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팬이 사망했다
오래된 책 특유의 끕끕함을 좋아한다.
파리 유학생활 마지막 집을 정리할 때 오래된 책이 꽤 나왔다. 책은 부피가 크지만 수납이 좋아서, 그 작은 아파트에도 한가득 내 취향으로 채울 수 있었다. 짐을 빼기 시작하자 그게 비로소 보였다. 한 권 한 권이 박물관 같았다. 펼치면 엄청난 공간들이 새로 돋아나서 어느새 내 아파트는 파리시 전부가 됐다. 파리를 영원히 소유할 수 있을 엄청난 기회였지만, 그 전부 가져올 수는 없었다.
나는 정리해야 했다.
책의 경우에는 아파트 복도에 상자를 내려놓고 "(필요한 사람은) 가져가세요"라고 적는다. 대게는 일주일이 되지 않아 상자가 말끔하게 비워지고, 비워진 상자를 확인하고 재활용 통에 넣으면 정리가 끝난다.
내 세상은 그렇게 비워졌다.
지금 내 책장에 고서는 몇 권 없다.
몇 없는 책을 휘적거리던 휴일 오후, 갑자기 쥘 베른이 처음 발간한 책이 궁금해졌다. 21세기 방구석에는 어디로든 갈 수 있는 인터넷이라는 게 설치되어 있으니, 책을 찾아 인터넷 옥션의 세계로 떠난다.
파란색 양장본 표지가 쥘 베른의 첫 책이라는 정보를 읽었다.
1863년 1월 31일, 편집자 헤첼이 신인작가 쥘 베른의 첫 소설을 출간했다. <기구를 타고 5주간 Cinq semaines en Ballon>이다. 이 책은 초판 2000부로 제작되어서 단행본으론 총 7만 6천 부가 판매되었다고 알려진다.(Drouot) 그렇다면, 그 2000부 전부를 파란색 양장 표지로 제작했던 걸까?
의심이 든다.
물론 책을 출판한 헤젤은 유명 편집자였다. 빅토르 위고, 조르주 상드, 알렉상드르 뒤마의 편집자가 양장본을 출판하는 일에 의심이 드는 게 아니다. 문제는 쥘 베른이다.
1863년 첫 책을 내기 전까지 쥘 베른의 작가 경력은 그림책 잡지인 <Musée des familles>에 했던 기고가 다였다. 작가로의 검증보다 법대 출신 엘리트라는 입증이 훨씬 빨랐던 신인에게 양장본 출판이 가능했던 걸까? 그게 가능하다면 21세기의 모든 글쓰는 사람들은 19세기로 가는 편이 낫다.
매우 희귀함
그렇게 타임머신의 발명을 학수고대하다가, 경매 카탈로그에서 1863년 1월 31일 출간된 책을 찾았다.
"매우 희귀함"이라고 적혀있는 책은 800유로 입찰가로 출발한다.
내가 정독한 카탈로그는 Drouot라는 파리 예술품 전문 경매사의 경매품 정보지였다.
정보지에는 입찰 가격, 물품에 대한 상세 정보, 상태 정보, 가치를 가늠할 수 있는 배경 같은 것들이 정리되어 있다. 그중 눈에 띄는 것은 출품인이다. 수 십, 수 백점의 수집품은 모두 <Weissenberg 박물관> 한 곳에서 나왔다. 대체 어떤 박물관이길래 쥘 베른에 관한 수집품이 이렇게 전문적일 수 있는지 궁금해졌다.
Weissenberg는 독일 동부의 작은 도시다. 혹시 지역 박물관일까 싶어 찾아보니, 실제 지역 박물관이 있다. 그런데 지역 문화 같은걸 전시하는 작은 박물관이다. 그럼 혹시 기부품은 아닐까? 내 머릿속에서는 지역 거부가 사망하면서 박물관에 수집품을 기증하고 그 물건들이 경매로 나오는 아름다운 미담 한편이 작성되고 있었다.
당연히 상상이다.
현실에서 그런 일은 좀처럼 없다. Weissenberg 박물관은 박물관이지만 통상적인 박물관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는 통상적인 물리 공간으로 조성된 전시관이 없기 때문이다.
박물관으로 불려야 할 만큼 수준 높은(=방대하고 집요한) 컬렉션이었기 때문에 이름 붙였을 뿐, 개인 소장가의 수집품이었다. 실제로 내가 이제껏 방문한 쥘 베른 박물관에서 보지 못 한 수집품도 있었다. 이 자는 진짜다.
원 소유주는 Éric Weissenberg(1941-2012)로 쥘 베른의 팬이었다.
사망 전까지 50여 년간 꾸준하게 쥘 베른과 편집자 헤첼의 후손들로부터 유물을 사들였다고 한다.
이번 경매는 수집가의 사망으로 한꺼번에 시장으로 나오게 됐다.
수집가가 사망했다
인쇄됐을 뿐인 종이들을 평생을 바쳐 모아 왔던 팬의 사망에 가슴이 먹먹하다. 한편 그 팬이 죽자마자 이렇게 뿔뿔이 흩어져버린 성과에 헛헛하다.
그는 집착하던 모든 것이 이렇게 빨리 흩어져 버릴 걸 몰랐을까?
알았다고 해도 멈추지 않았을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 함께하는 것만으로 즐거울 수 있는 것. 그 이후는 상관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마음을 이해하는 자만이 수집을 시작해도 좋다.
일반적으로 이런 경매를 기사로 접할 때,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숫자다.
얼마였던 책이 얼마에 팔렸고, 얼마에 수집했던 물건이 얼마로 뛰었다더라. 대중의 호사는 거기에 있다.
그러나 수집의 즐거움은 가격에 있지 않다.
문득 어린 시절 포켓몬빵안에 들어있던 스티커를 모으던 생각이 났다.
부모님은 스티커를 사기 위해 빵을 버리는 걸 용납하지 않았고, 이유 없이 빵을 사기 위한 돈을 주지 않았다. 일주일 용돈을 모아도 고작 스티커 몇 개를 얻었다. 같은 스티커가 여러 개일 때는 당연히 친구들과 교환도 해야 했다. 수집은 컬렉션을 채워가는 데에 즐거움이 있었다. 만약 그때, 한 번에 도감을 채워줘 버릴 만큼 빵을 사줬다면 나는 영영 모으는 즐거움을 느끼지 못하게 됐을지 모른다.
쥘 베른의 첫 책이 양장본이든 문고판이든 상관없어져 버렸다.
무엇이든 누군가에겐 죽는 순간까지 같이가는 가치있는 수집품일테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