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내가 생각했던 평범한 20대의 인생 로드맵은 이렇다. 고등학생 때까지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그 노력의 입시결과를 받아 들고 원하는 대학과 전공을 선택해 학부 졸업장을 따고 그 학부 졸업장을 가지고 산업, 직무, 연봉, 워라밸 등 개인의 기준에 맞는 기업에 입사하는 것이다.물론 배움의 과정을 학부에서 끝내지 않고 석사 또는 박사까지 학술학위를 받을 수도 있고, 전문직이나 행시와 같은 시험을 준비할 수도 있고, 스타트업을 창업하는 등 꼭 기업의 신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것만이 길은 아니다. 그냥 내가 생각하는 평범한 길은 그랬다.
대학교 학부생 시절 회계사라는 직업이 눈에 들어왔다. 그런데 학부생 시절엔 도전하지 못했다. 하루종일 공부를 하는 행위에 조금 지쳐 있기도 했고 최소 2년 반이라는 시간을 책상에 앉아 꾸준히 반복해야 하는 것에 두려움이 컸다. 그렇게 나는 꿈을 외면했다. 당시에는 핑곗거리도 있었다. 스무 살에 바로 회사에 들어가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고, 2년제 전문대를 나와 이십 대 초반에 경제활동을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나는 군대를 다녀와 학부만 졸업해도 20대 중반이 될 것 같았다. 경제활동을 하고 사회에 기여하는 그들이 부러웠다. 그렇게 나는 흔하다면 흔한 휴학 한번 하지 않고 대학교를 스트레이트로 졸업했고 졸업과 동시에 스타트업에 입사했다. (내가 가진 능력으로 세상의 가치를 높이고 싶다는 큰 포부를 가졌었다.)
회사얘기는 시작하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다. 이 글의 목적은 회사썰을 푸는 것이 아니니까 간단히 20대의 회사 커리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대학교를 갓 졸업하고 스타트업의 인턴을 거쳐 팀장 아닌 팀장을 달고 거기서 운영/기획, 마케팅 등 업무분장이 제대로 되지 않은 많은 일을 쳐내듯이 시간을 보냈다. 9-12의 근무시간이 육체적으로 힘들었지만 버텨냈다. 그러던 어느 날 번아웃이 오고 정신적으로 무너지면서 퇴사를 했다.
이후 회복기를 가지고 여러 개의 계열사가 있는 그룹사의 공채로 입사했다. 7주간의 인턴기간 그리고 PT면접과 최종 임원면접을 통과하니 정식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그렇게그룹의 신입사원이모두 모여2주 동안OJT만 받았다.내가 일을 하지 않고 교육만 받는데 월급을 주는 환경이 익숙지 않으면서도 좋았다. 하지만 뭔가 희열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큰 자극과 고통에 중독이 된 것인지 이때 인생에 실수를 한 가지 하고 마는데 이전에 있던 스타트업에서 부대표로 와달라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렇게 나는 20대에 스타트업-그룹사-스타트업이라는 특이한 커리어로 인생 경험을 했고 20대의 마지막을 부여잡고 회계사 친구의 격려 속에 늦깎이 CPA생이 되었다. 여기에도 여러 사연이 있지만 결론은 잘 안 됐다. (30대인 지금은 또 전혀 다른 일을 하고 있다.)
20대에 스타트업 생태계, 그룹사 생태계, 전문직 공부 등을 경험하면서 느낀 것이 많다. 먼저 전문직 공부에 관심이 있다면 하루빨리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점은 메타인지가 좋지 못한 사람은 고시낭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루빨리 시작하되 아니라고 생각된다면 하루빨리 박차고 나올 용기도 필요하다. Sunk cost(매몰비용)는 젊을수록 적게 느껴진다. 하루빨리 결단하고 판단하자.
두 번째는 스타트업과 대기업 생태계이다. 어떤 사회초년생은 대기업에 신입사원으로 입사를 하고 몇 년이 지나면 주임 또는 대리를 달고 그에 걸맞은 수준의 책임감을 짊어진다. 또 어떤 사회초년생은 스타트업에 신입으로 입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방 팀장이라는 책임감을 짊어진다. 난 이 지점에서 물음표가 띠용하고 떠오른다. 스타트업에 신입으로 입사하는 사회초년생이 대기업 신입보다 결코 업무적으로 준비가 많이 되어있다고 할 수 없다. 오히려 엉덩이를 붙이고 있던 시간만 놓고 보면 대기업에 지원하는 신입사원이 기업이 원하는 경쟁력을 더 많이 가졌을 것이다. (누가 더 잘 낫다는 의미가 아니라 조직 구조의 측면에서 말하는 것이다.)
대기업도 신입보다는 경력을 뽑는 추세가 커지긴 했지만 어쨌든 신입을 뽑겠다는 의사결정을 하고 나면 신입사원을 키워서 쓰려는 의지가 있다. 전담 사수(멘토)를 붙여주고 때때로 수많은 OJT 기회를 제공한다. 스타트업의 상황은 다르다. 입사를 했는데 인수인계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상황도 허다하고 가르쳐줄 사수도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런 상황에서 교육의 기회도 없이 길도 모른 체 닥치는 일을 처리하다 보면 대표는 팀장이라는 무거운 휘장을 그들에게 달아준다. 무게감이 크다. 대기업에서 교육과 성장의 기회가 많다면 안타깝게도 스타트업에서는 짊어져야 할 책임감만 있는 경우가 많다. (일부러 그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대부분은 여건이 안 되는 것일 테다.)
어렸을 땐 대체가 쉬운 부속품이 되고 싶지 않아 대기업을 쳐다보지 않았는데 사회생활을 해보니 대기업보다 사람을 더 부속품 같이 여기는 곳이 작은 기업이더라. 그러니 선택의 기로에 놓인 분들이 이 글을 읽는다면 지금 당장에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20대에는 아직 미숙한 부분이 많으니 배움의 기회가 열려있는 곳을 선택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이와 별개로 양질의 일자리가 많이 없는 것은 슬픈 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