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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May 14. 2018

만약 내 영화였다면, 보여주고 싶지 않은 관객들

전혀 새삼스럽지 않은 영화관 이야기

상업영화를 좋아하는 편이다. (<쓰리 빌보드> 개봉 당시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이 영화 반드시 봐야 한다고 떠들고 다녔고 무슨 영화 좋게 봤냐고 그러면 왠지 <플로리다 프로젝트>나 <레이디 버드> 같은 영화 이야길 해야 할 것 같지만 실은 <엑스맨><혹성탈출> 시리즈나 <레디 플레이어 원> 같은 영화에 훨씬 더 열광한다.) '상업영화도 좋아한다'고 해야 좀 더 정확할지 모르겠다. 영화의 시작은 오락용 볼거리였고 '장르'가 만들어진 것도 대중들의 입맛을 의식하고 맞추기 시작하면서부터니까. 여기까진 좋다. 다만 문제는, '오락'으로 간주되는 것의 속성은 '가볍다'라는 것에 있다는 점이다. 물론 가벼운 것 자체도 괜찮다. 즐거움과 희열을 제공하는 영화의 주된 목적은 존중받아야 하고, (모든 영화가 반드시 예술적 성취를 달성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오락을 즐기는 행위 역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것은, 태도의 경우라면 다르다. 일차적으로 극장은 공공장소지 혼자서 마음대로 행동해도 되는 곳이 아니라는 얘긴데, 자신의 즐거움이 타인의 그것을 해치는 수준이라면 그 즐거움은 존중받기 어렵다. 집에서 TV로 오락 프로그램이나 주말 특선영화를 보는 것과, 극장에서 '다른 사람들과 함께' 영화를 관람하는 행위는 그 성격이 다르단 얘기다. 안타까운 건 그 구분을 할 줄 모르거나 불필요하게 여기거나, 할 생각이 없는 사람들. 늘 그렇지만, 그 일부가 문제다.


마침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를 보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사람은 수시로 '카톡'을 확인했다. 표정이 굳어 있는 내 눈치를 본 것인지 액정 밝기를 낮추었는데 그런다고 해서 주변 사람에게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영화든 연극이든 뮤지컬이든, 폰을 그냥 끄거나 비행기 모드 하세요. 그게 맞는 겁니다.) 그러다가 중반 이후에는 전화를 받는다고 서너 번 자리를 들락거렸다. (통로 쪽에 앉은 내가 바보지.) 할 말을 잃게 만든 건, 본인 일행에게는 방해가 될지 모른다고 여겼던 것인지 폰 액정을 일행이 아니라 나를 향하는 쪽으로 더 기울인 것이었다. 짜증을 일부러 담은 목소리로 최대한 크지 않으면서도 그 사람에게만은 들릴 만큼, "핸드폰 좀 꺼주세요."라고 이야기하자 잠잠해졌다. 이제는 자신이 전화받느라 놓친 장면에 관해 옆자리 일행에게 속닥거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갤럭시 오브 가디언즈'라고 제목까지 틀려가면서 말이다. 이야기를 듣자니 몇 번이나 왔다 갔다 거리며 받은 그 전화는 딱히 중요하거나 공적인 용무도 아니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뒷자리의 다리 꼰 사람은 몇 분 간격으로 내 의자에 진동 효과를 가했다. 어쩌다 시간이 맞아 저녁에 영화를 본 나의 실수겠지. 그 사람 많은 시간에.


그 몇 시간조차도 가만히 앉아서 집중할 의지가 없는 사람들. 보고 듣는 것에 집중해야 하는 극장에서 '말'을 하는 사람들. (그 말, 영화가 끝나고 좀 나가서 하세요. 아무리 머릿속에 실시간으로 떠오르는 생각들이 반드시 누군가에게 끄집어내야 할 만큼 획기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여긴 두 다리 뻗고 보는 안방이 아니다.) 다소 심각한 '관크'의 예였지만 실제 경험이다. 이런 사람들 중에는 주의를 주면 '개선'이 되거나 해결이 되는 경우가 있고, 아무런 소득이 없는 경우도 있다. 어느 쪽이 더 많을지는 통계적인 걸 알 수 없으니 잘 모르겠다. 경험상으론 다행히 아직까진 전자가 좀 더 많다.


표현에만 주목하지 그 맥락을 굳이 따지려 하지 않는 사회이고, 무언가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 않는 사회다. 인터넷상에서 이른바 '논란'이 되는 것의 상당수는 앞뒤 맥락을 자르고 누군가의 특정한 말이나 단어만을 확대 해석한 경우다. 콘텐츠 소비의 양상 면에서도 나타나는 변화지만, 글을 읽는 대신 보는 유튜브 클립들 역시 수동적이고 단발적인 소비의 대상인 경우가, 깊이 있는 콘텐츠인 경우보다 많다. 단지 트렌드의 변화라면 차라리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자면 극장에서의 이것은 명백히 태도에 관한 문제다. 소비하는 거니까 가볍게 여겨도 괜찮다는 것.


나와 같은 공간에서 영화를 보는 사람들이 있다는 자각(이 자각이 없다는 것이 더 신기하지만, 어쨌든.), 그곳에서의 나의 행동이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생각, 그리고 그 영향이 부정적인 것일 수도 있다는 주의. 조금이나마 나을 수는 있지만 다양성 영화가 상영되는 극장이라고 해서 크게 다른 모습은 아니다. 단지 객석률의 차이 탓에 체감상 적어 보이는 것뿐이다. 이건, 예민한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둔감한 정도의 차이다. 순수히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마음의 둔감함.


개인의 태도 문제만이 아니라, 여유와 관용을 베풀기 어렵게 만드는 여러 사회 현상들도 요인이 될 수는 있다. 이를테면 너무 각박하고 살기 어려운 세상에서 굳이 콘텐츠를 소비하면서까지 여타의 주변적 요소들을 고려할 마음이 생기지는 않을 수 있겠다. 다른 걸 떠올려보자면 스마트폰이 나오기 전에는 그만큼 산만하게 휴대전화를 쓸데없이 들여다봐야 할 이유는 없었으니.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수 있지만, 영화 상영 중에 톡을 보거나 폰 바탕화면을 확인하거나 하는 게 중요한 용무에 들어갈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애초에 중요하거나 급한 용무가 있는 사람이, 혹은 누군가의 중요한 연락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 한가롭게 극장에 앉아 있지는 않으니까.) 그렇다면, 극장이 영화를 관객들이 온전히 관람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도록 유도해야 마땅하겠지만, 어렵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 것처럼 극장 관객의 절대적 다수는, 굳이 <어벤져스: 인피니티 워>처럼 관심이 집중되는 영화가 아니어도 주변에서 누군가 재미있다더라는 상업 영화를 가벼운 목적으로 소비하기 위해 극장을 찾는다. 그들 대부분의 영화 선택 기준(70% 이상)은 '남들이 재밌다고 하더라'는 영화이며, 감상과 평가의 기준 역시 '재미있다(10점) or 재미없다(1점)'인 게 사실이다. 그들에게 극장 에티켓을 바라는 건 어쩌면 과한 사치일 수 있다. 옆자리 관객에게 피해를 주지는 않겠지만 영화가 끝나고 나서 좌석 주변에 그대로 남아 있는 쓰레기를 보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요즘 극장에서는 제대로 된 에티켓 광고나 안내를 찾기 힘들다. 심지어 '휴대전화를 진동으로 해주세요'라는 문구도 볼 수 있었다. ('옆사람과의 대화는 작은 목소리로'라고 할 기세. 진동으로 하라고 문구를 만든 이가 생각이 짧았던 거다.) 다음 영화 상영을 위해 좌석 뒷정리가 필요한 탓에, 극장에서는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기 무섭게 (퇴장 유도를 위해) 내부 조명을 켠다. 최근 한 달 남짓의 기간 동안 열 번이 넘게 극장을 찾았는데, CGV 일반관의 경우 퇴장시 쓰레기를 가지고 나가라는 안내 외에는 그 어떤 주의사항도 볼 수 없었다. 아트하우스관에서 볼 수 있는 안내사항(휴대전화 끄기, 사진/영상 촬영 금지, 옆 사람과 대화 금지, 크레딧 끝나고 퇴장)을 일반관에서도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쉽지만 그럴 가능성은 매우 희박해 보인다. 아트하우스 관객은 극장의 메인 소비층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런 사람'들은 애초에 에티켓 광고에 관심이 없다.)


외국 극장과의 가격 수준의 차이를 떠나서, 나는 영화관 티켓 가격을 올리는 것 자체는 적어도 이 부분에서는 '영화 보는 행위'의 일종의 책임 수준을 높일 수 있는 방책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을 정도다. 반드시 '서비스나 시설이 유의미하게 개선되거나 달라져야만' 가격 인상의 이유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물가는 자연스러운 경제 현상이고 우리의 최저 임금도 늘 올라왔으니까. 극단적으로 말하자면, 극장에서의 기본적인 에티켓에 무심한 사람은 과연 티켓값이 오르는 것에 불평을 제기할 정당성이 있을까, 라고 질문을 던진다. 나는 없다고 생각한다. 오래전부터 '손님은 왕'이라는 말이 잘못된 방향으로 확대 해석 및 사용되어 왔다고 여기기도 하지만, '서비스'라는 단어를 언급하기에 앞서 자신이 과연 그 '서비스'를 타인과 어떻게 공용하는지부터 돌아봐야 할 것이다.


며칠 후 <그날, 바다>를 뒤늦게 관람했다. 영화가 시작되고 나서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50대 이상의 관객 십여 명이 줄지어 들어오더니 요란하게 각자의 자리를 잡았다. 물론 그분들은 '카톡'을 진동이 아니라 소리 알림으로 받으시고 종종 전화를 받으셨다. 신사적인 매너로 영화를 보시는 어르신들도 적지 않게 볼 수는 있다. 그러나 만약, 내가 누군가에게 영화를 보여줄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이라면, 극장을 자기 집 거실처럼 전용하는 사람에게는 절대 내 영화를 보여주고 싶지 않다. 좋은 손님이 될 자세가 결여된 사람에게는.


좋은 영화라면, 마땅히 좋은 매너를 갖춘 관객에게 가치 있게 향유되어야 하니까. 이 글에는 다소 여러 가지 이슈들이 몇 개의 문단에 집약적으로 담겨 있지만, 나는 이 '태도'에 관하여 여기에 적지 않은 것 외에 아주 많은 이야기를 더 할 수 있다. 누군가에겐 이게 '영화 조금 볼 줄 안다고 여기는 사람의 일반 대중 깔보기'에 그칠지 모르지만, 아닌 건 아닌 거다. 2억 달러짜리 블록버스터든 칸영화제 수상작이든 간에, 좋은 콘텐츠는 좋은 소비자가 만든다. 어쩌면, 맥락의 문제일지도 모르겠다. "내가 (소중한 시간을 내서 같은 상영관에 같은 영화를 보러 온 다른 사람들과 함께) 극장에서 영화를 즐기고 있다"라는 문장에서 괄호 친 부분 빼고 나머지만 중요하게 받아들이는 것. 실은 좀 안타깝다. 업으로 삼은 이상 나는 평생 극장과 떨어질 수 없는 삶을 살겠지만, 몇 년 동안 극장을 다니면서 관람 문화가 전에 비해 나아졌다고 여긴 적은 없다, 한 번도. 엄밀한 현실이다. 주저리주저리 글 끼적거릴 시간에 숨만 쉬고 돈 벌어서 내 집을 극장으로 만들어야지. 조조와 심야는 그래서 내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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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하나: '내 돈 내고 극장에 와서 내 맘대로 못하냐'고 누군가 말한다면, 그 사람에게 이렇게 답해주면 된다. 나도 당신의 듣기 싫은 목소리 듣고 꼴보기 싫은 행동 감내하러 귀한 돈과 시간 내고 극장 온 거 아니라고. 극장이 아니어도 어딜 가나 '내 돈 내고~'의 논리를 펴는 사람은 그 논리의 시작부터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자신이 정당한 대가를 내고 굉장히 존중받아야 하는 고귀한 손님이 되었다는 착각에 빠져 있을 뿐. 그 착각은 타인에 대한 존중의 결여에서 비롯한다.


*P.S. 둘: 극장에서 '관크'를 겪었는데 차마 말 못하고 그냥 지나친 경험이 있다면, 그것이 나의 괜한 예민함으로 비춰질까 염려한 적 있다면. 그건 당신이 예민한 게 아니라 조금의 지각도 없이 타인의 관람에 영향을 주는 그 사람들이 둔감한 거다. 예민함을 부끄러워 할 필요는 절대 없다. <동주>에서도 그런 대사가 있었다. 부끄러움을 모르는 게 진정 부끄러운 거라고. 그 예민함은, 존중받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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