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rasite, 2019
대저택과 반지하. 이 두 층위만을 생각하고 영화관에 찾았다가 또 다른 층위, 반지하보다 더 깊은 지하 생활자의 존재가 밝혀지는 장면이 이 영화의 가장 소름 끼치는 대목이 아닐까 한다. 이 영화의 어느 부분을 더욱 증폭 혹은 축소시키느냐에 따라 영화에 대한 해석은 달라지겠지만 기생충은 우리의 편견과 고정관념을 하나씩 비틀며 각자의 해석으로 안내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1. 부자는 나쁘고, 가난한 사람은 착한가?
봉준호 감독은 영화 <마더>에서 모성을 절대 선이라고 생각했던 사람들의 고정관념을 비틀었듯, "부자는 나쁘고, 가난한 사람은 착하다"라는 우리들의 편견을 비튼다.
찢어지게 가난한 기택네 가족에게 호의를 베푸는 건 잘 사는 사람들이었다. 기우의 친구는 기우네 집 앞에 노상방뇨를 하는 술주정뱅이를 내쫓아주는 것도 모자라 고수익 과외자리를 넘겨주었고, 그의 할아버지는 비싼 수석을 이유 없이 기우에게 선물해준다. 그들의 말대로 심플하기는 해도 박사장과 연교는 케빈과 제시카, 기택과 충숙에게 별다른 의심 없이 일자리를 내주어 그들의 노동에 비해 높은 임금을 주고 자기들끼리 있을 때만 기택에게서 냄새가 난다는 말을 했을 뿐 대체로 그들을 믿는다. 다혜도 다송이도 아무런 의심과 계산 없이 과외선생님을 따른다.
그러나 기택네는 어떠한가? 기우는 피자집 사장에게 아르바이트 생을 자르고 자신을 채용하라고 한다. 그리고 친구의 믿음을 저버리고 다혜와 썸을 타고, 다혜와 결혼하게 되면 저택을 차지할 수 있을 거라는 계산적인 상상을 하며 즐거워한다. 기정이는 멀쩡한 운전기사가 해고되도록 함정을 파 아버지를 기사로 채용되도록 하고, 기택은 입주 도우미를 결핵환자로 모함해 쫓겨나게 하고 그 자리에 자신의 아내 충숙을 들인다. 박사장네 거실에서 술파티를 하면서 가끔 쫓겨난 사람들에 대한 걱정을 하지만 기우는 잘린 운전기사 허우대가 멀쩡하니 어디선가 잘 살 거라고 넘겨버리고, 기정은 자기들을 더 신경 쓰라며 소리를 지른다. 그때 쫓겨난 입주 도우미가 벨을 누른다. 아마도 사채업자가 그랬을 거라고 추측하지만 누군가에게 얻어터진 채로 말이다. 쫓겨난 사람들은 잘 살고 있지 못했다.
그리고 관객들은 깊은 곳에 숨어 사는 지하 생활자를 만나게 된다. 같은 불우이웃끼리 잘 살아보자는, 그러니까 함께 공생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자는 입주 도우미의 애원에도 불구하고 충숙은 자비를 베풀지 않는다. 그들을 누르고, 묶고, 발로 차 버린다. 기택네는 자기들이 누린 약간의 다행을 같은 혹은 더 절박한 사람들과 나누길 거부한다.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잖아요." 기택네는 박사장에게 이 말을 하고 싶었겠지만, 정작 자신들이 이 말을 들었을 때는 외면해버리고 말았다. 영화의 마지막 부분의 참극은, 바로 기생하는 행복(그것을 행복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을 나누지 못한 기택네의 이기심에서 비롯되었다. 공감하고 연대해야 할 사람들이 난투를 벌여 될 수 있는 최선의 모습이란 혼자서 완전히 차지하는 것, 결국은 지하에 스스로를 가둔 채 진정한 기생충이 되는 것이었다.
#2. 계획은 힘이 없고, 선(線)은 힘이 세다.
그리고 봉준호 감독은 계획을 절대적으로 옳다고 믿는 우리의 인식을 비튼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계획을 세우는 행위를 선하다고 생각한다. 계획의 내용보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행위 자체에 스스로 안심한다. 계획이 장래에 실제 이루어질 것인가에 대한 관심보다는 계획을 세웠다는 행위 자체가 주는 안도감 때문이라도 우리는 숱하게 계획을 세운다. 계획이 없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 현재의 결핍을 채우기 위해, 결핍 투성이인 여기를 벗어나기 위해. 그러나 우리는 안다. 인생이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아무리 철저하게 계획을 세우더라도 우연한 계기, 사소한 생각, 시기와 질투, 열등감과 복수심 등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상황을 지배하게 된다는 것을 말이다.
기택도 일찍이 이것을 깨달았다. 그는 자녀들에게 계획이 뭐냐고 묻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현재 계획이 없고, 앞으로도 계획을 세울 생각도 없으므로. 과거에는 꽤 계획을 세우며 살아갔던 모양이지만 여러 실패를 겪으며 그는 계획을 세우는 순간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무기력한 깨달음의 지배를 받으며 살아가게 된다. 기택네에 남은 것이란 곧 고작 곧 탄로 나 버릴 수도 있는 근시안적인 잔꾀들뿐이다. 영화는 지긋지긋한 가난을 벗어나기 위한 유일한 수단일 수도 있는 계획이 얼마나 힘없이 무너지는지 보여준다.
반면 영화는 존재와 존재 사이의 선이 얼마나 견고한지를 보여준다. 박사장은 많이 먹기는 하더라도 먹는 만큼 일하고 선을 잘 지키는 입주 도우미를 곁에 두려 한다. 그러나 기택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박사장에게 아내를 사랑하시느냐는 선을 넘는 질문을 해올 때마다 불쾌감을 나타내며, 자신과 기택의 관계는 오직 고용한 사람과 고용된 사람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님을 강조하며 선을 그어버린다.
이 선은 개인마다 혹은 집단마다 그 높이가 다를 수 있다. 그러나 이 선을 넘는 행위의 대가는 꽤 잔인하다. 가든파티의 참극 속에서 자신을 향해 “리스펙”을 외치며 죽어가는 남자에 대한 일말의 연민보다는 그의 몸뚱이를 밀어 차키를 꺼내는 것이 당연한, 그러면서 그의 악취에 본능적으로 코를 막게 하는 박사장의 태도는 기택의 선을 넘게 되고, 기택은 무엇에 홀린 듯 박사장을 칼로 찌른다.
영화가 보여준 세상 즉, 현실에서는 계획은 힘이 없고, 선은 힘이 세다. 계획은 무력하고, 선은 견고하다. 이것은 가치판단이 아니라, 현상에 대한 기술(記述)이다. 세상이 그렇게 돌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의 수사를 피해 본능적으로 저택의 지하로 숨어버린 기택에게 기우는 앞으로 돈을 많이 벌겠다는 계획을 밝힌다. 그 돈으로 기택이 숨어든 저택을 사게 되는 날, 아버지는 그저 계단을 올라오시기만 하면 된다고. 그러나 그 계획은 전혀 희망적이지 않다. 아마도 기우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며, 기택도 영원히 그 계단을 오를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여전히 서로의 선을 함부로 넘나들며 또 다른 참극을 빚어내며 살아갈 것이다.
#3. 서로 기생하는 것이 아니라 공생할 수 있다면
영화 기생충은 공생이 사라진 시대에 기생하는 법을 터득한 기택, 기우, 기정 그리고 충숙이 살아가는(生) 방식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들이 살아가야만(生) 하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왠지 모를 씁쓸함은 어설픈 계획을 가슴에 품은 채 매일 지하철을 오르내리는 나에게서도 기택의 슴슴한 냄새가 풍기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 땅은 천국이 아니다. 그렇다고 지옥이라고 하기엔 인정하고 싶지 않다. 영화는 비극으로 끝났지만, 영화는 비극을 말하고 있지 않다. 영화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행복은 나눌수록 커지잖아요"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