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글쓰기 모임에 갑니다
신유진 작가는 말했다. 비밀을 글로 쓰기 위해 비밀의 전부가 필요하진 않다고. 글에서는 비밀의 일부만 골라 다듬기 때문이다. 그러니 비밀을 다룰 용기면 된다고 했다*. 여기에 하나를 덧붙이자면 비밀을 쓰기 위해 중요한 건 들어줄 사람의 존재가 아닌가 싶다. 비밀을 밝혀도 괜찮다고 믿음을 주는 존재가 용기를 내게 한다. 내겐 글쓰기 모임이 그런 울타리가 되어 준다. 비밀을 소중히 여겨주는 이들이 모여 비밀을 존중해 주는 곳. 모임은 참여하는 이들에게 무엇이든 써도 좋다는 안전지대가 되어 준다.
그런 믿음 때문이었을 것이다. 누구에게도 한 적 없던 이야기를 지난번 과제로 적어갔다. 오랫동안 홀로 품고 있던 생각을 글로 썼다. 가족은 물론이고 가까운 친구에게도 털어놓은 적 없는 이야기. 믿음의 이면에는 비밀을 쓰고자 하는 나의 욕망도 있었다. 쓸 수밖에 없겠다는, 써야겠다는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마음. 글로 쓰여지면서 탄생하는 이유나 가치도 있을 것이다.
정지우 작가가 글쓰기 모임의 치유 효과에 대해 쓴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자신은 참여자들에게 글을 잘 쓰게 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모임을 운영하는데도 모임이 끝날 즈음이면 사람들이 집단상담처럼 값진 시간을 얻었다고 말한단다. 자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글쓰기의 치유 효과를 언급한다고. 이에 대해 그는 두 가지 이유를 꼽았다. 첫 번째는 자기 혼자가 아니라 여럿이 함께 모임을 운영하기 때문이고, 두 번째는 모임의 엄격함 때문이라고.
그는 자신은 냉혹한 코치를 자처하지만 10명 내외의 사람들이 서로의 글을 진심으로 읽어주고 그 마음을 받아주기 때문에 어떤 따뜻한 공기가 형성된다고 설명한다. 내가 참여하고 있는 글쓰기 모임에서도 늘 경험하는 일이다. 귀를 기울여 들어주려는 사람들의 존재가 다정한 기운이 되어 나를 안아주는 걸 경험한다. 그러니 인상적인 건 그가 두 번째 이유로 꼽은 엄격함이다. 모임의 엄격함이 따뜻한 공기를 형성하는 근거가 된다고 그는 말한다. 따뜻함만 흘러넘치는 모임이 아니라 명료한 프로세스와 기준, 형식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곳이 글 쓰는 이들에게 ‘안전지대’가 되어준다고 말이다.
명료한 프로세스와 기준, 형식이라는 것은 참여자들에게 해야 할 과제가 있고 ‘글쓰기’라는 뚜렷한 목적 아래 모임이 지속된다는 의미일 테다. 자신이 글을 쓰는 동안 겪은 어려움을 알기에 타인의 글 앞에 불성실하거나 무심한 태도로 임할 수 없게 된다. 내가 글에 들이는 노력과 약속을 지키려는 엄중함 만큼 모임에서 타인의 몫을 존중할 수 있다. 그렇기에 듣고 이해하려 애쓰다 보면 아무리 서툴고 미흡한 글이더라도 서로를 응원하고 지지하는 태도로 피드백이 오가게 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로에 대한 친근함이 생기고 모임이 시작되면 글쓰기 외 사적인 대화에도 열을 올리지만 우리 모임에서도 ‘글’을 빼놓지 않는 엄격함을 유지하고 있다. 이 약속이 우리 사이에도 ‘안전지대’라는 진실성을 담보해 준다. 비밀의 일부를 골라 다듬어간 글을 멤버들에게 읽어 주었을 때, 누군가는 말없이 눈물을 훔쳤고 누군가는 작게 숨을 토해냈다. 곁에 있는 한 분은 가만히 나를 토닥여주었다. 글이 탄생한 목적과 가치라는 빈 공간이 눈물과 숨과 토닥임으로 채워졌다. 진실하려고 애썼던 나의 문장은 그걸 알아보는 이에게, 언젠가 그런 문장이 필요한 이에게 닿을 거라는 가능성을 얻었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참여자에게도 모임은 그런 자리가 되어 주고 있을 것이다. 2년 넘게 모임을 이어오다 보니 한두 차례의 만남에선 느낄 수 없던 성장이 확연히 눈에 보인다. 지난 모임에서 마주한 하루님의 글이 그랬다. 글쓴이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담겨 있어 좋았다. 좋았다는 말로는 부족할 정도로 ‘하루님 다운’ 글이라 기뻤다. 힘을 빼서 자연스럽고 담백한데도 울림을 주는 글. 읽다 보면 마음 한구석에서 맑은 기운이 떠오르는 그런 글. 어떤 글이 ‘나답다’라는 말처럼 반길 일이 있을까. 고유해서 그만이 쓸 수 있는 글이라는 평은 쓰는 이를 든든하게 해 준다.
하루님의 글에는 우연히 누군가에게 선의를 베풀었던 날, 언젠가 그와 유사한 선의를 받았던 기억을 떠올린 에피소드가 들어 있었다. 짝을 잃은 한 짝의 귀걸이가 제 짝을 찾아 쌍으로 놓인 것처럼 잘 짜인 구조가 보기 좋은 글이었다. 그보다 더 보기 좋았던 건 글에 담긴 하루님의 진심이었다.
“나도 조금은 내가 바라던 모습이 되어가고 있는 걸까. 닮아가고 있는 걸까. 지금껏 지나친 수많은 사람들과 내게 건네졌던 선의들이 이런 순간을 만들어주었나. 그냥,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무어라 정의 내리기 어려운 오묘한 기분이었다. 비워져 있던 옆자리에 앉은 학생에게 먼저 말을 걸었던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하루
‘내가 바라는 모습이 되어’ 가고 있다는 하루님의 마음에, 그런 누군가의 고백에 나의 마음까지 환해졌다. 이십 대인 하루님이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게 부러웠다. 이십 대의 나는 자신을 못마땅해하다 바라는 모습엔 영영 다가갈 수 없을 것 같아 절망하곤 했는데. 그처럼 불안하고 혼란스러운 시절이 이십 대 아닌가. 그런데도 하루님은 자신이 바라는 모습이 되어가고 있다고 적었다. 그만큼 자신의 내면을 돌보며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이런 문장을 적을 수 있었겠지. 거기에 글쓰기가 한몫했을 거라고 믿는다.
“아, 너무 뿌듯해요. 하루님을 계속 쓰게 해서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하루님이 우리 모임의 멤버라는 사실에 뿌듯해서. 일단 쓰게 하는 게 모임의 역할이다. 모임 덕분에 우리는 계속 쓸 수 있었고 앞으로도 계속 쓸 테니까. 모임에서 들려주는 글에 활짝 자신을 열고 담뿍 자신을 담은 하루님께 고마웠다. 없던 것을 만들어내면 무언가가 된다는 걸 그렇게 보여주었다.
하루님이 글에서 말한 선의가 모임 안에서 오간다. 누군가를 잘 듣고자 하는 내 안의 선의를 열면 다른 이의 선의가 내게로 흘러든다. 그날 수현 님의 글에도 선의를 내밀자 또 다른 선의가 선물처럼 돌아온 일이 적힌 것처럼. 선한 마음의 순환 고리를 발견할 수 있었던 것도 글로 적혔기 때문이다. 선의는 또 다른 선의를 부른다는 걸 알기에 눈에 띄는 대가 없이도 우리는 이 모임을 지속하고 있나 보다.
정지우 작가의 말처럼, 단순히 선의와 따뜻함만으로 모임이 오래 지속될 수는 없을 것이다. 엄격성을 갖출 때 울타리로써의 튼튼함이 생기기 때문이다. 꺼낼 수 없는 생각을 꺼내 치유와 성장으로 건너가기 위해서는 ‘안전지대’가 확보되어야 한다. 힘들더라도 과제를 해오고 타인을 들으려는 태도를 견지하는 일. 쓰는 사람으로 존재하겠다는 엄격성이 각자의 안에 진실함을 일군다. 우리의 모임이 그만의 다정한 엄격성을 유지해 서로의 ‘안전지대’로 오래오래 남아주길. 지난 저녁, 그 은밀했던 시간처럼.
내 안의 생채기에 오래도록 덮어두었던 반창고를 떼었는데, 하나도 따갑거나 아리지 않았다. 가슴 깊은 곳에 잠긴 이야기를 꺼내는 데엔 말하기 만으로는 부족하다. 말은 투박하고 부박한 데다 그 속성 자체가 빠르고 태어남과 동시에 사라지기에 믿음직스럽지 않다. 그걸 알아 우리는 말에 담지 않는 비밀이라는 걸 품는다. 비밀에는 비밀과 근사한 크기와 형태를 가진 그릇이 필요하고. 가능한 한 정교하게 다듬은 글이라는 그릇에 간신히 넣어볼 수 있는 것이다. 비밀을 다룰 용기. 모임 덕분에 그 용기를 배워가고 있다.
*<사랑을 연습한 시간> 신유진, 오후의소묘
** '글쓰기 모임을 하는 마음'(2024.11.27), 정지우, '세상의 모든 문화' 레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