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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동진 Sep 12. 2019

모든 것은 타인의 판단이 아닌 그 자체로서 빛난다

영화 <버드맨>(2014)에 대한 두 번의 글

(2015년 개봉 당시에 다른 블로그에 썼던 두 편의 글을 브런치에 옮겨두는 것이다.)



1.한 편의 원테이크가 된 인생


좋다. 씁쓸하다. 재미있다. (예고편에 나오는 노래까지도 좋다.) 흔한 표현이지만 <버드맨>은 가히 '마이클 키튼의 인생 영화'다. 한 편의 영화 속에 한 배우의 자전적인 것이나 다름 없는 이야기가 또 하나의 연극에 녹아든다. 실제 전체 원테이크는 아니지만 컷이 없는 것처럼 보이도록 촬영한 영상은 그야말로 황홀하다. 출입문을 열고 닫는 등의 행위가 일종의 장면 전환처럼 활용된다.


할리우드와 브로드웨이, 그리고 이를 바라보는 미디어와 소비하는 대중을 꼬집는 <버드맨>은 사실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만 주인공이 아니다. 무대에 서는 것을 통해 자신의 인생을 인정받고자 하는 이가 있고, 무대에 서기 위해서 인정받으려는 이가 있으며 무대에서만 자신의 존재 가치를 느끼는 이가 있다. 이런 군상들이 한 편의 연극으로 만난 이야기는 노골적인 농담과 '디스'를 통해 코미디가 되고, 뒤이어 퇴물 수퍼히어로의 지나간 영광까지 흔든다.


리건의 분장실에는 이런 노트가 있다. "A thing is a thing, not what is said of that thing." 존재는 다른 누군가가 정의하는 것이 아니라 곧 스스로 정립하는 것이다. 마이크 샤이너(에드워드 노튼)의 입을 통해 전달되는 "Popularity is the slutty little cousin of prestige."라는 말도 그 노트와 밀접하다. 박자를 신경쓰지 않는 듯한 드럼 소리가 시종 이어지며 마치 영화 속 이야기 자체를 하나의 무대처럼 느끼게 하지만, 오히려 드럼 소리는 자신의 존재를 다른 데서 찾으려는 이들을 조롱한다. 다른 누가 뭐래도 '나'의 가치는 변하지 않는다. 현실과 무대가 별개로 나뉜 것이 아니라 인생 전체가 나의 무대임을 인식할 때, 그리고 내가 '무대'에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않을 때(Ignorance), 당신의 삶은 비상하여 더 높이 활공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상품이기 이전에 예술이 될 거다.


김치 발언은 신경증적인 인물의 성격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는 말에 지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김치'나 '짱깨'나...)(마이클 키튼 뿐 아니라 에드워드 노튼과 엠마 스톤의 배역 모두 정상적이라 할 수 없는 인물들이다.) 단순히 형식과 테크닉만 빛나는 것이 아니라 배우들이 영화의 가치를 높이는 <버드맨>의, 마이클 키튼을 놓쳤다간 후회할 것이다. <버드맨>은 곧 마이클 키튼의 살아 숨쉬는 얼굴 그 자체다. (2015.03.05.)



2.존재를 깨닫기 위한 평생의 시간


영화 전체에 대한 첫 느낌은 1차 관람기에서 적었으니 이번엔 다른 이야기다. 신연식 감독의 <조류인간>(The Aviankind, 2014)이 현재의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고 싶어하는 이들의 비극을 그렸다면 <버드맨>은 자신을 찾을 수 없어서 힘들어 했던 또 다른 자신의 비극이다.


주류 대중 문화산업의 전반(매스미디어와 대중 모두)을 조롱하면서도 <버드맨>은 그 존재의 필요성을 아예 부정하지도 않는다. 관심을 먹고 사는 대중문화의 뿌리를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말 많고 우울한 철학 따위에는 관심 없다"며 관객을 직접 겨냥하기까지 한다. 그래서 시종 어디로 튈지 모를 불안정함을 품고 있으면서도, 한편으로는 모든 것이 치밀하게 무대 안에서 설계돼 있다.


리건이, 레이먼드 카버가 고교 연극 시절 냅킨에다 써 준 자신의 연기력을 향한 칭찬이 취중 헛소리 격이었음을 몰랐다고 볼 수는 없다. 카버는 이 세상에 없지만 그의 작품을 자신의 브로드웨이 진출 첫 무대로 삼음으로써 이제라도 ('인기의 헤픈 사촌'인) 연기력으로 인정받고 싶었을 것이다. 연극에서 자신이 맡은 배역인 에디와 닉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인정받지 못한 인물이라는 건 그래서 슬프다. 이미 자살 시도를 한 적이 있는 리건은 샘에게 이야기한다. 이 무대가 마치 자신이 살아온 기형적인 삶의 축소판 같다고.


그런 점에서 등장인물의 대부분이 정신적으로 온전하지 못하다는 점은 눈여겨 봐야 한다. 주변에서 쉽게 찾아보기 힘든 비범한 인물의 이야기가 때로는 오히려 그것의 현실성을 강화한다. 현실을 살아가는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에 취해 있다. 일이든, 이상이든, 혹은 자아에게든 타자에게든 말이다.


취한 나머지 사랑과 존경을 혼동하며 무지와 불확실의 미덕을 알지 못한다. 자신을 둘러싼 모든 것, 그러니까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될 것들, 을 구태여 자신의 시야와 영향력 아래에 확실히 담으려 한다. 아무리 공들여 그림을 그려도 한 손에 쥐고 구겨버리면 쉽게 으스러진다. 불확실할 수밖에 없는 생이란 것은 이다지도 부서지기 쉽고 연약하다. 그러나 삶은 불확실하고 내 뜻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그것이 살아있음을 증명한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3장 '이면의 의미'는 다음과 같은 첫 문장으로 시작한다. "확실성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구애라는 땅에 들어가 얼쩡거리지 말아야 한다." (2015.03.09.)



<버드맨>(Birdman: Or The Unexpected Virtue of Ignorance, 2014), 알레한드로 곤잘레스 이냐리투 감독

2015년 3월 5일 (국내) 개봉, 119분, 청소년 관람불가.


출연: 마이클 키튼, 에드워드 노튼, 나오미 왓츠, 엠마 스톤, 자흐 갈리피아나키스, 안드레아 라이즈보로 등.


수입/배급: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A thing is a thing, not what is said of that thing."

-리건 톰슨의 분장실 거울에 적혀 있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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