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acemaker, 1976
레이스 짜는 여인(1976)
그녀의 눈에 띄지 않고 그는 지나쳐 갔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내색하지 않는 영혼의 소유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인내를 가지고 질문을 할 필요가 있는,
또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 당신이 알아야 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어느 화가가 그녀를 대상으로 예술 작품을 그렸을 것이다.
그 속에서 그녀는 세탁하는 사람이나 물동이를 나르는...
아니면 레이스를 짜는 여인이 되었을 것이다.
- 영화의 엔딩 크레딧
파리에서 미용사로 일하는 베아트리스는 18세로, 엄마와 둘이 사는 소녀다. 사람들과 마구 어울리는 법도 없고, 자신에 대해 수다스럽지도 않으며, 미용일을 잘 배워야겠다는 소박한 꿈을 가진 욕심밖에 없다. 그녀는 평소 친하던 언니가 맞이한 싸구려 이별의 슬픔을 달래주기 위해, 생전 처음으로 바닷가로 함께 여행을 떠난다. 언니는 늘 클럽을 쏘다니며 연인을 만들기 원했고, 베아트리스는 언니를 따라다니며 그런 언니의 뒤치닥거리를 해준다. 그 언니가 결국 어떤 가벼운 인연을 만나 떠나자, 혼자 남겨진 베아트리스는 홀로 그 바닷가에서 남은 연휴를 보내게 되고, 그곳에서 여름을 지낸다는 프랑소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는 파리에서 문학을 공부하는 남자로, 베아트리스의 덤덤한 지적 매력에, 모파상을 좋아하는 그녀의 취향에 용기를 입어 미용사와 대학생이라는 '신분의 차이'를 극복하고 사랑에 뛰어들었지 싶다. 그러나 프랑소와는 베아트리스라는 소박한 소녀의 영혼에 대한 관심보다, 남자를 경험하지 못한 여자에 대한 성취욕과 호기심이 더 컸던 모양이다. "오늘 밤을 너와 함께 하고 싶다"는 것이 그의 고백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이성의 각종 유혹에 모르쇠로 일관했던 베아트리스도 자신이 매력을 느끼는 프랑소와의 이런 고백을 거칠게 받아들이기보다는,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응답이라도 되는 양 그를 받아들인다.
두 사람의 관계 발전이 조금 급작스럽기는 했지만, 곧 둘은 부모님의 허락하에 함께 살게 된다. 성실한 베아트리스는 아침 일찍 미용실로 출근을 하고, 저녁이면 시장을 보고 돌아와 프랑소와에게 맛있는 저녁을 해준다. 그가 조용히 공부하고 있을 땐 차를 건네주기도 하고, 그의 옷을 정성스럽게 다림질 한다. 이것이 평소 말수가 적은 베아트리스의 사랑의 표현이 아니었을까. 그러나 프랑소와는 점점 베아트리스의 삶을 지루하고 한심하다고 정죄하게 된다.'언제까지 한달에 1000프랑을 벌기 위해 미용사를 할 것이냐' '어떤 공부를 해보고 싶느냐, 너도 너의 인생을 발전시켜야지' 등등의 말을 뱉으며 지금 이대로의 삶이 만족스러운 베아트리스를 답답해한다. 그렇지만 베아트리스는 언제나 그렇듯, 덤덤하게 당신 말이 맞다고 하며, 자신의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결정적인 것은 바로 프랑소와의 동기들이 집을 찾아왔을 때다. 프랑스 대학생들이니 어련히 토론이 복잡하고 깊었을까? 변증법이니, 유물론이니, 도시의 인생은 상자 속에 갇힌 인생이고 가장 명쾌한 문제해결은 바로 상자 그 자체라는 뚱딴지같은 현학적인 말들을 주고받으며 나름 심오한 학자가 된듯 심취한 대학생들의 모습에 베아트리스는 점점 소외감을 느낀다. 토론 끝에 프랑소와와 친구들이 나름 지적인 농담을 주고받으며 웃을 때, 그것을 따라 웃는 베아트리스의 웃음이 애처롭다. 아마도 이 웃음이 영화 내내 베아트리스가 보여준 가장 큰 웃음이 아니었을까.
프랑소와는 결국 이별을 선언한다. 자기가 먼저 시작한 관계이긴 하지만, 일이 이렇게 되었으니 너도 받아들이라는 식의 일방적인 통보. 그는 이 연애를 통해 베아트리스가 변화를 꿈꾸고 자신과 닮아가길 바랬지만, 여전히 삶의 현장에서 묵묵히 일하는 그녀를 감당할 용기도 자신도 없어졌기 때문이었다. 이별을 처음 경험하는, 원래 말이 없고 자신의 감정을 표현할 줄 모르는 베아트리스는 아무런 항의도, 원망도 없이 조용히 그의 의견을 수용한다. 그리고 다시 짐을 싸서 집으로 돌아온다.
그러나 베아트리스는 이 이별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그 방법조차 알지 못한다. 그녀는 마치 김승옥의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의 누이처럼, 말을 잃어버렸다. 수척해지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파리 시내를 걸어다닌다. 누가 그런 그녀에게 관심이나 있을까. 고작 그림 속에서도 레이스를 짜는 여인이라는 아리송한 대명사로 표현될 개성밖에 지니지 못한 그녀에게 누가 이름을 불러줄 수 있을까 말이다. 그런 베아트리스는 곧 건강이 쇠약해지고, 우울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 요양병원에 오래 입원하게 된다. 이 이별을 두고 프랑소와의 친구들은 프랑소와를 비난했다. 당시 프랑스에서 벌어지는 사회적 문제에도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자신의 전공만 공부하는 프랑소와의 모습이 마치 베아트리스와의 관계에서도 고스란이 베어졌다고 친구들은 생각했기 때문이리라. 너의 그 코트와 목도리 속의 좁은 세계에 스스로를 가두고 있는 꼴이라고 친구들은 베아트리스와의 이별에 대해 말하지만, 프랑소와는 오히려 화를 내며 자신의 선택과 자신의 삶을 정당화한다.
베아트리스의 어머니는 오랜 고민 끝에 프랑소와에게 연락을 취한다. 프랑소와는 요양병원에 혼자 병문안을 갈 용기조차 없어 친구들에게 그 앞까지만 함께 가달라고 부탁한다. 겉으로는 문학과 철학과 각종 두터운 책들로 가장 강력한 철갑을 둘렀을지라도 속은 지독히 유약한 청년이었을 뿐인 프랑소와를 어찌 베아트리스는 '너를 믿는다'고 말함으로써 넘치는 훈장을 주었던 것일까. 병문안을 간 프랑소와는 아픈 이별을 통해서도 조금도 성장하지 못한 것 같다. 수척해진 그녀에게 고작 묻는다는 것이 자신과 헤어진 후에 다른 남자친구를 사귀었냐는 것이라는 것을 볼 때, 그녀가 어떤 사람이고 그녀를 어떻게 대해야할지 알지도 못한 채, 심지어 그것에 관심조차 없는 채, 그녀를 사랑하려고, 아니 누리려고 했던 것이다. 그러나 프랑소와라는 아주 좁고 유약하고 이기적인 세계가, 한 여인을 사랑할 때 감당해야할 큰 폭의 아픔과 진통을 직면할 때 그 앞에서 얼마나 무너지는가도 영화는 놓치지 않는다. 그녀와 짧은 작별 후 자신의 차에 돌아와 그는 와락 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다시 베아트리스는 자신의 자리로 돌아온다. 그를 면회하느라 멈추었던 뜨개질을, 다시 레이스실과 바늘을 들고 짜기 시작한다. 그리고 베아트리스는 조용히 카메라를 응시한다. 그녀의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시선, 수많은 레이스를 짜는 평범한 소녀들의 이야기는 이랬던 것일까. 자신의 영혼에는 아랑곳하지 않으며 오직 순간적인 끌림과 치기어린 열정을 고백으로 받아들인 수많은 소녀들의 이야기가, 바로 레이스 짜는 여인에 그려져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