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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은 겪는 일이다

길을 걸으면 내가 열리고

by 춤추는바람





한 사람의 눈이 풍경을 바라볼 때, 그가 살아온 삶 전체가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는 문장을 읽은 적이 있다. 풍경을 응시하는 시선에는 과거로부터 시작되어 미래로 향하는 한 사람의 역사가 묻어 있다고. 여행지에서면 유독 창과 문에 시선이 닿았다. 그 너머가 궁금했다. 어린 시절 이층집에서 골목을 향해 난 창 앞에 서서 밖을 내다보곤 했다. 집들이 겹쳐 선 풍경을 보며 세상과 타인의 삶을 궁금해했다. 그 이후 이곳저곳에서 보았던 무수한 창들이 나의 망막에 저장되었다. 미래에도 나는 어느 거리의 창문 앞에서 머뭇거릴 것이다.


그날은 아침부터 비가 내렸다. 주말이라 아이들은 학교에 가지 않았고 아이들을 돌봐야 하는 친구가 혼자 외출하라고 내게 권했다. 도쿄에 사는 친구를 방문해 나흘간 머무는 여정이었다. 2년 전에 왔을 때 휴관이라 가보지 못한 네즈 미술관이 떠올랐다. 친구는 이미 다녀왔다며 비가 와도 운치 있을 거라고 전했다.


전날 나와 동행했던 친구는 아이들 하교 시간에 맞춰 먼저 집으로 돌아갔다. 오후의 몇 시간은 홀로 국립박물관을 둘러 보았다. 국립박물관 뒤편에 있는 연못 가에 말없이 앉아 있던 시간이 좋았다. 연못 앞에 놓인 커다랗고 윗면이 반반한 바위에 앉았다. 또 다른 바위에 먼저 혼자 앉아 있던 이를 보고 용기를 내었다. 주변으로 드문드문 떨어져 앉아 고요히 숨을 고르는 사람들이 보였다. 우리는 조금 다른 각도에서 연못과 나무가 그려내는 풍경화를 감상하고 있었다. 나무에서 번져나가기라도 한 것처럼 연못의 표면은 짙은 쑥 빛을 띠었고 연못 너머로 각양각색의 나무들이 층을 이루며 배경을 채웠다.


언젠가 파리의 미술관에서 보았던 카미유 피사로의 그림이 떠올랐다. 화폭의 대부분을 푸른 나무들이 차지한 여름의 풍경을 그린 그림. 어린 시절 달력에서 보았을 법한 풍경화였는데 그날따라 홀린 듯 그림 앞에 머물렀다. 나뭇잎 표면에 부딪힌 햇살이 캔버스 너머로 흘러나올 듯 반짝였다. 겨울이었고 잿빛 하늘이 이어지던 날들이었다. 그림처럼 나무가 우거진 사이로도 햇빛이 스며들고야 마는 여름빛의 강렬함은 까맣게 잊힌 지 한참이었고 머지않아 여름이 돌아올 거라는 사실도 거짓말처럼 멀게 느껴졌다. 피사로의 그림은 나를 단숨에 여름 안으로 옮겼다. 그림을 보는 사이 살갗이 따스해졌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태양의 열기가 느껴졌고 나무들이 내뿜는 푸른 내음이 코끝에 감돌았다. 눈으로 들어온 풍경이 뇌를 지나 몸으로 신호를 보냈다. 본다는 것은 통과하는 것임을, 어떤 응시는 몸으로 겪을 수 있음을 경험했다.


연못 앞에서도 바람에 흔들리는 배경 숲을 오래 바라보았다. 숲을 통과하는 사람처럼, 세상이라는 갤러리에 전시 중인 한 점의 풍경화를 겪어내는 사람처럼. 쑥 빛 물 냄새가 흘렀고 까마귀 울음소리가 번졌다. 그곳에 앉아 있는 사람들의 시선이 연못 위로 교차했다. 우리는 각자였지만 하나의 그림 안이었다. 혼자이지만 외롭지 않았던 건 서로가 서로의 관객이 되어 주고 있어서였다. 연못과 숲이라는 풍경을 통과하는 사이 얇은 막이 내 위로 더해졌다. 이 풍경을 겪은 나는 어제와 분명 다른 사람이다.


하나의 장면에 가만히 머무는 경험이 한 사람을 미세하게 바꾼다. 온전한 몰입으로 나를 변화시키는 걸음을 옮겨 보고 싶었다. 아이들과 식탁에 앉아 빙고 게임을 하다 엉텅이를 털고 일어났다. “안녕!” 씩씩하지만 조금 떨리는 목소리로 친구와 아이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밖으로 나왔다. 우산을 펼쳤다. 이슬비가 내리는 토요일 아침, 거리가 차분했다.


네즈 미술관 정원은 기대만큼 아름다웠다. 전시까지 천천히 둘러보고 아쉬움 없이 건물을 나섰다. 오전 시간은 홀로 보내는 대신 아이들이 좋아하는 햄버거집에서 점심을 먹고 오후 시간을 함께 보내기로 했는데 약속 시간이 가까웠다. 만나기로 한 햄버거집을 앱으로 검색하니 올 때와는 다른 길을 알려주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십 분가량 걸어야 하지만 버스로 이동하는 시간은 짧은 경로. 걷는 일이라면 자신 있고 자처하는 일이다. 여행에서라면 특히 더! 의도치 않게 낯선 길을 걸어야 할 이유가 생겼다.


앱에서는 큰길 대신 한적한 골목으로 나를 안내했다. 미술관 근처 상점이 늘어선 거리를 벗어나자 낮은 건물이 이어진 좁은 길로 접어들었다. 가로 폭이 좁고 아담한 일본식 주택들이다. 그런데 어딘가 이국적인 뉘앙스가 풍겼다. 창문을 뒤덮은 넝쿨 식물, 하늘색으로 칠한 목조 주택, 현관을 타고 오르는 등나무, 벽에 기대어 놓은 자전거와 담장 대신 일렬로 놓인 화분들. 마당없이 창문은 길에 면한 작은 집이지만 집집마다 빠짐없이 식물이 있었다.


언젠가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을 때 금문교 부근 바닷가 마을에서 보았던 풍경과 유사했다. 길을 걷는 동안 누군가의 배려와 호의를 받는 것 같았다. 근사한 이와 동행하는 기분이었다. 자신을 위해 집의 안팎을 가꾼 사람들의 정성이 길을 걷는 이방인에게까지 전해졌기 때문이다. 꾸미지 않은 듯 자연스러운 아름다움을 일상에 두기 위해서는 큰 노력이 든다. 넓고 쾌적한 공간을 포기하거나 하지 않아도 되는 청소를 주기적으로 해야 할 수 있다. 습도 유지에 신경을 써야 하고 식물로 인한 곤충의 출현에 담대해야 할 것이다. 직접 살림하며 집을 꾸려가는 사람이라면 경험할 법한 사소하지만 번거로운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그러니 쓰레기 없이 깨끗한 골목을 유지하는 태도와 낡았을지언정 고즈넉하게 우아한 집의 외관을 지키는 손, 창문과 벽을 식물에게 내어주는 마음, 공유지인 집앞 길에 고운 화분을 줄줄이 내놓는 인심을 지닌 사람들이 궁금했다. 그 동네에는 어떤 사람들이 사는 걸까 호기심이 일었다. 창문을 바라보며 그 너머의 사람들을 상상했다. 그들의 하루는 어떻게 이루어질까. 이런 집과 골목에 사는 삶은 어떤 걸까. 날마다 어떤 희생을, 혹은 어떤 기쁨을 알알이 수놓는 일일까.


도쿄의 모든 거리가 이처럼 단정하면서 아늑하진 않을 것이다. 유명 미술관과 핫플이 모인 거리에서 멀지 않으니 집값이 비싼 동네일지도 모른다. 집이 작아도 식물을 반드시 곁에 두는 건 도쿄의 일상적인 면모일지도 모른다. 도쿄의 날씨가 어디서든 나무 한 그루를 무럭무럭 자라게 하는 덕분일지도. 반듯한 풍경 뒤로 감추고 있는 무언가도 있을 것이다. 그 모두를 고려 한데도 그 길은 특별했다. 눈앞에 보이는 것 너머로 우리를 이끄는 장면에는 남다른 점이 있을 거라고 믿는다.


걷다 보니 작은 가게들이 등장했다. 아직 이른 시간이거나 토요일이라 문을 닫아 안을 볼 수 없는 레스토랑들이다. 갈림길이 나오는 모퉁이에서는 빈티지 가구와 소품을 파는 가게를 만났다. 건물 앞으로 1층 높이의 벽을 세워 전면을 가렸지만, 그 안에서 벽을 넘어 자란 나무가 커다란 잎을 풍성하게 달고 있어 시선이 갔다. 벽과 벽 사이 한 사람이 지나다닐 수 있는 틈으로 들여다보니 나무 아래로 결이 고운 원목 식탁과 의자가 놓였고 불 밝힌 알전구가 드리워졌다. 홀린 사람처럼 가게 안으로 들어가니 주인인 듯한 여성이 도자기 하나를 이리 저리 옮겨 놓고 있다. 정물화를 그리기 전 최상의 구도를 짜려고 고심하는 화가처럼.


건물 앞 벽과 벽 사이의 틈새가 또 하나의 눈 같았다. 그것은 밖을 향해 열린 동시에 안으로 깊어졌다. 틈은 통과하게 해준다. 안을 안으로 고정시키지 않고 끊임없이 밖과 교류하게 한다. 드나듦을 허용하는 것. 틈새를 오가는 발걸음, 바람과 햇살, 어떤 기운이 붓 터치처럼 그 안의 장면을 살아있게 한다. 나의 눈도 그런 틈새일까. 끊임없이 나의 외부와 교류하고 있을까. 나는 이토록 넉넉하고 인심 좋게 드나듦을 허용하고 있을까. 그렇게 내게도 외부의 무언가가 오가며 붓 터치를 남기고 있을까.


길에서 나는 혼자였지만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이들을 내 안으로 초대하고 있었다. 아니 그들이 나를 계속 초대했다. 자신이 생활하는 공간을 단정한 미감으로 가꾸는 이들은 자신에게 좋은 공간을 만드는 동시에 타인에게도 그곳을 내어준다.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으로도 우리는 삶과 장소, 일상을 공유할 수 있다. 좋은 기운이 내게 스며들었다. 나의 삶을 가꾸는 일이 개인의 일이 아니라 공동체의 일이 될 수 있음을 생각했다. 나의 창을 궁금해하는 누군가에게 이처럼 정갈한 기운을 전하고 싶었다.


낯선 길에 홀로 서자 내가 열렸다. 가느다랗게 틈새가 생겼다. 호기심이 한 일이다. 일상에서 메말라 가던 나무에 여린 싹이 돋아나듯 호기심이라는 숨결이 들어왔다. 지도 앱에서 9분이 걸린다고 알려준 길에서 40분을 소요했다. 기쁨으로 달아오른 나는 어느 순간 빨리 친구를 만나고 싶었다. 이 기쁨을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 걸음이 빨라졌다.


햄버거집에서 먼저 밥을 먹고 있던 아이들이 반갑게 나를 맞았다.


“이모! 이모는 뭐 먹을 거예요?”







* <등을 쓰다듬는 사람> 김지연, 1984book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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