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유열의 음악앨범'(2019)
내 지난 사랑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최소한 싸이월드 미니홈피 정도는 있는 시대였다. 그러니 라디오에 사연을 실어 보내며 좋아하는 그 사람이 (우연히) 들어주기를 바란다거나,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 전할 방법이 없어 전전긍긍하거나, 아니면 손바닥에 동전 냄새가 배도록 손에 쥔 채 공중전화 부스 앞을 서성거리던 시기는 내게 없었다고 해도 된다. 일단 남중, 남고를 거치는 내내 컴퓨터 게임에만 빠져 있었고, 대학에 와서도 여전히 게임에 빠져 있었다. 물론 게임에만 빠져 지내지는 않았다. 전공 수업의 과제를 도와주면서 친해져 지하철 귀갓길을 함께하던 후배를 좋아했던 적이 있는데, '오늘은 어떻게든 마음을 전해야지' 하고 다짐했던 날 그 사람의 미니홈피에 다른 사람의 하트 가득한 일촌평이 새로 올라온 것을 보고 혼자 울었던 기억. 시작하지도 못한 것을 혼자 끝낸 적이 있다.
그러나 영화 <유열의 음악앨범>(2019)을 보면서 인물들의 행동에, 그리고 마음에 공감할 수 있었던 건 적어도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기 이전의 시대가 내 유년에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다. 내게 처음 휴대전화가 생긴 건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부터였는데, (그것도 형이 쓰던 폰을 그대로 물려받은 것이었다) 알다시피 문자 메시지는 상대의 수신 여부를 알 수 없었고, 그건 미니홈피 방명록에 남긴 글 역시 마찬가지였다. 넷플릭스 시리즈 [좋아하면 울리는](2019)에는 보낸 지 불과 1분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왜 카톡 읽고 씹냐"라고 타박하는 어떤 장면이 있다. 반면 <유열의 음악앨범>에서 '미수'(김고은)와 '현우'(정해인)는 이메일의 비밀번호를 몰라서, 아니면 전화를 받을 수 없어서, 서로에게 연락하지 못하거나 연락이 어긋나는 상황을 빈번하게 겪는다.
요즘의 모든 것은 빠르다. 언제 어디서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서로의 일상을 즉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고 상대가 내 메시지를 읽었는지 여부조차 기술이 대신 확인해주는 시대다. 그렇다고 디지털 시대의 사랑은 나쁜가? 아니. 라디오를 '볼 수 있는' 시대는 감성을 해치는가? 아니다. 빠른 것에 길들여지면 느림이 필요한 것에 대해 제대로 살피기 어렵다는 얘기다. 다만 여기서 아날로그의 미학 같은 것을 설파할 생각은 없고, 많은 것을 찬찬히 돌아보고 생각할 수 있었던 시기에만 가능했을지 모를 어떤 감정을 마저 떠올려보려 하는 것이다.
"휴대전화에 디지털카메라가 들어 있다는 것, 정말 신기하지 않습니까?" 새로운 세기의 시작을 알리듯 라디오 DJ가 꺼내는 말. 한 독서모임에 나온 잡지사 디자이너로부터 "예전에는 한 컷 한 컷이 귀해서 사진을 공들여 찍었는데, 요즘은 후보정을 할 수 있으니까 무조건 연사 해서 수백 장씩 막 찍는다"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최근 카카오톡에는 (비록 제때 행하지 않으면 상대에게도 기록이 남지만) 보낸 메시지를 삭제할 수 있는 기능이 생겼다. 그러면, 메시지도 슬쩍 주워 담을 수 있게 되는 걸까?
<유열의 음악앨범>에는 '천리안' 계정을 통해 '미수'와 '현우'가 이메일을 주고받는 장면이 있다. 이때 관건은 '미수'가 군에 입대하는 '현우'를 위해 이메일 계정을 만들어놓고도 '현우'에게 이메일 계정의 비밀번호를 깜빡하고 알려주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미수'는 계속해서 '현우'의 계정으로 이메일을 보낸다. 그러다 우연히, '현우'가 자기 이메일 계정의 비밀번호를 알아낸 날, '미수'는 '현우'가 자기가 보낸 이메일을 '읽었'다는 걸 알고 뛸 듯이 기뻐한다. 이건 상대와 직접 이야기를 나누거나 상대의 반응을 즉시 확인했기 때문이 아니라 잠시 엇갈렸던 시간 동안 상대가 남긴 흔적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다. '현우'는 '미수'가 만든 비밀번호를 알아내려 노력했다는 뜻이다.
<유열의 음악앨범>은 애써 추억을 소환하는 영화는 아니다. 영화의 시작점이 1994년인데, 그때로 돌아가기를 주문하는 영화가 아니라 그 시기에 스무 살을 맞이했던 어떤 인물들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영화다. 그러나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이 영화는 아날로그 시대의 느린 사랑을 생각하게 만든다. 그건 '미수'와 '현우'의 관계가 빨리 진전되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건 이중적인 마음이다. 물론 내가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었을 때 상대가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겠지만, 너무 빠른 것은 가볍게 여겨진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느리고 여운을 남기는 게, 빠르고 즉각적인 것보다 더 좋다. 나는 '계속', '오래', '천천히' 같은 단어를 좋아하는 사람인데 <유열의 음악앨범>은 마치 나만 그런 건 아니라고 슬쩍 편지를 보내는 영화 같았다. (2019.0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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