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를 이해하는 방식

by 제트오

세상을 구성하는 수많은 요소와 그 요소들이 주는 영향에 대한 논의, 그리고 거기에 던져지는 수많은 거대한 질문들에 대한 대답은 사실 꽤나 축적되어 있다. 당신이 품는 철학적 질문들 또한 정답은 아닐지라도 그에 대한 논의는 충분히 존재하고, 그 가운데 어떤 사람은 자신의 사유를 문장으로 정교하게 다듬어 우리에게 건네놓았다. ‘삶이란 무엇인가’라는 수천 년 된 질문이 아직도 완결된 결론을 갖지 못하는 이유는, 어쩌면 그 질문이 애초부터 정답을 목표로 설계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떤 질문은 답을 얻기 위해서가 아니라, 질문하는 순간 우리의 시선과 태도를 바꾸고, 다음 질문을 생산해내기 위해 존재한다. 질문은 결론이면서 동시에 씨앗이다.


요즘은 질문이 답에 가리기조차 한다. 질문을 끝까지 생각하기도 전에, 그럴듯한 답이 정리된 문장과 완성된 형식으로 먼저 도착한다. 그래서 생기는 혼란은 답이 없다가 아니다. 답이 너무 빨리 와서, 내가 애초에 무엇을 궁금해했는지, 무엇을 확인하려 했는지 질문 자체가 흐려지는 혼란이다.


그러한 질문들을 다루는 방식은 대체로 연역과 귀납 사이를 오간다. 어떤 이는 공리처럼 믿는 전제로부터 논리를 밀어붙이고, 어떤 이는 세계의 파편들을 주워 담아 일반화를 시도한다. 그리고 미래라는 주제에 가까이 갈수록 우리는 종종 또 다른 추론에 기대게 된다. 지금 눈앞에 놓인 불완전한 단서들 사이에서 가장 그럴듯한 설명을 임시로 세우고, 그 설명이 무너지지 않는 범위를 확인해가며 사고를 조정하는 방식인 가설적 추론의 방식이다. 미래는 대개 이런 형태로만 손에 잡힌다. 아직 오지 않은 것에 대해 우리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확신이 얼마나 쉽게 무너지는지 깨닫는거 뿐이다.


이때부터 미래는 단지 미지가 아니라 경쟁이 된다. 가능한 설명이 여러 개라는 점은 원래도 그랬지만, 이제는 그 설명들이 서로를 밀어내는 속도가 달라졌다. 가장 그럴듯한 이야기는 언제나 먼저 도착하고, 먼저 도착한 이야기는 종종 사실처럼 자리 잡는다. 그러니 미래를 사유한다는 건, 가능성의 공간을 분할하는 일인 동시에, 그 공간을 점령하려는 설명들 사이에서 무엇이 근거이고 무엇이 수사인지 가려내는 일이다.


자연과학은 실험이라는 장치를 통해 질문에 대한 답의 범위를 좁혀갈 수 있다. 조건을 통제하고, 동일한 상황을 반복하며, 오차를 줄이면서 이 경우에는 아니다를 쌓아 올린다. 물론 자연과학도 불확실성을 완전히 제거하지는 못하지만, 적어도 불확실성을 다루는 도구가 비교적 단단하다.


사회과학은 다르다. 사회과학에도 실험은 존재하지만, 그 실험은 대체로 세계를 실험실로 바꾸지 못한다. 인간은 변수이면서 동시에 해석자이고, 제도는 배경이면서 동시에 행위자이며, 사건은 데이터이면서 동시에 의미이다. 무엇보다 사회는 윤리와 권력의 그물 속에 있어 통제라는 말이 종종 폭력적인 상상으로 변질된다. 그래서 사회과학의 많은 작업은 자연과학처럼 세계를 축소해 재현하기보다, 세계의 복잡함을 인정한 상태에서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 어디부터는 말하면 안 되는지 발화의 경계선을 그리는 일에 가깝다.


게다가 사회적 현실은 관찰되는 것이면서 동시에 생산되는 것이기도 하다. 통계와 담론은 단순히 현실을 설명하는 데서 멈추지 않고, 현실을 설계하는 재료가 된다. 어떤 분류는 사람을 그 분류에 맞추어 행동하게 만들고, 어떤 지표는 국가를 그 지표에 맞추어 정책을 움직이게 한다. 그래서 사회과학은 점점 더 무엇이 사실인가뿐 아니라 무엇이 사실처럼 유통되는가를 함께 다루게 된다. 그리고 이때 실험실이 아닌 세계에서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 것은, 반복이 아니라 검증의 규칙이다.


그런 점에서 "세상이 어떻게 변할까"라는 질문은, 어쩌면 답을 찾기 위해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미래에 관한 질문은 종종 예측의 형태를 빌리지만, 그 깊은 층위에서는 그 미래를 어떻게 준비할지의 문제가 얽혀있다. 내일의 세계를 맞히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내일의 세계가 여러 갈래일 때 내가 무엇을 잃을 수 있고 무엇은 잃을 수 없는지, 어떤 변화는 받아들일 수 있고 어떤 변화는 받아들일 수 없는지 즉, 나의 기준과 사회의 기준을 드러내는 일이다.


그리고 그 질문에 대한 탄탄한 논증을 통해 답을 찾는 것은, 마치 안개 낀 바다에서 등대를 세우는 일과 같다. 등대는 바다를 없애지 못하고, 안개를 걷어내지도 못한다. 다만 어떤 방향이 암초이고 어떤 방향이 항로인지, 최소한의 구분을 가능하게 해준다. 빛은 더 강해졌지만, 그 빛이 비추는 것이 항로인지 신기루인지 판별하는 일은 오히려 더 어려워졌다. 사회과학의 논증이 제공하는 것도 대개 이런 종류의 빛이다. 정답이라는 태양이 아니라, 항해를 가능하게 하는 작은 광원 정도이다.


미래를 생각하는 방식도 그러하다. 미래를 논한다는 건 그저 점괘를 뽑는 일이 아니라, 지도 위에 아직 없는 길을 그려보는 일이다. 그 지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지도가 부정확하다고 해서 지도를 그리는 것을 포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지도를 임시로 믿는 법을 배운다. 검증 가능한 부분은 계속 고치고, 검증 불가능한 부분은 가정으로 남겨두며, 무엇보다 이 지도가 실패할 때 어떤 위험이 발생하는가를 함께 적어두는 방식으로. 지도는 그려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갱신된다. 그래서 우리는 최신성보다 신뢰성을 확인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질문을 던지는 기술이다. 좋은 질문은 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좋은 질문은 답이 나올 수 있는 조건을 정리한다. 그리고 그 조건을 정리하는 순간, 우리는 이미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미래에 대한 질문도 마찬가지다. 무엇이 일어날까만 묻는 대신, 어떤 조건에서 무엇이 일어날까, 조건은 누가 만들고 누가 막을까, 그 변화가 일어날 때 누가 이득을 보고 누가 비용을 치를까라고 묻는다면 미래는 막연한 시간대가 아니라 분석 가능한 구조로 바뀐다.


이런 시대에 더 나은 질문은 단순히 더 똑똑한 질문이 아니다. 더 나은 질문은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질문이다. 빠른 답을 얻는 대신, 그 답이 불러올 결과의 윤곽까지 묻는 질문이다. 가능한가에 머물지 않고 누가 그 비용을 치르는가를 포함하는 질문, 효율적인가를 넘어서 정당한가를 함께 묻는 질문. 어떤 답이든 즉시 꺼내 보일 수 있는 듯한 환경일수록,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답의 속도가 아니라 질문의 농도이다.


미래를 사유한다는 것은 결국, 아직 도착하지 않은 결과를 맞히는 능력이 아니라 가능성의 공간에서 나의 논리를 세우는 일이다. 그리고 그 논리는 언제나 가치와 연결된다. 무엇을 위험으로 보고 무엇을 기회로 보는지, 어떤 불확실성을 감내할지, 어떤 불확실성은 제도적으로 차단할지. 그러니 미래에 관한 질문은 사실 미래에 관한 질문이기 전에 현재의 우리에 관한 질문이다.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무엇을 희망하는지, 무엇을 정상으로 간주하는지, 무엇을 비정상으로 규정하는지 그 모든 것이 미래 질문 속에 숨어 있다.


철학적 질문이 답을 찾지 못한다고 해서 실패한 것이 아니듯, 사회과학의 미래 질문도 예측에 실패한다고 해서 무의미한 것이 아니다. 질문의 성과는 때로 답이 아니라, 답을 둘러싼 토대의 재정렬에서 발생한다. 기존에 당연하다고 믿었던 전제를 흔들고, 미처 보지 못한 변수를 드러내고, 누락된 행위자를 재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더 나은 답에 가까워지는 것이 아니라, 더 나은 질문을 생산할 능력에 가까워질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게 우리가 미래를 이야기하는 가장 현실적인 방식일지 모른다. 안개 속에서 정답을 찾는 대신, 등대를 세우고, 지도를 고치고, 질문을 더 정확하게 다듬는 것. 미래는 맞히는 대상이 아니라, 준비하는 대상이다. 질문은 결론이 아니라, 출발점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아마도 이것이다, 답을 소유하려는 욕망을 조금 내려놓고, 질문을 정교하게 관리하는 일. 그 질문들이 결국 우리를 어디로 데려갈지는 알 수 없지만 당신의 세계를 확장시켜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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