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를 써 볼까요
글을 쓰면 쓸수록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알지 못한다는 것을, 그땐 알았는데 완전히 잊고 있었다는 것도 한 발 뒤에 발견한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내가 아는 건 먼지 한 톨만큼도 되지 않아 좌절한다. 다행스럽게도 내 안에는 동전의 마음이 있다. 희망에 닿았다가 절망으로 엎어지지만 절망에 빠지더라도 희망으로 뒤집어볼 수 있는 마음. 동전의 앞 뒷면처럼 휙 던지면 단숨에 반대쪽으로 돌려지기도 하는 마음이.
무수한 날 좌절하고 절망에 닿아 슬픈 표정을 짓다 마음의 동전을 던진다. ‘이렇게 배울 게 많다니!’ 하며 감탄으로 뒤집어본다. 종종 마음은 가뿐하게 돌아 누워 언제든 배울 수 있음에 기뻐한다. 영원히 초보자로 살자 생각하며 안도할 수 있다.
무용한 일에 매달리는 은근한 기쁨
새해에는 시를 써 보자 다짐했다. 시간이 흘러 다짐이 옅어질 새라 서둘러 시 쓰기 수업에 등록했다. 시를 읽기는 해도 써 본 적은 없으니 초보도 들을 수 있을 만한 수업을 골랐다. 시를 써내라고 요구하는 수업 말고 시를 공부해 보자고 권유하는 수업으로. 내가 선택한 수업에서는 매 차시마다 지정 시인의 시집 한 권을 읽고, 그의 스타일을 분석한다. 선생님이 예시로 주는 시를 자신의 언어로 고쳐 써 보는 연습을 한다. 이 정도면 해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수업마다 선생님께서 지정 시인의 시 스타일에 대해 심도 있는 분석을 들려준다. 시를 쓰기 위해서는 좋은 시를 읽고 분석하는 연습도 필요하다면서. 주제를 파악하고 시의 경향과 말투의 특성을 파악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야기(내용)를 표현할 형식(서술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했다.
선생님의 시 분석이 끝나면 시 쓰기 연습으로 넘어간다. 공부한 시인의 시 한 두 편을 정해 그걸 자신의 언어로 바꾸어 쓰는 연습. 주어진 시에서 상황이나 감정, 감각에 대한 힌트를 얻어 그걸 표현할 나만의 언어를 발굴하는 시간이랄까. 시 한 편이 아니라 한 연정도, 3-4줄 분량을 고쳐 쓰는 작업이라 10~15분의 시간이 주어진다.
머리를 굴리면 가뿐하게 단어가 툭툭 나오면 좋으련만 그 시간마다 나는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생각나는 단어를 노트에 늘어놓아 보면 너무나 낡고 닳은 뻔한 것들 뿐이라서. 시인은 익숙한 장면을 낯설게 바라보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던가. 다수가 공감하는 감정이나 대상을 그것과 가장 멀리 있는 단어로 새롭게 환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나의 언어는 멀리 가지 못한다. 건져낼 수 있는 단어라고는 그 감정에 바짝 붙어있는, ‘걔랑 걔랑 친하다’는 걸 누구나 뻔히 아는 동네 친구 같은 말들이다.
그동안 얼마나 틀에 박힌 단어와 식상한 표현만 써 왔는지 시 수업에서 드러난다. 구체적이면서 감각적이고 실체가 있는 무엇을 찾으라는 선생님의 요구에 내가 내놓는 건 관념적이고 일상적인 말, 서사적이고 설명적인 언어다. 좋아하는 시에서 보았던 두 눈을 번쩍 뜨이게 하고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던, 펄떡이던 단어들은, 초보 낚시꾼에게 쉬이 잡히지 않는다. 펄떡이는 단어, 살아 숨 쉬는 단어를 찾고 싶은데, 내 언어의 바구니를 아무리 뒤적여도 보이지 않는다. 영영 찾지 못할 것 같다. 시랑 나랑은 가까워질 수 없는 것 같아 포기하고 싶어 진다.
시를 위해 번뜩이는 단어를 찾는 작업은 드넓은 고대 유물 발굴지에서 조그만 삽과 가느다란 붓을 들고 흙을 파내려 가는 일 같다. 거기 뭐가 있는지 알지 못한 채 뭐가 나올 거라는 약속 없이 무(無)희망의 대지에서 희망을 발굴하는 일. 파고 파고 파고 또 파보는 수밖에 뾰족한 수가 없지만 그런데도 지치지 않아야 하는 일. 단어에서 단어로, 또 다른 단어로, 그 너머로 한없이 건너가 보려는 무용한 시도를 시는 요구한다. 단어가 숨어 있을지 모르는 흙 무더기를 하염없이 파내려 가야 한다. 그저 묵묵히.
그러느라 내가 들었던 어떤 수업보다 피로도가 크다. 영혼까지 탈탈 털린 기분이 들 때도 있다. 내 안의 언어 주머니가 이토록 빈약하다는 사실을 마주한 채 견디느라 피곤한지도 모르겠고. 그런데도 내게 있을지 모르는 무언가, 혹은 없을지 모르는 무언가를 발굴하겠다고 매달리는 일이 매력적이다. 어떤 이유나 목적도 없기 때문이다. 무용한 일에 몰두해 몇 시간을 보낸다는 게 나를 은근히 기쁘게 한다. 매번 좌절하고 지치는데, 소득은 없고 가망도 없어 보이는데 좌절하면서도 계속 파보고 싶다는 의지가 생긴다. 이상도 하지. 시 쓰기에는 젬병이라는 사실을 알고 나니 오히려 하염없이 해보자는 생각이 드는 건.
시(詩)라는 자유, 비현실적인 도약
못한다고 말하는 순간 잘할 필요가 전혀 없어지는 자유, 작지만 선명한 자유가 생성되고 나는 그 소박한 감각의 환기가 좋아 자주 말한다. “저는 못합니다.”
106쪽 <시차 노트>, 김선오, 문학동네
그렇다. 못한다는 걸 인정하고 나니 잘할 필요가 없어 자유롭다. 작지만 선명한 자유로 환기된다. 처음 글씨 쓰는 법을 배운 아이처럼 말이 안 되는 문장을 써도 괜찮을 것 같다. “저는 못해요.” “시 쓰기는 처음이거든요.” 이렇게 말할 수 있으니 뭐든 해보자 싶다.
꿈꾸는 사람은 기꺼이 초보가 되려는 사람이다. 자신이 못한다는 걸 기쁘게 받아들이는 사람. 거기서 시작된다. 자신이 어떤 싹을 틔울지 알지 못하는 상태로, 씨앗의 상태로 한동안 흙 속에 웅크려 보내는 시간에서. 동그란 싹이 나올지 기다랗고 뾰족한 것이 나올지, 외떡잎일지 쌍떡잎일지 알 수 없다. 흙 속인 듯 깜깜하다. 하지만 기분 좋은 꿈 속이다. 기다림으로 오래 흐르는 꿈일지 모른다.
“시는 시가 아닌 것을 향해가며 발생한다”라고 나의 시 선생님은 말씀했다. 무언가에서 멀어지는 방식으로 무언가에 다가갈 수 있다니, 이건 연애와 닮은 것 같다. 좋아할수록 관심 없는 척하기, 다가가고 싶을수록 멀리하며 밀당하기. 이런 말이 불혹을 훌쩍 지난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불가능으로 걸으라고 손짓하는 시와 연애하고 싶다.
오래갈 짝사랑의 조짐인지도 모른다. 수업시간마다 좌절하니까. 불가능에서 가능으로 뒤집을 용기, 마음의 동전 던지기가 필요하다. 그조차 잘 되지 않는다. 하지만 이건 시 쓰기잖아. 어디든 '시(詩)'를 붙이면 비현실적인 도약이 발생한다. 할 수 없을 것 같은 마음으로도 시에는 매달릴 수 있다. 시를 쓰다 보면 삶의 다른 부분으로도 '시'가 옮겨 갈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