 자신이 그에게 '사랑'에 빠진 것인지 그의 '조건'에 매료된 것인지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그의 거침없음과 여유를 겸비한 매력에 이끌린다. (해리의 아파트에 처음 와서도 루시는 해리가 아니라 집안 곳곳을 살핀다.) 이 만남과 관계 진전은 계산적이면서도 동시에 사랑의 시작처럼 납득될 만큼 정교하게 설계된 일련의 시퀀스다.
이 영화가 전제하는 결혼과 만남이 온전히 비즈니스의 현실 영역임을 상기할 때 매치 메이커인 루시의 캐릭터성과 태도 변화의 양상이 중요해진다. 영화 속 대부분의 캐릭터들이 마치 각본을 위해 설계된 장치처럼 기능적으로 느껴지거나 혹은 상징과 메시지에 걸맞도록 구조화된 인물처럼 보이는 점은 작품 전체를 보고 나면 수긍되는 면도 있다. 하지만 해리와 존(크리스 에반스)과 관계를 맺는 루시에 대해서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의도한 바라면 수긍해야겠기도 하지만 루시는 사랑과 결혼의 물질적 속성을 관객에게 상기시키고 화두를 던지기 위해 배치된 '작중 인물'로 보일 뿐, 연기와 별개로 영화가 루시의 감정적 긴장과 갈등 국면을 충분히 보여주었다고 여겨지지는 않는다. 연기와 상황 묘사로 유추되는 정도 이상으로는 나아가지 못한다고 해야 할는지.
<패스트 라이브즈>도 일부 그런 면이 있었다고 기억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머티리얼리스트>도 극작가 특유의 양식적인 각본이 느껴졌기 때문인 것 같다. 잘 계산된 대사와 동선, 상황이 오히려 인물을 고유하게 바라보게 되는 면보다 이야기 전체의 얼개 안에서 도식적으로 캐릭터의 면면을 헤아리게 만드는 양상처럼 여겨진다. (작중 초반부 동료와의 대화에서 드러나듯) 현실적이고 물질적인 면에 동조하거나 그것을 추구하고 많은 '체크 박스'를 충족하는 고객 매칭에 어떤 성취를 느끼던 루시가 관계와 결혼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를 겪는 과정에 어떤 고객을 둘러싼 사건이 틈입하는 과정은 그래서 부자연스럽다. 관객이 현실적, 사회적 경험을 통해 납득하게 되는 것과는 별개로 영화가 살아 있는 캐릭터/인물로서 이 중대한 변화를 묘사하는 일에 얼마나 공들였을지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는 뜻이다. 그 변화의 계기가 되는 인물과 루시의 관계 양상 묘사마저 후반부에 이르러 다소 편의적이다.
이런 점을 돌아볼 때 "그래 맞아, 데이트가 어렵고 사랑은 생에서 몇 번 찾아오지 않는 '알아서 걸어 들어오는 것'이니 '그냥' 하면 되는 거야"라고 서술할 법한 어떤 깨달음에 이르는 과정에 있어서 <머티리얼리스트>는 영화 내내 보여주고 묘사하고 발화해 왔던 결혼 '시장'의 면면과는 달리 그 산업에 종사하는 주인공이 겪는 심리의 변화는 상대적으로 덜 세밀하게 다룬다. 극적인 각본의 효율에 기대고 영화적인 묘사에는 그만큼 공을 들이지 못했다는 인상을 준다. 물론 결혼/비즈니스도 사랑이 전제되어야 하고 그건 물질적 조건만으로 충족되는 건 아니지. 이건 관객의 경험치만으로도 영화 후반부에 이르러 충실히 짐작할 수 있을 영역이, 영화 내러티브가 보여주는 것을 앞선다. 그 결과 의도적이었을지라도 해리와 존은 그다지 주연처럼 느껴지지 않고 문제의 고객은 별안간 태도가 바뀌며 루시는 홀연히 결혼 업계에서 씁쓸한 회의감을 맛본 사람이 된다. 영화 속 세계가 생동하는 사람들의 시공간으로 느껴지기보다 특정한 탐구를 위한 양식화된 '무대'로 다가온다는 뜻이다. (루시가 일하는 결혼정보회사 자체의 묘사와 설정에 대해서도 조금 더 돌아볼 여지가 있다)
그러다 보니 영화가 끝내 전하는 바에 대해 끄덕이면서 관객 스스로 질문을 품게 되는 점과는 별개로 영화가 거기에 이르도록 충실한 세계와 인물을 지어 올렸는가 하는 면에 있어서는 그 세부에 대해 갸웃거리게 되는 것...인데 모순적이게도 <머티리얼리스트>는 모처럼 극장에서 만난 이 장르의 만족할 만한 갈래이기도 했다. 꼭 '로맨틱 코미디'로 정의할 필요는 물론 없고 색다른 접근으로 현대적인 관계의 속성을 탐구하는 이 시도가 그 자체로 반가운 면이 있었다는 뜻이다. 비싼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면 그 데이트가 낭만적이게 되는 것도 아니고 이 물질적 관계는 작중 표현대로 '시뮬레이션'과 '커스터마이제이션'이 제대로 가능한 영역도 아니니까, '우리'는 극장을 나선 뒤에도 여전히 관계에 서툴러지고 현실에 어려워하게 되는 것이다. (2025.08.19.)
(8월 8일 국내 개봉, 117분, 12세 이상 관람가. 수입/배급 소니픽처스코리아)
*인스타그램: @cosmos__j
*모임/강의 등 공지사항: linktr.ee/cosmos__j