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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춤추는바람 Mar 16. 2024

삶을 구하는 일기

날마다 쓰는 이유





바야흐로 봄이다. 꽃샘추위로 움츠러들었던 며칠은 겨울이 길다 싶어 한숨이 나왔는데. 하루 지나 해 들자 온화한 봄빛이 사방에서 넘실댄다. 잔 가지 위로 기다렸다는 듯 연둣빛 여린 잎들 돋아났다. 동네 공원 초입에 늘어선 산수유나무들도 이때다 싶어 노란 꽃을 피워 올렸다. 목련 몽우리에는 슬쩍 빗금이 갔고. 머지않아 벌어질 것이다.



겨울 끝, 봄이구나 생각하니 기쁨도 잠시 초조함이 자란다. 만물이 새 옷을 입고 화사하게 빛날 봄을 애타게 기다렸건만 막상 들이닥치는 봄을 마주하자 덜컥 겁이 난다. 그 앞에서 무엇 하나 변한 것 없는 자신이 초라해 보일까 그런가 보다. 자연은, 세상은, 매서운 추위를 견디며 긴 긴 기다림에 지치지 않고 제 안에서 갈고닦은 보석을 내놓을 텐데. 내겐 무엇이 있나. 나도 내보일 만한 예쁜 것이 있나. 따사로운 봄볕은 패인 주름마저 드러내고 말 텐데 그 앞에서 나의 텅 빔만 선명해지면 어쩌나. 나는 빈 주머니를 털어보다 머리만 복잡해지고 만다.

 


단숨에 하늘을 뒤덮는 먹구름처럼 보이지 않는 미래가 나를 사로잡을 때가 있다. 계획했던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고 어떤 가능성도 보이지 않는 날. 그저 열심인 것이 무슨 소용인가 싶어 기운 빠지는 날이. 내가 불러들인 불안과 초조로 자신을 가둬 버린다. 텅 빈 미래는 내 안에 음습한 밑그림을 스미게 하고.......



그런 순간에 맞서기 위해 나만의 루틴을 끌어 온다. 일기장을 펼쳐 내 안에서 펼쳐지는 이상한 시나리오를 한껏 끄적인 후 최적의 결론을 찾아 마침표를 찍는다. 불안이 그려내는 불길한 전망을 나열하다 보면 그 전망들이 과도하다는 걸 깨달을 수 있다. 글로 적는 사이 불안과 나 사이 적정한 거리가 생기고 그러면 사건과 감정, 불안의 실체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시력이 생긴다. 불길한 시나리오들을 과감하게 폐기할 수 있는 용기가 일기를 끄적이는 손에서 자란다.



마지막으로 현재로서 가장 바람직한 대안에 안착한다. 그러면 적절한 댐을 설치한 듯 불안의 수위는 더 이상 높아지지 않는다. 내 안에서 찾은 답과 계획으로 나는 용기를 얻고 불안은 잠잠해진다. 쓰는 일은 명상처럼 내 안의 흐름을 가다듬고 다시금 지금에 초점을 모으게 해 준다. 오지 않은 미래에 휘둘리는 대신 현재에 집중하는 힘을 길러 준다. 일기 쓰기를 통과해 오늘을 살 깨끗한 마음을 얻는다. 그러면 다시 오늘치의 성실을 실행할 수 있다.



천문학자 심채경은 한 TV 프로그램에서 "일기가 생존에 도움이 된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그는 영국의 탐험가 어니스트 섀클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섀클턴은 남극 횡단을 위해 대원을 모집해 남극에 가지만 부빙에 갇히고 만다. 그는 배를 버리고 대원 모두가 생존해 돌아가는 것으로 자신의 목표를 수정한다. 그때 많은 짐을 버리면서도 챙긴 물건이 있는데 악기와 사진기라고 한다. 그것들을 챙긴 이유는 음악은 힘들고 지칠 때 사기를 북돋아 주고, 사진으로 기록을 남기는 일은 생의 의지를 키워 주기 때문이었다. 생을 기록하는 일, 즉 일기를 쓴다는 건 스스로 힘을 구하는 일이다. 스스로를 구원하는 일이다. 심채경은 나에 대한 기록을 남긴다는 건 미래를 생각하는 일이며, 나에 대한 애정과 삶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는 일이라고 덧붙였다. 쓴다는 것은 그걸 읽을 언젠가를 떠올리는 일이기에 희망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내게도 일기는 위태로운 나를 구해 하루를 살아내게 한다. 불필요한 고민과 불안이라는 부빙에 자신을 가두는 대신, 탈출구를 찾아 현재에 집중하게 해 준다. 일기를 쓰면서 나만의 중심을 잡고 리듬을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글을 쓰며 자신을 지속적으로 돌보고 다듬으면 외부의 사건과 압력에 휘둘리지 않는 호흡을 지킬 수 있다. 내게 중요한 것을 돌아보며 생명선과 같은 심지를 꺼트리지 않을 수 있다. 그렇게 단단하게 삶을 딛고 설 힘을 구해 나만의 걸음을 계속한다. 일기를 쓰면서 날마다 나만의 메트로놈을 설정한다.



일기는 자신과 세계 사이 적절한 거리를 찾는데도 도움이 된다. 자신과 지나치게 좁아지거나 멀어지면 시선은 왜곡되기 마련. 거리를 조절하여 초점을 바로잡을 수 있다. 글로 적고 나면 심각해 보이던 일이 생각보다 가볍다는 걸, 고통스럽던 일이 그토록 아프지 않다는 걸 발견하게 된다. 때로는 하찮아 보이던 일이 의미를 되찾고 놓쳐 버릴 뻔한 기억과 기회를 움켜쥐기도 한다. 일기를 쓰며 나의 내면을 살피면 스스로가 뜯어진 곳을 메우고 기울어진 자리를 바로 잡을 수 있다. 일기 쓰기라는 형식을 통해 나와 세상 사이 적절한 관계를 설정하고 절망하려는 나를 일으켜 세운다. 그렇게 쌓인 일기가 때로는 삶의 댐이 되고 성벽을 이룬다. 삶을 지킴과 동시에 삶을 지어 나가게 해 준다.




나의 하루는 세계에 찍히는 보일 듯 보이지 않는 점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내게는 전부인 점. 그런 점을 모으는 방법으로도 일기는 유용하다. 작은 우표를 수집하는 수집첩처럼 일기장 속에 매일이라는 점을 꽂는다. 오늘은 점 하나일지 모르지만, 그런 점들이 모여 무언가를 그리고 있다고 믿으면서, 한 땀 한 땀 꿰매어 길을 내고 지도를 그리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설령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다. 점들을 모으는 사이 자신을 믿고 사랑하는 방법을 익힐 수 있으니까. 점을 모으는 과정으로 나는 무사히 하루를 살아낼 수 있으니까. 자신으로 하루를 살아 내가 되려는 노력이 일기를 쓰려는 행위에 담긴다. 기록을 위해 삶을 되돌아보고, 기록하기 위해 순간에 충실하려는 사이 흔들리는 자신과 불안한 삶을 견딜 힘이 생긴다. 그러면서 그 모두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나와 내 삶은 누군가 혹은 외부의 변화나 손길이 만들어 줄 수 없다. 스스로만이 할 수 있는 일. 그러므로 내가 직접 나를 위한 환경을 만들어 살아내야 한다. 나의 삶이란 그런 방식으로만 운영될 수 있다. 자아를 창조했다는 수전 손택의 말처럼, 자아야 말로 스스로가 적극적으로 만들어가야 할 무엇이고, 이를 위해 알맞은 환경을 찾아 꾸리는 것도 나만이 해줄 수 있는 일. 나를 알아채고 필요한 환경을 탐색하는 과정이 일기를 쓰면서 일어난다. 저절로 되는 일은 없다. 내가 되는 일에도 꾸준한 노력과 헌신, 시도와 도전, 그리고 인내, 고통까지 끌어안는 담대함이 필요하다. '글 쓰는 자아'를 만들려는 사람이라면 스스로가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하고, 꾸준히 자신이 원하는 자아의 형상을 빚어가야 할 테고.




악착같이 나를 위한 시간을 챙기지 않으면 시간은 너무 쉽게 흩어져 버리고 만다. 내가 나이기 위한 시간만은 챙기고 싶다. 그러기 위해 더 촘촘하게 하루를 살고 싶다. 삶을 이루는 모든 결을 세밀하게 인식하고 흡수하면서. 그러려면 어떤 철저함과 날카로움만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 내가 된다는 건, 나로서 삶을 살아간다는 건, 부단히 자신을 벼려야만 가능한 일. 나로 사랑하는 일조차 어떤 날카로움을 지니지 못하면 제대로 행할 수 없으니까. 내 삶에 담을 수 있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하고 품어보지 못한 채 흘려보내는 일이 수시로 일어난다. 우리는 얼마나 쉽게 작아지고 일그러지고 마는지. 자신과 사랑하는 이를 안으려는 품조차 쉽게 납작해지고 마는지.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

우리 사랑이라 알고 있는 모든 것

그거면 충분해,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 만큼밖에는 담지 못하지.

-에밀리 디킨슨

<고독은 잴 수 없는 것> 강은교 옮김, 민음사




사랑이란 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는 에밀리 디킨슨의 말은 옳다. 나로 살아가는 일이 나와 내 삶을 사랑하는 일이며, 내게 온전한 삶을 선사하려는 노력이 타인의 온전한 삶을 인정하는 바탕이 된다. 나를 사랑하는 힘이 결국 타인과 세계를 향한 사랑의 근원이다. 하지만 그 사랑을 우린 자기 그릇만큼 밖에는 담지 못할 것이다. 내가 나를 사랑하는 만큼 타인을 사랑할 수 있듯, 내가 삶을 사랑하는 만큼 이 세계를 사랑할 수 있다. 나라는 그릇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을까. 좁아지고 얕아지고 얄팍해지지 않게 물레 위에서 끝없이 빙빙 돌아갈 수 있을까. 내내 빚어지고 있는 그릇임을 상기하길. 서툰 도공의 손에서 거듭 매만져지더라도, 여전히 커질 수 있고 깊어질 가능성을 품고 있다는 걸. 엉성하더라도 움푹해져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는 걸. 빚고 빚고 빚고, 날마다 과정 속이라는 걸.



이 모두를 기억하기 위해, 자꾸 납작해지는 자신을 세우려 오늘도 일기장을 편다. 빙글빙글 돌아가는 중인 건가. 봄볕에 아지랑이 피어오르듯 어질어질한 건.



다시 시작하기 좋은 3월이다. 텅 비어야 깊어지는 것도 있을 것이다. 반짝이지 않아도 초라한 모습으로 드러나는 세계도 있을 것이다. 무심히 쓰는 과정으로, 보이지 않게 쌓이는 벽돌이 우리 안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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